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그리고 최후가 되어버린 서울 강북의 대규모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121가구를 심층 조사했다. 평균적으로 한 달 100만원 이하를 벌어 30만원의 임대료·관리비를 내고 세 식구가 근근이 살아가는 곳이다. 배우자는 병에 걸려 일찍 세상을 떠나고, 자식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죽고, 살아남은 식구들은 장애가 있거나 암에 걸렸다. 무허가 판잣집, 비닐하우스촌, 철거촌, 쪽방 등을 거쳐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지만, 가난을 벗어날 기미는 좀체 보이지 않는다. 폐암에 걸린 박금자(가명)씨는 점심 때마다 무료급식을 찾아 줄을 선다. 관리비를 내지 못해 퇴거 명령을 받은 김종택(가명)씨는 얼마 전 자살을 시도했다. 정영숙(가명)씨는 아들의 병 치료 때문에 신용불량자가 됐다. 그런 사연을 지닌 4천여 세대 1만여 명이 희뿌옇게 모여 하루하루를 산다. 글 싣는 순서
1회: 영구 빈곤의 둥지
2회: 무기력의 대물림
3회: 격리당한 아이들의 미래
이영호(23·가명)씨가 이불을 뒤집어쓴다. 3평짜리 방의 절반은 책상과 컴퓨터가 차지한다. 나머지 절반의 자리엔 빨지 않아 후줄근한 이불이 깔려 있다. 이씨가 사는 세상이다. 아파트 복도로 향한 창에서 햇볕이 스며든다. 이씨는 한사코 누워 잠만 잔다.
“불 켜지 마.” 아버지가 말했었다. 그때 어린 이씨는 잠을 잘 수 없었다. 방구석에 무릎을 쪼그리고 앉았다. 서울 구로구 구로동 반지하방이었다. 그전엔 보광동 판자촌에서 살았다고 어머니가 말해줬다. 그래도 이씨의 기억 속에는 어둠에 잠긴 반지하방이 첫 번째 집이다.
아버지는 택시 운전을 했다. 음주 운전을 하다가 회사에서 쫓겨났다. 그 뒤로 노름을 시작했다. 아버지는 밤을 새우고 아침에 집으로 들어왔다. “불 꺼.” 아버지가 말했다. 반지하방의 형광등 불을 끄면 대낮에도 캄캄했다. 어린 이씨는 캄캄한 방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나가 놀려 해도 아버지가 말렸다. “밖에 나가지 마.”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거역할 수도 없었다. 어린 이씨는 아버지가 무서웠다. 아버지가 잠을 자는 ‘캄캄한 낮’이 무서웠다.
1. 어둠 속으로 파고드는 삶이씨의 집은 이제 반지하방이 아니다. 그는 방 2칸짜리 13평 영구임대아파트에서 40대 후반의 어머니,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과 함께 산다. 어머니를 일삼아 때렸던 아버지는 이제 없다. 멀리 떠나버렸다. 그래도 이씨의 주변은 캄캄하다. 방문을 걸어잠그고 산다. 밤새워 컴퓨터 게임을 한다. 오후 2시에 일어난다. PC방에 간다. 그곳은 대낮에도 어둡다.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온다. 방에서 혼자 술을 마신다.
술을 그만 마시라는 어머니의 잔소리가 귀찮아, 방문 창틀에 맥주와 소주를 올려놓았다. 허름한 냉장고를 뒤지는 일이 사라졌다. 귀찮은 어머니를 마주칠 일도 사라졌다. “울지 마.” 아주 오래전, 어머니가 말했다. 아버지한테 매를 맞은 어머니는 속옷 바람으로 집을 뛰쳐나갔다. 그날 새벽엔 비가 많이 왔다. 한참 있다 어머니가 돌아왔다. “너 때문에 돌아왔다”며 어머니는 울었다. 어린 이씨도 울었다. 이제 이씨는 울지 않는다. 웃지도 않는다.
이씨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을 열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부터 말이 없었다. 남 앞에 나서는 일이 없었다. 발표도 하지 않았고, 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3번 마을버스를 타고 수유역 근처에 있는 공업고등학교를 다녔다. 3번 마을버스 운전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정거장을 곧잘 지나쳤다. “여기서 내려주세요.”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이씨는 한 번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멀리 돌아 내린 뒤 다시 걸어왔다. 어머니가 다그쳤다. “사람들이 다 쳐다보는데 어떻게 내려달라고 말해.” 이씨는 도리어 어머니한테 화를 냈다. 3번 마을버스를 타는 일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씨는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뒀다.
최초의, 그리고 최후가 되어버린 이씨의 직업은 PC방 아르바이트였다. “나 없을 때 가게 좀 봐라.” 매일 나가던 PC방 사장이 말했다. 그러나 사장은 이씨를 정식으로 고용하진 않았다. 한 달에 몇만원씩 용돈만 줬다. “나 같은 사람을 누가 받아주겠어.” 어디건 이력서라도 내보라는 어머니한테 이씨는 화를 냈다. 말이 없는 이씨는 화를 낼 때 무섭다. 중학교 동창과 잠시 사귀었는데, 오래지 않아 헤어졌다. 그 뒤 이씨는 칼로 자신의 팔과 다리를 그었다. 수십 곳의 상처에서 피가 났다. 어머니는 아들을 둘러업고 병원으로 뛰었다. 퇴원한 이씨는 15층 집에서 뛰어내리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군대에 갔다. 거기서 또 사고를 낼까봐 어머니는 걱정이 많았다. 그래도 무사히 제대했다. 다행이었다.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제대한 뒤부터 1년이 넘도록 이씨는 계속 방에서만 살았다. 어둡고 캄캄한 곳만 찾아다녔다. 여전히 말을 하지 않았다.
4천여 세대, 1만여 명이 모여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방에만 웅크린 젊은 사람들이 많다. 평생 공사판에서 철근 구부리는 일을 했던 김형성(69·가명)씨의 아들은 낮에는 자고 밤에는 나간다. 밤마다 어디를 가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아들이 자고 있으니, 옆집으로 갑시다.” 잔뜩 찌푸린 2월의 어느 날, 김씨는 인터뷰하자는 기자를 옆집으로 이끌었다.
35살의 아들은 직업이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자고 있는 아들에게 방해가 될까봐 60대 아버지는 이웃 친구 집에서 기자와 이야기했다. “아드님을 만날 수 있을까요?” 기자의 물음에 김씨는 손을 내저었다. “고등학교에서 퇴학당한 뒤론 성격이 이상하게 변해서 말이야.”
평생 석공일을 했던 최성원(70·가명)씨 집에도 하루 종일 집에서 지내는 30대 중반의 아들이 있다. “껄렁껄렁한 놈들하고 어울려 당구나 치고, 술에 취해서 비척거리는 사람 있으면 달려들어 지갑을 뺏고, 그 돈으로 여관 가서 자고…. 그러니 강도에 폭력으로 6번이나 구속영장이 떨어졌다고.” 최씨는 얼굴을 쓸며 고등학교를 중퇴한 아들에 대해 말했다. “그놈이 내 신세를 망쳤어.”
자식 때문에 곤혹스런 사람은 김씨와 최씨 말고도 많았다. “우리 아이가 자고 있어요. 집에 사람을 들일 수 없네.” “지금 자는 사람이 집에 있어서…. 나중에 오세요.” 기자의 면담 요청을 거절한 영구임대아파트 사람들은 방에서 자고 있는 누군가를 이유로 들었다. 문을 열어주는 것은 언제나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였다. 노부모는 낮잠을 자는 자식을 어려워했다. 그들을 세상에 내보이는 일을 꺼렸다.
2. 배반당한 미래자식은 미래다. 평생 가난했지만, 내 아들딸은 다를 것이라는 믿음이 가난을 이겨내게 만든다. 그러나 그 믿음이 배반당한다면? 면담 조사한 121가구 가운데 노부모와 성인 자녀가 함께 사는 65가구가 있다. 이들은 독거 노인과 노인 부부만 사는 41가구보다 미래를 더 비관했다(나머지는 한부모 가구 또는 65살 미만의 성인 부부 가구 등이다).
세상에 대해 분노를 느끼는가?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23.1%가 ‘그렇다’고 답했다. ‘노인 가구’ 가운데는 14.6%만 ‘그렇다’고 답했다. 노력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는가? ‘노인+성인 자녀 가구’의 58.5%가 ‘그렇다’고 답했다. 같은 응답을 한 ‘노인 가구’는 48.8%였다(그래프 참조). 성인 자녀와 노부모가 함께 사는 집을 지배하는 것은 무능력이 아니라 무기력이었다. 그들의 무기력에는 역사가 있다.
“엄마가 싫어. 엄마랑 이혼해.” 박선영(20·가명)씨가 아빠한테 말했다. 박씨가 5살 때였다. 엄마는 자주 가출했다. 엄마는 재혼해 아빠를 만났다. 전남편의 폭력을 피해 집을 나왔다가 아빠를 만났다고 했다. 그러나 엄마는 재혼에도 적응하지 못했다. 딸 둘을 낳았지만 자꾸 집을 나갔다. 아빠는 결국 이혼했다. 딸 둘을 혼자 키웠다.
아빠는 스웨터를 짜는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했다. 지하방에서 박씨가 여동생을 데리고 지냈다. 10대의 박씨는 속옷을 빨지 않았다. 장롱의 이불 틈에 끼워두었다. 생리혈이 묻은 속옷은 장롱에서 썩어갔다. 여동생은 고등학생이 되도록 이불에 오줌을 쌌다. 그 이불도 그냥 장롱에 처박아두었다. 아무도 자매에게 씻고 갈아입는 것을 가르쳐주지 않았다.
장롱에 처박아둬 썩어버린 속옷고등학교를 졸업한 박씨는 카드회사 대리점에 취직했다. 아침 9시까지 출근해야 하는데, 10시까지 잠을 잤다. 회사에 나갈 때도 씻지 않았다. 귀찮았다. 한 달 만에 해고됐다. 얼마 전 대형 할인마트에 다시 취직했다. 역시 매일 지각을 하다가 일주일 만에 해고됐다.
박씨는 요즘도 하루 종일 잠만 잔다. 아빠는 가끔 박씨를 때린다. 엎드려뻗쳐를 시키고 혁대를 풀어 등이며 다리를 때린다. 옷걸이로 때릴 때도 있다. 줄넘기 줄로 때리기도 한다. 박씨는 그런 일이 생기면 집을 나가버린다. “지난 5년 동안 가출을 수십 번은 했을 것”이라고 박씨는 말한다. 한번은 아빠에게 맞고 집을 뛰쳐나가 아동보호센터에서 지내기도 했다. 언젠가부터 고등학교에 다니는 여동생도 덩달아 가출을 시작했다.
20대의 이영호·박선영씨에겐 공통점이 있다. 잠만 잔다. 특별히 하고 싶은 일이 없다. 뭘 해야겠다고 결심하게 만드는 ‘본보기’가 가족 가운데 아무도 없다. 그런 역할 모델은 이웃집에도 없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를 통틀어 별로 없다. 그들의 부모는 돈 버느라 바빴다. 하루라도 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었다. 가끔 자식을 마주칠 때면 때리거나 윽박질렀다.
아이들은 그런 부모를 탓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집집마다 그런 일이 다반사다. 그런 이웃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이제 돈 버는 일조차 심드렁하다. 늙은 부모는 일을 할 수 없는 무능력자가 되고, 젊은 자식은 일을 하기 싫은 무기력자가 된다. 희망이 없는 것이 아니라, 희망 자체를 꿈꿔본 적이 없다. 이것은 무능한 부모 탓일까, 무력한 자식 탓일까.
3. 착하고 성실한 가난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모든 젊은이가 똑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성실하게 살아온 경우가 없진 않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가난에서 벗어나려면 또 다른 추진 로켓이 필요하다.
저녁 6시30분이 되면, 김성철(38·가명)씨가 일터에서 집으로 돌아온다. 68살의 어머니가 혼자 저녁을 먹고 있다. 개다리소반에는 현미가 들어간 밥, 통조림에 담긴 햄, 그리고 작은 간장 종지가 놓여있다. “그렇게 짜게 드시면 안 되는데.” 아들이 말해도 소용이 없다. 냉장고에는 동그랑땡, 참치 그리고 햄이 담긴 통조림만 가득하다. 열무김치도 있지만, 어머니는 거들떠보지 않는다. 당장 입맛에 맞는 것만 골라 먹는다.
당뇨와 고혈압이 있는 어머니는 최근 석 달 동안 3번이나 쓰러져 병원 응급실에 실려갔다. 음식 조절을 해야 하지만, 하루 종일 혼자 지내는 어머니는 스스로 그 일을 못한다. 어머니의 ‘복지카드’에는 ‘지적·정신장애 2급’이라고 적혀 있다. 어머니는 눈동자를 불안하게 굴리며 이빨 없는 잇몸으로 기름기 많은 햄을 씹고, 다시 간장을 쳐서 밥을 먹는다.
3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는 권투선수 출신이었다. 그리 유명하지는 않았다. 해수욕장에서 탈의실을 운영해 돈을 벌었다. 그나마 벌이가 괜찮았지만,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하면서 가세가 기울었다. 서울 청량리 근처 쪽방에서 살았다. 그 뒤로 아버지는 학교 앞에서 문방구를 했다. 문방구가 망하자, 학교 입학식·졸업식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노년에는 언어장애가 왔다. 언어장애가 오기 전, 아버지는 아들 김씨에게 말했다. “기술을 배워.” 배운 기술이 없어 평생 가난했다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김씨는 아버지의 말을 따랐다. 기술을 배웠다. 공고를 다니며 전기·전자 기술 자격증을 땄다. 공부만 한 것은 아니었다. 닥치는 대로 일했다. 신문도 배달하고 자장면도 배달했다. 채소 가게 점원으로도 일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임대료·관리비를 김씨가 벌어서 냈다. 고등학교 졸업 뒤엔 전문대도 들어갔다. 지금까지 10곳 이상의 직장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고쳤고, 대형 식당 주방기기도 고쳤다. 김씨보다 더 열심히 살아온 이가 또래 중엔 드물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빚만 500만원 있다.
500만원의 빚은 어머니와 관련이 깊다. 어머니에게는 보살펴줄 사람이 필요하다. 복지기관에서 알려준 ‘간호 서비스’를 받으려면 하루에 3만원을 내야 한다. 정신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려면 한 달에 160만원을 내야 한다. 가난한 장애인이라고 나라가 우대해주는 게 그 수준이다.
2년 전에는 동사무소에서 실태조사를 다녀갔다. 대책을 마련해줄까 싶었는데, 오히려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박탈해버렸다. 결혼해 따로 사는 형이 돈을 번다는 이유였다. 결혼해 서울 창동에 전셋집을 얻은 형은 제 앞가림에 바쁘다. 어머니 간병 문제로 형제끼리 크게 다툰 뒤로는 내왕도 없다. 형이 돈을 얼마나 버는지 김씨는 알지 못한다. 얼마를 벌건 어머니와 자신에게는 조금의 도움도 되지 못한다는 것만 잘 알고 있다. 동사무소는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않았다.
“20년간 납부한 관리비만 모았어도…”동사무소가 도움을 준 일이 하나 있었다. “주소지를 옮기지 마세요.” 동사무소 직원이 딱하다는 표정으로 말해주었다. 김씨가 어머니와 같이 지내면, 어머니 앞으로 나오는 혜택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귀띔해주었다. 유일한 간병인이자 보호자인 김씨는 ‘서류상으로는’ 어머니와 따로 살고 있다.
이걸 복지제도라 부를 수 있다면, 김씨가 이용할 수 있는 한국의 복지제도는 아무것도 없다. 김씨는 구청에서 받아온 ‘장애인 복지 서비스’ 리스트를 보여줬다. 그 가운데는 장애인 운전차량에 한해 저렴한 가스충전식으로 개조할 수 있다는 내용도 있었다. “웃기는 일이에요. 우리야 면허가 없으니 차를 살 수도 없지만, 막상 사게 되면 승용차 굴릴 정도로 여유가 있다는 이유로 다른 혜택을 끊어버리니까요.”
나라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던 김씨는 혼자 살아나갈 방법을 궁리했다. 출근한다 해도 어머니 때문에 곧잘 집으로 뛰어들어 와야 했으므로, 어머니 곁에서 돈을 벌 수 있는 길을 찾았다. 주식 투자였다. “위험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김씨가 말했다. 어머니와 함께 지내려는 뜻은 이뤘지만, 돈을 벌지는 못했다. 그대로 손해가 됐고 빚으로 남았다.
30대 후반의 김씨로선 새 일자리를 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지난 6개월 동안 일정한 수입이 없었다. 이런저런 영업직을 전전하면서 월 30만원 정도를 벌었다. 한 달 전, 120만원을 준다는 텔레마케터 자리를 구했다. 출근한 내내 어머니 걱정에 불안하다. “요즘은 지난 20년 동안 꼬박꼬박 냈던 관리비가 생각나요.” 십자가 외에는 아무 장식이 없는 13평 방에 앉아 김씨가 말했다.
닥치는 대로 일하면서 매달 어김없이 납부했던 20만원을 20년 동안 모두 모았다면, 지금쯤 전셋집이라도 구할 수 있지 않았을까. 간병인을 구해 어머니 곁에 둘 수 있지 않았을까. 안정적인 일자리를 구한 뒤, 착하고 성실한 여자를 만나 결혼할 수 있지 않았을까. 김씨는 자꾸 의문이 든다. “그래도 그건 허무한 생각이고, 임대아파트에라도 들어와 있으니 감사한 일이겠지요?” 십자가의 예수님이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4. 따라 배울 수 없는 모범결혼해 두 사람이 같이 벌면 어떨까. 신미숙(33·가명)씨는 4년 전 결혼했다. 경기 안산 공단의 휴대전화 제조공장에서 일하다가 같은 공장의 운전기사를 만났다. 알고 보니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의 바로 옆 동에 살고 있었다. 신랑과 신부의 부모들은 단지 옆 작은 식당에서 만나 상견례를 했다. 신혼부부는 빚을 얻어 경기 부평에 작은 전세방을 구했다.
결혼한 뒤에도 신씨 부부는 계속 일했다. 함께 벌어야 월 200만원의 수입을 얻는다. 얼마 전 신씨는 유산을 했다. 휴대전화 만드는 일을 10년 넘게 한 것이 유산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만 한다. 그게 사실이라 한들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 신씨 부부는 영구임대아파트에 사는 양가 부모에게 단 한 푼의 용돈도 드리지 못한다. 결혼해 함께 벌어도 어느 한 집의 사정이나마 나아진 것이 없다. 신씨 부부에게 결혼은 빈곤의 해결책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난한 식구의 무리가 하나 더 늘어났다.
그런 점에서 서유영(39·가명)씨는 드문 예외다. 그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탈출했다. 서씨는 남편과 함께 맞벌이를 하며 월 300만원을 번다. 지금은 서울 수유리에 있는 아파트에 산다. 그가 ‘성공한’ 비결은 무엇일까? 혹시 그의 삶에서 영구임대아파트의 젊은이들이 배울 수 있는 것은 없을까?
서씨는 어린 시절에 살았던 서울 도봉동 판자촌을 기억한다. 낮은 지붕, 얇은 벽, 공동 화장실, 공동 우물이 있는 동네였다. 어린 서씨는 매일 아침 공동 우물에서 물을 길었다. 술 마시고 어머니를 때리던 아버지는 1985년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3년 동안 백혈병을 앓던 언니도 이듬해 죽었다. 어머니는 식당일과 빌딩 청소일을 번갈아 하며 살아남은 식구들의 생계를 이었다.
상고를 졸업한 서씨는 10곳의 회사에서 면접을 봤다. 모두 떨어졌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취업했다. 한참 뒤에야 제조업체 대리점의 경리로 뽑혔다. 그곳에서 비밀을 알았다. “편모 슬하에서 가난하게 자란 사람을 경리직으로 뽑으려는 회사가 어디 있겠어. 우리도 망설였지.” 인사 담당자가 말했다. 그 무렵 판자촌에서 쫓겨난 식구들이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다. 화장실에선 물이 콸콸 나왔다. 회사에 다니면서 서씨는 공부를 했다. 2년제 야간대학에 진학했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학교에 다녔다.
빈민 봉사 동아리에도 들어갔다. 그곳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는 4년제 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서씨는 대학을 졸업하고 동네 학원 강사로 일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었다. 3년 전 사이버대학에 입학해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땄다. 현재 그는 강북 지역의 청소년자활복지관에서 일하고 있다. 남편도 다른 지역의 복지기관에서 일한다. 평생 고생한 어머니는 여전히 영구임대아파트에 산다. 빌딩 청소일도 계속 하고 있다. 그래도 같은 단지의 다른 집보단 유복하다. 자리를 잡은 서씨 부부가 있고, 건강하게 자라나는 서씨의 초등학생 아들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집엔 그나마 다른 ‘불행’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만큼 산다고 했다.
“꿈을 갖게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가난하고 무기력한 사람들만 보고 자랐으니…. 하다못해 영화라도 보여줘요. 그래야 간접적으로라도 다른 삶을 보고 꿈을 가질 테니.” 가난한 아이들을 돕는 서씨가 말했다. 그의 생각은 별로 틀리지 않다. 서씨 스스로 그 길을 따라 가난을 이겨내고 두 발로 섰다.
꿋꿋이 살아내라고 격려만 할 텐가따라서 어두운 곳만 찾는 이영호씨, 잠만 자는 박선영씨, 착실히 일해도 근심만 늘어가는 김성철씨는 이제 서씨를 좇아 살면 된다. 세상이 차별해도 버텨야 한다. 폭력적인 부모를 만났어도 인내해야 한다. 일찍 삶을 마치는 가족이 있어도 꿋꿋하게 이겨내야 한다. 가난한 부모가 배움의 기회를 주지 못해도 스스로 벌어 학교를 마쳐야 한다.
매일처럼 마주치는 무력한 사람들 말고, 영화건 소설이건 따라 배울 만한 모범을 찾아 자신의 꿈을 키워야 한다. 눈높이를 낮춰 취업해야 하고, 배우자를 만나면 함께 벌어야 한다. 꼭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나라가 베푸는 복지제도에 기대지 말고, 혼자 힘으로 이 과정을 모두 통과해야 한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적어도 빈민의 낙인을 벗고 서민의 얼굴로 세상의 밝은 햇볕 아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술병이 나뒹구는 좁은 방에서 꾀죄죄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23살의 이영호씨를 직접 만난다면, 당신에겐 이런 의문도 들 것이다. 꿋꿋이 살아내라고 격려하는 것조차 이들에겐 너무 가혹한 주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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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조사 자문: 남기철 동덕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조사 보조: 강보라·김민지·김옥진·김하나·김혜영·류다솜·민들레·백가희·윤현주·이수연·황단비(이상 동덕여대), 권혜미·김솔·박금지·이하늬·전수정(이상 중앙대), 손희경(건국대) 학생, 이선주 프리랜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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