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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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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만 고도화된 ‘복지지체’ 세상


정규직 가장 중심의 파편적 사회보장 체계, 비정규 시대에 맥을 못 추네
등록 2010-04-14 15:22 수정 2020-05-03 04:26

빈곤 문제는 복합적이다. 이번 탐사기획에서 볼 수 있듯 주택, 의료, 노령, 장애, 교육, 가족구조, 지역적 고립과 낙인, 공공보장 체계와의 괴리, 심지어 비극적 사망 등 다양한 요소가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주민들의 빈곤에 얽혀 있다. 그런데 복합적이고 역동적인 빈곤 상황에 비해 우리의 빈곤 대책은 역동적으로 기능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빈곤만 고도화된 ‘복지지체’ 세상.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빈곤만 고도화된 ‘복지지체’ 세상.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전통적 복지 모형 안 통하는 ‘신사회위험’

소득·주거·의료 등 각 영역에서 우리나라의 사회보장은 왜 이토록 빈약한가? 우리나라의 사회복지는 본격적 역사가 짧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외국 원조와 수용시설을 중심으로 한 긴급구호가 복지의 거의 전부였다. 이후 개발독재 시대에 산업화와 관련된 사회보험제도 등이 도입됐지만 기본적으로는 경제성장에 초점을 두고 있었다. 빈곤 탈피는 각자의 근면성에 기초해 개발성장 과정에 동참했을 때 비로소 얻어지는 것으로 간주됐다. 분배 문제나 사회적 안전망은 극히 잔여적 형태로 ‘일부 긍휼에 의한 자선 패러다임’을 유지했다. 당시 만들어지기 시작한 사회복지제도들은 복지가 가장 필요한 계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공무원·군인 등 정부기관 구성원이나 대기업 종사자 등 정부의 핵심 대리인에게 주로 적용됐다.

1980년대 후반의 정치적 민주화 과정은 우리나라 사회복지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사회복지 서비스의 공공성에 대한 인식이 확대되면서 주택·보건의료 등 ‘집합적 소비재’에 대한 공공체계가 구축됐고, 지역사회 복지체계도 등장했다. 빈곤지역에 대한 사회복지관 설립, 영구임대아파트의 건립 등도 이 시기에 이뤄졌다.

국민의 정부는 경제위기 상황에서 산업화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복지체계와 사회적 안전망을 보강했다. 공공부조제도인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를 시행하고 사회보험 체계를 완비했다. 서구 국가를 기준으로 표현한다면, 이는 전통적 복지국가의 사회보장 시스템에 해당하는 부분이 정비된 과정이었다. 하지만 같은 시기인 199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 복지국가 모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가 전면화됐다. 남성이 혼자 생계를 부양하는 핵가족을 기반으로 하는 전통적 사회보장 체계가 도저히 포괄할 수 없는 ‘신사회위험’(New Social Risk)이 광범위하게 나타난 것이다. 외환위기 이후 고용의 양과 질이 현저히 나빠졌고, 가구주 한 명이 일해서는 나머지 가족을 부양할 수 없게 됐다. 반면 여성이 일하기에는 보육과 돌봄이 사회화되지 않았다. 교육의 계층화 현상은 빈곤층에게 빈곤 지위가 세습된다는 자괴감을 더욱 증가시켰다. 빈곤층이 다면적 어려움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참여정부는 사회복지 환경 변화를 감안한 새로운 프로그램의 구축을 시도했다. 근로빈곤층에 초점을 두거나 사회서비스 프로그램을 중심에 두고 정책을 펼친 것은 이런 시도를 반영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는 신자유주의적 경쟁 논리와 불분명하게 혼합되면서 적절한 성과에 이르지 못했다. 결과적으로는 ‘로드맵’ 수준에 머물렀다. 더구나 국민의 정부 시기에 추진된 전통적 복지국가의 사회보장 체계가 완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사회복지 프로그램이 혼란을 가중했다.

역대 정부 복지정책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역대 정부 복지정책 (※ 이미지를 클릭하면 크게 볼 수 있습니다)

이명박 정부 이후에는 시장 논리가 더욱 힘을 얻고 있다. 빈곤 정책에서도 근로 연계가 강조된다. 빈곤층의 도덕적 해이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한다. ‘서비스 선진화 계획’ 등을 살펴보면 기존의 공공서비스를 시장화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여러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홍보하지만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사회적 자원을 실질적으로 확대 투입하지는 않는다. 사회복지 분야의 효율화가 주된 관심이다.

시장경제 체제를 받아들이는 상태에서 경쟁 논리를 폄하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빈곤 문제에 대처하려면 적절한 수준의 공공성이 필요하다. 빈곤 문제 해결을 위한 영역에 전체적으로 시장 논리를 결합시키는 것은 타당하다고 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보다 근로 의욕이 높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주민 사례를 살펴봐도, 게으르고 일을 하기 싫어서라기보다는 적절한 일자리를 구할 수 없거나 일할 수 없는 제약조건에 갇힌 경우가 많다. 이들이 각자 처한 상황에서 일하게 하여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국가의 임무다. ‘우선 열심히 일해라. 일하면 지원해주겠다’는 현 정부의 입장으로는 일할 기회를 찾지 못하는 우리 사회 빈곤층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빈곤 문제에 대한 사회복지의 역사를 단순화해 표현한다면 세 가지 국면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 첫째는 ‘사적 부양’의 시기로 전통적 전근대화 시기에 사적 관계망을 통해 빈곤층에 대응하던 국면이다. 두 번째는 ‘사회적 부양’으로 근대적 산업사회의 시기다. 완전고용과 경제성장을 통해 국민의 소득을 담보하고 이 과정에서 빈곤에 빠지는 실업자와 취약층에 대해서는 국가가 사회보험 등 사회보장 체계를 통해 빈곤 문제를 해결하려던 복지국가 단계다. 세 번째는 ‘탈부양’의 단계다. 노동 유연화와 비정규직의 만연, 고령사회 등의 맥락에서 더 이상 정규직 가구부양자 중심의 사회보험이 전 국민적 사회보장 체계로 활용되기 어려워진 시기다. 이 때문에 빈곤층을 ‘부양’하는 게 아니라, 이들의 다양한 사회 참여를 촉진하는 방법이 활용된다. 사회서비스 등을 확대해 사회적 배제를 막으려 한다.

우리나라에는 이미 세 번째 ‘탈부양’ 시기의 요인에 의한 빈곤이 만연하고 있다. 근로자 가운데 빈곤자, 그리고 빈곤자 가운데 근로자 비율이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가구주의 노동이 가구 전체의 빈곤을 막아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빈곤 상황은 ‘구사회위험’에 의한 빈곤과 ‘신사회위험’에 의한 빈곤 문제가 중첩돼 있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사회복지 체계는 두 번째 ‘사회적 부양’의 단계도 완결하지 못했다. 첫 번째 사적 부양 단계의 비공식적 원조나 자선적 관점도 아직 팽배해 있다. 빈곤 문제의 진전에 비해 사회복지 발전이 지체돼 있는 것이다. 자칫 우리나라의 빈곤층은 봉건적 계급사회에서와 같이 세습적 정체와 고립에서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 이들이 사회적으로 격리되지 않도록 하는 사회 통합성 유지는 심각한 과제다.

영구임대의 슬럼화는 정책 고립 탓

문제를 덮어두는 것은 아무런 진전을 가져오지 못한다. 만연한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상황을 사실 그대로 펼쳐 보이고 공론화해야 한다. 이번 의 기획은 우리 사회 영구임대아파트의 상황이 탈빈곤 과정이 아니라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절망의 과정임을 생생하게 보여주었다.

빈곤과 사회적 배제의 문제에 대응하려면 공공성 확보에 투입되는 자원의 양을 늘려야 한다. 지체된 저발달의 복지체계를 조속히 정상화해야 한다. 기본적 공공성의 확충은 전제조건이다. 특히 강조되어야 할 것은 영역별로 분리된 접근이 아니라 총체적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복합적 고립과 빈곤이 만연한 상황에서 지금의 정부 정책과 같은 파편적이고 분리된 프로그램은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영구임대주택이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주거복지 프로그램이었음에도 다른 사회보장 체계와 연결되지 못해 슬럼과 낙인의 상징이 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용어설명
사회보험제도: 국가가 법에 따라 강제성을 띠고 실시하는 보험제도를 뜻한다. 노동능력의 상실에 대비한 건강보험과 산업재해보험, 노령으로 인한 노동기회 상실에 대비한 연금보험과 고용보험으로 구분한다.
공공부조제도: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임하에 생활 유지 능력이 없거나 생활이 어려운 국민의 최저생활을 보장하고 자립을 지원하는 제도다. 사회보험이 보험료를 기본 재정으로 하는 반면 공공부조는 세금을 재원으로 한다.
사회서비스: 개인 또는 사회 전체의 복지 증진과 삶의 제고를 위해 사회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칭한다.
공공서비스: 국가나 공공 단체가 공공의 복지를 위해 제공하는 서비스. 교육, 교통, 의료, 경찰 따위를 이른다. 공공서비스는 시장재가 아닌 공공재라는 점을 통칭하고, 사회서비스는 휴먼서비스 분야의 연성서비스에 초점을 둔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사회복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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