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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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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 같은 빈곤, 구멍 뚫린 복지 우산


가난한 노인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지 못하고 아픈 사람이 건강보험 혜택 못 받는 사회…
무기력한 한국의 복지제도
등록 2010-04-14 15:57 수정 2020-05-03 04:26

“지들 먹고살기 바쁜데, 부모를 챙기겠어? 나는 기대도 안 해.” 자식들한테 용돈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황기백(73·가명)씨를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누가 봐도 가난한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 대부분은 기초생활수급권자가 아니었다. 그들의 자녀 가운데 한두 명은 돈을 번다. 다만 비정규직이다. 부모에게 경제적 도움을 주지 못한다. 따로 단칸방을 얻어 사는 경우엔 왕래조차 없다. 왜 자녀는 부모를 돌보지 않는가? 왜 국가는 이들을 돕지 않는가?

폭풍 같은 빈곤, 구멍 뚫린 복지 우산.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폭풍 같은 빈곤, 구멍 뚫린 복지 우산.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국민기초생활보장제는 한국 복지정책의 대표 격이다. 올해로 제도 도입 10년이 됐다. 사람들은 이 제도가 많은 문제를 해결한다고 지레 짐작한다. 그 혜택을 받으려면 까다로운 장벽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노인의 경우, 기초생활보장제 혜택을 받으려면 자녀가 사실상 돈을 벌지 않아야 한다. 부양의무자 가구의 최저생계비와 피부양자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더해 그 액수의 130% 이상을 부양의무자 가구가 번다면, 피부양자 가구는 기초생활급여를 받을 수 없다고 법에 정해져 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뜻일까?

자녀가 돈 버는 순간 수급권 박탈

가상의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 이렇다. 70살 할머니가 혼자 산다. 결혼한 아들은 따로 살고 있다. 아들·며느리·손자·손녀 등 4명이 한 식구다. 노인 혼자 사는 1인 가구와 아들 식구 4인 가구의 최저생계비를 더하면 월 172만8895원(2008년 기준)이다. 그 액수의 130%는 224만7563원이다. 아들이 한 달에 224만원 이상을 벌면, 혼자 사는 노모는 기초생활수급 대상자가 될 수 없다. 노모를 봉양할 만큼 아들이 충분히 벌고 있다고 한국 정부가 판단하는 것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다. 월 224만원을 버는 아들은 노모에게 적어도 월 46만원을 용돈으로 드려야 한다. 1인 최저생계비가 46만3047원(2008년 기준)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나머지 178만원으로 아내 및 두 자녀와 함께 한 달을 생활해야 한다. 만일 아내의 부모 역시 가난하다면 4인 가구의 상황은 더 악화될 것이다. 현행 제도는 노인 빈곤을 장년 빈곤으로 연결하고 있다.

아들 가족만 따로 떼어놓아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소득이 4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약 126만원) 이하로 내려가면 그 부족분만큼 정부 지원을 받을 수 있지만, 자산 평가 등을 거쳐야 하므로 수월치 않다. 전세금·차량·예금 등 ‘자산’을 갖고 있다면, 정부는 이를 소득으로 환산한다. 예컨대 6천만원짜리 전셋집에 산다면, ‘소득환산율’ 기준에 따라 월 25만원 정도의 소득이 있는 것으로 평가해 현금소득과 합산한다. 차량·예금 등도 마찬가지다. 전셋집을 월세방으로 옮기고, 생계용 차량을 처분하고, 적금을 헐어 어딘가에 탕진해야 기초생활수급권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장벽에 가로막힌 ‘사각지대의 빈곤층’이 많다. 이태수 꽃동네현도사회복지대 교수는 가구소득 통계를 바탕으로 그 수가 “200만 가구, 410만 명에 이른다”고 추산했다. 김수현 세종대 교수는 “2005년 현재 근로빈곤층 227만6천여 명 가운데 63%인 144만4천여 명이 기초생활보장 급여를 받지 못하는 것으로 추정된다”고 분석했다. 김 교수가 추정한 근로빈곤층 144만여 명에 그에 딸린 식구 수를 더하면, 이 교수의 추정치와 거의 일치한다.

어려운 과정을 통과해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우산 아래 들어오면 얼마나 받게 될까? 2008년 보건복지부 기준에 따르면, 소득이 전혀 없다고 가정할 때 4인 가족이 84만1312원의 ‘생계급여’와 21만8314원의 ‘주거급여’ 등 105만원 정도를 받는다. 조금이라도 소득이 있다면 그만큼 제하고 남는 돈을 받는다. 복지시설 등에서 생활한다면 주거급여도 삭감된다.

68살 장애 노모 봉양, 잔인한 수렁

2009년 2월 현재 약 86만3390가구, 146만830명(전체 인구의 2.9%)이 기초생활보장제 혜택을 받고 있다. ‘400만 명의 사각지대 빈곤층’에 비해 운이 좋은 경우다. 그러나 한국 사회 평균치와 비교하면 그렇게 평가할 수 없다. 2008년 한국 4인 가구의 월평균 소득은 398만원이다. 4인 가구 최저생계비 105만원은 극빈 상태를 유지하는 정도에 그칠 것이다. 남기철 동덕여대 교수는 “현재 기초생활급여는 굶어죽지 않을 정도의 생존을 유지하게 지원하는 것일 뿐”이라며 “생존 유지만으로는 빈곤에서 탈출하는 활동을 할 수 없으므로, 사회적 참여가 가능한 수준과 내용으로 소득보장을 구축하는 것이 중·장기적으로 사회적 부담을 더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영구임대아파트에서 68살 노모를 모시고 사는 김형성(38·가명)씨에 이르러 이 상황은 더 나빠진다. 노모는 지적·정신 장애 2급을 받았다. 혼자서는 아무 일도 못한다. 나라가 인정한 장애인이지만, 노모가 간병인 서비스를 받으려면 하루 3만원을 내야 한다. 주말을 빼더라도 한달이면 60만원이다. 월 150만원을 버는 김씨는 그 비용을 감당할 수가 없다. 노모를 보살피려면 회사를 그만둬야 하고, 회사를 그만두면 노모를 보살필 비용을 마련할 수 없다. 그런데도 김씨의 형이 돈을 번다는 이유로 김씨는 기초생활보장조차 받지 못한다. 뭘 어쩌란 말인가. 김씨는 잔인한 수렁에 빠져 있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보호 분야 국가 재정지출 비교/ 가계 운영비 중 사회임금 비중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사회보호 분야 국가 재정지출 비교/ 가계 운영비 중 사회임금 비중

2006년 현재, 한국인 전체 빈곤율(중위소득의 50% 이하 계층 비율)은 16.5%이다. 중위소득이란 소득수준이 전체의 한가운데 있는 가구 소득을 말한다. 2009년 기준으로 한국의 2인 이상 가구 중위소득은 월 304만원 정도다. 따라서 16.5%의 빈곤율 수치는 전체 가구의 16.5%가 150만원 미만을 번다는 이야기다. 가난한 사람이 그렇게 많다. 그런데 장애인 가구의 빈곤율은 더하다. 34.6%에 이른다. 전체 빈곤율의 2배가 넘는다.

현행 장애연금은 국민연금 가입자에 한해 지급된다. 가입 중에 발생한 질병 또는 부상으로 장애인이 된 경우에 한해 지급된다. 국민연금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즉 비정규직이었거나 아예 직업이 없었다면 장애연금을 못 받는다. 기초생활보장 수급자라면 월 2만~7만원 정도를 ‘장애수당’ 으로 받는 길이 있긴 하다. 앞에서 언급한 복잡한 심사 과정을 무사히 통과한다면 그렇다.

그런데 장애인은 비장애인에 비해 생활비가 더 필요하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2007년 조사를 보면, 지적·정신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같은 수준의 생활을 하려면 교통비·의료비·간병비 등으로 월 105만9607원이 더 든다. 이 때문에 장애인 식구가 있는 빈곤층은 더 깊은 가난을 겪는다. 누군가 돈을 벌어도 장애인 몫의 비용을 제하면 나머지 식구의 생활은 더 열악해진다. 나라로부터 장애수당을 받으려면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어야 하는데, 그러려면 가족 가운데 누구도 많은 돈을 벌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여 장애수당을 받는다 해도 기초생계급여에 월 최고 7만원의 돈을 추가로 얹어줄 뿐이다. 한국의 복지제도는 절대로 가난한 사람의 편이 아니다.

꼬박꼬박 연금이 나온다면 이런 문제가 조금 나아지지 않을까? 한국에도 국민연금제도가 있긴 하다. 기초생활보장제도와 함께 한국 정부가 마련한 또 하나의 중요한 안전망이다. 2009년 현재 경제활동인구의 93%가 국민연금 또는 공무원·군인연금 등에 가입해 있다. 얼핏 보면 모든 국민이 노후보장을 받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우선 이 제도는 1999년에야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됐다.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입해야 은퇴 이후 혜택을 받을 수 있으므로, 현재 60대 이상 노인 세대의 대부분은 국민연금 혜택자가 아니다.

한창 경제활동 중인 현재의 청장년층이라 해도 비정규직의 55%는 국민연금에 가입돼 있지 않다. 98.8%의 가입률을 보이는 정규직과 뚜렷이 비교된다. 비정규직은 ‘저임금-해고-저임금’으로 이어지는 불안정 노동을 거듭한다. 10년 이상 보험료를 납입해야 하는 국민연금제의 특성상 앞으로도 그 혜택을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막내 사위 취직에 불안한 폐암 할머니

국민연금 문제는 여성 빈곤과 직결된다. 구직 활동을 포기한 ‘비경제활동인구’는 국민연금의 혜택을 받지 못한다. 이 가운데 상당수는 여성이다. 몇 달 전 남편을 여읜 김영희(55·가명)씨에게도 국민연금은 그림의 떡이다. 그는 30대 딸이 직장에 다닌다는 이유로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되지 못했다. 남편이 장애인이어서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지만, 남편이 숨졌으니 조만간 아파트를 떠나야 할 상황이다. 장애인 남편은 제대로 일한 적이 없으므로 연금 수령 자격이 없다. 아내 김씨는 가끔 식당일을 하여 돈을 벌었으므로 역시 연금에 가입돼 있지 않다. 만일 여성 비정규직인 김씨에게도 국민연금의 혜택이 돌아온다면, 김씨네 식구의 근심도 조금 줄어들 것이다.

다만 국민연금 가입자라 해서 빈곤의 덫을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다. 보험료를 못 내는 사람이 많다. 이태수 교수는 “전체 가입자의 27%에 이르는 468만 명이 실직 등으로 인해 국민연금 보험료를 내지 못한다”고 분석했다. 이 가운데 6개월 이상 미납자는 250만 명, 25개월 이상 미납자는 100만 명이다. 다시 취업해 남은 보험료를 채우지 못한다면, 이들 역시 국민연금을 받지 못할 것이다. 남성 정규직 중심으로 설계된 국민연금 제도가 보편적 사회보험 역할을 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국민연금제 모두 가난 탈출에 별 효력이 없다면, 남는 것은 국민건강보험제도다. 한국 복지제도 가운데 그나마 조기 정착에 성공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그건 중산층에게만 진실이다. 빈곤층이 체감하는 것은 다르다.

폐암에 걸린 박금자(70·가명)씨는 한 달치 30개 알약을 먹는 데 180만원을 써야 했다. 딸들이 빚더미에 올랐다. 뒤늦게 기초생활수급권자에게 부여되는 의료 혜택을 받아 약값을 낮췄지만, 막내 사위가 취직하면서 다시 위기가 닥쳤다. 기초생활수급권을 박탈하겠다고 동사무소에서 연락이 왔다. 그렇게 되면 다시 100만원이 넘는 약값을 내야 한다. 그 이름은 ‘국민’건강보험제도지만, 적어도 박씨는 그 제도가 보호하는 국민이 아니다.

현행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치료비의 상당 부분을 환자에게 떠넘긴다. 2007년 현재,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은 64.3% 수준이다. 나머지는 당사자가 부담한다. 유럽 선진국의 보장성 수준이 85~90%인 것과 비교된다. 본인 부담금 수준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가운데 세 번째로 높다. 가난하면 중대 질환에 걸려도 치료를 받을 수 없다.

김철웅 충남대 교수가 2005년 발표한 조사 결과를 보면, 기초생활수급권자는 상위 20% 소득계층보다 식도암은 3.3배, 간암은 2.3배 더 많이 발생했다. 발병 이후 사망에 이르는 비율인 ‘치명률’에서는 하위 20% 소득계층이 상위 20% 소득계층보다 위암은 2.3배, 유방암은 2.1배 더 높게 나타났다. 같은 조사에서 월소득 100만원 이하 가구의 만성질환 유병률은 46.5%. 300만원 이상 가구의 만성질환 유병률은 19.1%였다. 가난할수록 더 많이 병에 걸리고 더 빨리 죽어버리는 것이다. 박형근 제주대 교수는 “국민건강보험의 보장성을 85% 수준까지 높인다면 암·중풍·심장병 등 중증 질환까지 무상의료를 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그날이 올 때까지 국민건강보험제도는 ‘질병·사망의 불평등’을 막지 못한다.

아무리 아파도 비바람을 막을 집이 있다면 최악은 면할 것이다.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해 퇴거명령을 받은 김종택(62·가명)씨는 최악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김씨가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4천여 세대의 20%가 임대료·관리비를 체납하고 있다. 만나는 주민마다 “제발 관리비를 낮춰 달라”고 호소했다. 공공재정 부족 등이 주된 이유겠지만,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오려고 대기중인 사람이 많은 것도 그 배경을 이룬다. 김씨가 나가도 금새 들어올 사람이 수두룩하다. 가난한 사람들이 살만한 집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2006년 발표된 서울시 뉴타운 개발계획을 보면, 2010년 말까지 주택 13만6346호가 사라지고, 6만7134호가 새로 지어진다. 단순 증감만 따져도 7만여 주택이 그냥 사라진다. 새로 지은 주택은 넓고 비싸다. 전용면적 60㎡ 이하인 주택 비율은 뉴타운 사업 전 63%에서 30%로 줄어든다. 사업 이전 83%를 차지한 전세 4천만원 미만 주택은 사업 이후 한 채도 남아 있지 않게 된다.

2005년 인구·주택 총조사에서 전체의 13%인 206만여 가구가 최저주거기준에 미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가마다 기준이 조금씩 다르지만, 미국은 1%, 영국은 2.4%, 일본은 4.4%만이 최저주거기준 미달 가구다. 가난한 이가 기댈 수 있는 것은 공공임대주택이다. 2009년 현재 한국의 공공임대주택은 전체 주택 재고 가운데 3~4% 수준이다. 영구임대주택은 2%에 불과하다. 선진국에선 공공주택 비율이 20~30%에 이른다.

서울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사회복지관 전경. 가난한 이들을 위해 공공서비스 인력을 확충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서울의 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한 사회복지관 전경. 가난한 이들을 위해 공공서비스 인력을 확충하는 일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과중채무자는 300만 명, 원인은 생활비

국가가 돌보지 않으므로 빚을 질 수밖에 없다. 남편의 사업이 망하고, 불치병에 걸린 아들을 간호하느라 1억원의 빚을 진 정영숙(53·가명)씨도 그 가운데 하나다. 정씨는 신용불량자 상태에서 다시 빚을 냈다. 갚을 길은 없다. 2005년 현재, 과중채무자는 300만 명에 이른다. 신용회복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과중채무 원인으로 생활비를 꼽은 경우가 29.3%였다. 가난한 사람은 정상적인 은행 거래를 할 수 없으므로, 필요한 돈을 카드로 돌려막거나 사채로 메운다. 이들이 스스로 구제할 유일한 방법은 법원에 파산신청을 하는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이런 제도의 존재 자체를 잘 모르지만, 알게 된다 해도 다른 문제가 있다. 2006년 한국개발연구원(KDI) 조사를 보면, 파산신청자의 70%가 변호사 등 법률서비스 기관에 신청 대행료를 냈다. 평균 비용은 150만원이었다. 가난한 사람은 갚을 길 없는 빚을 져도 파산신청할 비용이 없어 구제받지 못한다.

기초생활보장제, 국민연금제, 국민건강보험제 등을 축으로 삼는 한국의 복지제도는 가난의 현장에서 무력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우산이다. 남기철 교수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빈곤을 예방할 수 있는 더 보편적인 소득보장제도가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태수 교수도 “직업·소득·성·혼인 여부 등에 상관없이 일정 연령이 되면 일정 금액을 정부가 지급하는 ‘기초연금제’ 도입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우리에겐 낯설지만 서구 대부분의 나라가 이 제도를 택하고 있다. 기초연금제는 현행 기초생활보장제의 사각지대 대부분을 메워줄 것이다. 여기에 경제활동인구 은퇴 이후를 보장하는 현행 국민연금제를 덧붙인다면 빈곤층의 근로 의욕까지 높일 수 있다는 게 이 교수의 분석이다. 모든 사람이 기초생활을 보장받고, 일을 한 사람은 추가 급여를 받는 방식이다. 이런 일이 가능하려면 돈이 필요하다. OECD 통계를 보면 한국은 ‘사회보호’ 분야의 재정지출이 9.7%에 불과하다. 독일(46.6%), 스웨덴(42.5%), 프랑스(39.3%) 등과 비교된다. 심지어 미국(19.5%)조차 한국보다 낫다.

“기초연금 등 소득보장제 도입 시급”

나라의 예산 구조를 단박에 바꾸는 일은 상상 속에서만 가능하다. 장차 그런 일이 이뤄지면 좋겠지만,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코 앞에 닥친 하루를 살아내느라 고단하다. 당장 돈을 줄 수 없다면 마음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돈을 마련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마음은 지금 당장 꺼내어 표현하면 된다. 성인의 경우엔 복지관, 청소년의 경우엔 학교가 그런 마당이 될 수 있다. 복지관에는 사회복지사가 있고, 학교에는 교사가 있다. 가난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그들의 일상을 돌보는 것이 그들의 일이다.

한사코 방에서만 지내며 게임으로 날을 지새는 이영호(23·가명)씨에게 다정하게 말을 건네는 복지사가 있었다면, 그의 삶은 달라졌을 것이다. 121가구를 대상으로 한 이번 방문조사에서 가장 놀라운 대목이 여기에 있다. 응답자의 37.2%가 ‘어떤 복지시설도 이용하지 않는다’고 답했고, 33.9%가 ‘복지시설에 관심없다·모르겠다’고 답했다.

이들이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구역별로 사회복지관이 있다. 그러나 주민 가운데 누구도 사회복지관에 신뢰를 보내지 않았다. 복지사와 마주 앉아 상담해본 기억이 있는 주민도 거의 없었다. 복지관은 구청의 예산을 받아 주민을 상대로 각종 사회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다. 복지사들은 담당별로 주민을 상담하는 것을 주된 업무로 삼는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걸까?

바로 옆 단지의 복지관에서 일하는 김영주(가명) 사회복지사는 혼자서 1700여 가구의 모든 중·고등학생을 담당한다. 공부방을 열어 아이들을 모으고 방문상담도 한다. 그는 자기 일에 열성인 복지사다. 그러나 한계가 있다. “한 사람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다른 가족 구성원과 상의해야 하고, 피상담자의 학업·숙식·취미·진로 등을 모두 보살펴야 하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고 김 복지사는 말했다. 사회복지사의 낮은 임금도 문제다. 대부분 월 150만원 정도를 받는다. 이직이 잦다. 담당할 가구가 많으므로 보통 2년은 지나야 주민들의 특성을 파악할 수 있는데, 자꾸 복지사가 바뀐다. 실태 파악에 시간이 걸리고, 주민들은 자신의 형편을 몰라주는 복지관을 찾지 않게 된다. 더 많은 복지사를 채용해 안정적인 일자리를 제공하려면 복지관 예산이 늘어나야 한다. 복지관은 구청에서 예산을 받아 집행한다. 구청 예산은 세금에서 나온다. 마음을 주는 일이 다시 돈 문제로 돌아오는 것이다.

청소년은 이런 상담이 더욱 절실하다. 중학교를 중퇴하고 동네 아이들을 괴롭히다 끝내 경찰에 쫓기는 신세가 된 형진(16·가명)이의 진짜 문제는 ‘마음의 병’에 있다. 부모에게 학대받고 버림받은 상처가 사춘기를 사납게 할퀸 것이다. 내버려두면 학교와 사회를 등진다. 전국적으로 1년에 6만~7만 명의 초·중·고생들이 자퇴하거나 퇴학당한다. 그 대부분이 빈곤층 자녀다.

그러나 초·중등학교에 배속된 상담교사의 대부분이 계약직이어서 학생들과 지속적으로 사귀는 게 쉽지 않다. 다른 교사들은 입시 교육에 전념한다. 인문계 고등학교에선 더욱 그렇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실업계 고등학교에 간다는 것은 옛말이다. 인근 중학교에 근무하는 한승원(가명) 교사는 “요즘엔 중학교 성적이 중위권은 돼야 실업계고에 진학할 수 있고, 하위권은 대학 진학 능력이 없어도 인문계고에 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정부가 내놓는 청년실업 대책도 대부분 대졸자에 초점을 둔 ‘인턴 제도’이므로, 인문계 고등학교를 나와 대학에 들어가지 못하는 아이들은 일자리조차 구할 수 없다. 학교 밖에서 진로를 준비하는 ‘청소년 직업 자활센터’ 등이 유일한 대안인데, 이 또한 예산 문제와 부딪힌다. 수요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다.

결국 가난한 이들의 말벗이 되는 일은 공공 서비스 부문의 일자리 확충과 연결된다. 전병유 한신대 교수는 “공공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를 만들고 여기에 저임금·고용불안에 노출된 근로빈곤층을 수용하는 노동시장 구조의 개선”을 주문한다. 고용과 복지를 함께 해결하자는 것이다. 2003년 현재 OECD 국가의 사회서비스 부문 고용 비중을 보면 한국은 12.6%로 최하위 수준이다. OECD 평균은 21.7%다. 노르웨이(34.2%), 덴마크(31.3%), 핀란드(27.3%) 등과는 더 차이가 난다. 이들 나라는 공공재정을 투입해 사회서비스 부문의 일자리를 만들고 이들이 다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선순환 구조를 갖고 있다.

빈곤 대물림 끊을 ‘사람’을 투입하라

돈을 주는 게 싫으면 사람을 주면 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기만 해도 가난한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그런 배려와 지혜가 없는 나라에 태어난 죄로 한국의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다. 그들을 만나면 두 가지 질문에 봉착하게 된다. 그들의 삶에 과연 인간의 존엄이 남아 있나. 그것을 외면하고도 우리 삶은 과연 존엄한가.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

참고 문헌: (안드레 아우버한트 외·한울), (이상이·밈), (김수현 외·한울), (한국도시연구소·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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