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떴다. 천장이 흐릿하다. 눈을 뜨나 감으나 비슷하다. 박금자(70·가명)씨의 눈앞에서 세상은 항상 희뿌옇다. 박씨는 시력이 희미하게 남은 왼쪽 눈으로 현관에 이르는 길을 본다. 어둡고 좁고 짧다. 누운 자리에서 열 걸음이다. 방과 현관문은 거리랄 게 없이 바싹 붙어 있다.
44.15㎡, 13평형의 직사각형 집에서도 시간은 흐른다. “벌써 밥때구먼.” 혼잣말을 한다. 오전 11시30분이다. 시각장애 4급의 눈으로 더듬더듬 점퍼를 찾아 입는다. “밥 먹고 올게요. 배고프면 밥 먹어요.” 이번엔 혼잣말이 아니다. 방 왼쪽 구석에 낡은 가구처럼 앉아 있는 동갑내기 남편은 아무 표정이 없다.
박씨는 노인정에서 주는 무료급식을 먹으러 가는 길이다. 부부가 함께 가면 좋을 것이다. 한 집에서 2명이나 급식을 찾아 먹는다고 동네 사람들이 이죽거리지 않는다면 그렇게 할 것이다. 허리와 다리가 아파 거동이 불편한 남편은 시비 당할 일 없이 집에서 혼자 밥을 먹는다. 그 상에 박씨의 밥그릇은 올라가지 않는다. 입 하나라도 줄여야 쌀을 아낀다.
귀퉁이가 녹이 슨 현관문이 삐거덕 열린다. 20년 된 문은 남편의 무릎처럼 뻑뻑하다. 매번 아픈 소리를 낸다. 문 앞에 달려 있어야 할 초인종 단추는 자취가 없다. 떨어져나간 지 5년 됐다.
1. 어둡고 좁고 흐릿한 인생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 작은 활기가 돈다. 묘한 긴장도 흐른다. 박씨를 비롯한 4천여 세대의 영구임대아파트 주민들은 이 시간에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줄을 서야 한다. 단지 안에 있는 사회복지관은 월~토요일 낮 12시에 무료급식을 준다. 고마운 일이다. 고맙지 않은 일도 있다. 점심 무료급식의 정원은 200명뿐이다.
사전에 사회복지관에 등록해 허가를 받은 사람만 무료급식을 먹는다. 그러나 오며 가며 들르는 주민들이 언제나 있다. 밥은 그들에게도 제공된다. 늦게 오면 무료급식을 놓친다. 오전 11시부터 노인정 앞에는 사람의 무리가 줄을 이룬다. 박씨는 매일 그 대열에 동참한다. 언제까지 줄을 설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박씨는 폐암에 걸렸다.
일흔 평생 동안 내내 아팠다. 5살 때 홍역을 앓았다. 병원에 가지 못했다. 충남 천안에서 농사짓던 부모는 남의 땅에서 쟁기질을 했다. 초가집 방 한 칸에 다섯 식구가 살았다. 둘째딸은 단칸방 구석에서 끙끙 앓다가 두 눈의 시력까지 잃었다.
가난한 농사꾼 남편을 만나 첫딸을 낳을 때도 아팠다. 산후조리를 잘못해 젖유종을 심하게 앓았다. 가슴에 딱딱한 덩어리 7개가 잡혔다. 매일 밤 그곳이 쑤시고 아팠다. “저승길 가는 고통이었다”고 박씨는 회고한다. 1972년 서울에 올라와 왕십리 철거촌에 살면서 딸 셋을 더 낳았다. 그때마다 저승길 가는 고통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병원은 한 번도 가지 못했다.
철거촌, 천막집, 판자촌, 단칸방…10년 동안 15번 이사한 뒤, 마지막 이사를 20년 전에 했다. 철거촌에서 쫓겨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 들어왔다. 그때부턴 가슴앓이를 했다. 4명의 딸은 모두 고등학교만 마쳤다.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계를 도왔다. 하나같이 결혼을 일찍 했지만, 첫째·둘째 딸은 곧 이혼해버렸다. 셋째사위는 직업이 없고, 넷째사위는 몇천만원의 빚을 졌다. 배 아파 낳은 딸 걱정에 어머니는 가슴이 아팠다. 그러다 정말 가슴에 암이 생겼다. 2006년 폐암 3기 진단을 받았다.
“지지리 못사는 부모 밑에 태어나서, 못사는 남자와 결혼해 죽도록 고생하고, 자식들한테도 고생만 시키다가, 결국은 몹쓸 병에 걸려 죽어간다”고 박씨는 말했다. 그 말을 하면서 손으로 눈가를 훔쳤다. 그 손으로 뺨도 올려붙였다. 얼마 전, 아파트 부녀회에서 각층 12세대 가운데 두 집씩 김치를 무료로 나눠줬다. 박씨는 무료 김치를 받지 못했다. 부녀회장을 찾아가 뺨을 때렸다. 김치를 얻었다. 매일 김치찌개를 끓여 아무 일 안 하는 남편에게 차려준다. 그리고 자신은 무료급식을 찾아 노인정에 간다. 어쨌거나 입으로 들어가는 밥과 반찬은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득바득 살았다. 그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것은 쓸쓸한 사연이 아니다. 4천여 가구에 줄잡아 1만여 명의 빈자가 모여 사는 이곳에서 그것은 너무 흔한 인생이다. 정순자(71·가명)씨의 어머니는 기차간에서 떡을 팔았다. 서울에 올라와 신설동 천막집에 살았다. 김형성(69·가명)씨는 한강 둑방 판자촌에 월세를 주고 살았다. 평생 공사장에서 일했다. 황기백(73·가명)씨는 구두닦이를 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30년 동안 서울 용두동에서 보증금 50만원에 월 10만원짜리 단칸방에서 살았다.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는 그런 사연 1만여 개가 희뿌옇게 모여 있다.
2. 빈곤 이주의 궤적가난의 사연에는 언제나 ‘나쁜 집’이 등장한다. 이희숙(65·가명)씨는 ‘나쁜 집’들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나려 한다. 1975년 겨울, 이씨 부부는 돌도 지나지 않은 갓난 아들을 품에 안았다. 꼭 안고 길거리로 쫓겨났다. 전 재산 12만원을 주고 방을 얻은 서울 옥수동 다세대주택에 철거반이 들이닥쳤다.
“우리도 보상금을 15만원밖에 못 받았어.” 집주인이 말했다. 이씨 부부를 포함해 여섯 가구가 다세대주택에 세들어 살았다. 그들 모두 쫓겨났다. 집주인은 이주비라며 2만원을 건넸다. 보증금 12만원은 돌려주지 않았다. 나쁜 집주인이었다. 이씨 부부의 생각은 거기서 그쳤다. 재개발을 강행한 관청이 더 나쁘다는 생각을 그때는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전 재산을 잃은 부부는 이씨의 여동생 집으로 갔다. 여동생은 단칸방에 혼자 살았다. 그 방에서 부부와 세 아들, 그리고 여동생까지 6명이 함께 잤다. 5년이 흘렀다. 빚을 내서 방 하나가 딸린 작은 구멍가게를 얻었다. 비닐하우스촌에 몇 년만 살면 아파트를 얻을 수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1987년, 400만원을 주고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의 집 한 채를 샀다. 100원짜리를 팔아 10원씩 남기며 구멍가게에서 번 돈이었다.
비닐하우스 안에서 식물은 푸르게 자란다. 사람은 그러지 못한다. 사람을 위한 것이 비닐하우스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비가 오면 그대로 집 바닥에 떨어졌다. 용변은 더러운 공동 화장실에서 해결했다. 몸을 씻으려면 공동 수도에서 물을 길어와야 했다. 아이들을 키울 수 없었다. 우는 아이들의 등을 떠밀어 할머니 집에 보냈다. 이를 악물고 부부만 2년을 살았다. 사람처럼 살지 않은 덕분에 영구임대아파트 단지 입주 자격을 얻었다. 20년 전의 일이다.
여기 살면 부자가 될 수 없다“그때 입주하지 말아야 했어.” 이씨는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여기 들어온 것부터가 인생 실패야.” 서울 강북의 영구임대아파트 단지는 ‘나쁜 집’의 종결이 아니었다. 조금 더 돈을 모아 작은 집을 샀다면 평생 가난하진 않았을 것이라고 이씨는 생각한다. 작은 집을 사서 팔고 다른 집을 또 사서 팔고 그러다 버젓한 내 집을 마련하는 인생을 이씨는 머릿속으로만 상상한다. 부자들은 그렇게 부자가 되었다.
영구임대아파트에 살면 부자가 될 수 없다. 돈을 벌면 입주 자격을 잃어 단지를 떠나야 한다. 어지간한 돈으로는 전셋집도 구할 수 없다. 결국 적게 벌면서 이곳에서 근근이 사는 일에 적응해버린다. 이씨는 영구임대아파트에 발목을 잡혔다고 생각한다. ‘나쁜 집’은 철거촌에서 단칸방으로, 비닐하우스촌에서 영구임대로 변주됐을 뿐이다. 그러나 ‘나쁜 집’의 연쇄고리 가운데 최악은 따로 있다.
김종택(62·가명)씨는 13평 방에 혼자 산다. 낡은 장롱 하나, 작은 텔레비전 하나가 있다. 가구의 전부다. 방에는 하루 종일 요가 깔려 있다. 세제가 없어 빨래를 못한 게 한 달이 넘었다. 더러운 요에 남은 검은 핏자국도 지우지 못했다. 한 달 전, 김씨는 부엌칼로 손목을 그었다. 늙은 손에서 흘러나온 피가 요를 적셨다. 이웃집 할아버지가 김씨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다. 무서운 결심은 물거품이 돼버렸다. 다시 요를 깔고 하루 종일 넋 나간 듯 앉았지만, 이제 뭘 더 할 수 있을지 김씨는 알지 못한다.
지난 1월29일, 서울북부지방법원은 김씨에게 ‘퇴거 판결’을 내렸다. 김씨는 1년 넘게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지 못했다. 단지를 관리하는 한국토지주택공사가 김씨를 상대로 퇴거 소송을 제기했고, 법원이 이를 받아들였다. 처음 입주할 때 쓰는 계약서에는 ‘3개월 이상 임대료를 내지 못할 경우’ 퇴거 조처를 당할 수 있다고 돼 있다. 김씨가 규칙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규칙을 지키는 방법을 모른다. 2009년 10월을 기준으로 김씨가 사는 영구임대아파트 단지에서 임대료·관리비를 체납한 가구는 모두 773세대다. 4천여 세대의 20%다.
3개월 임대료 밀리면 퇴거 조처임대료와 관리비를 더해 매달 20만~30만원의 고지서가 날아든다. 4천여 세대의 20%는 그 고지서를 받아들고 죽어버릴까 말까 고민한다. 20만원을 마련할 길이 없다. 가구마다 관리비 내역은 비슷하다. 김씨와 같은 동에 사는 황기백(가명)씨는 얼마 전 30만2290원의 2월분 고지서를 받았다. 임대료가 10만9230원, 경비·청소·수선유지 비용을 더한 관리비가 2만8450원, 전기료·난방비 등을 합친 공과금이 16만4610원이다. 황씨는 자활근로를 해서 한 달에 20만원쯤 번다. 아내가 빌딩 청소를 하여 100만원을 받는다. 월수입 120만원 가운데 4분의 1을 임대료·관리비·공과금으로 냈다.
4천여 세대의 20% 가운데 하나인 김씨에겐 그런 방책이 없다. 하는 일이 없다. 노인정이 제공하는 무료 점심 급식 외에는 하루 종일 굶는다. 소싯적의 그는 서울 뚝섬 유원지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았다. 동네 미용실에서 머리카락을 얻어 가발 공장에 팔기도 했다. 그러나 스무 살이 되면서 엇나갔다. 고향 친구들을 모아 ‘조직’을 만들었다. 팔뚝에 비둘기 문신도 새겼다. “평화롭게 살자”는 뜻이었다고 한다.
문신을 새긴 팔뚝으로 강북 지역의 룸살롱·다방 등에서 돈을 뜯었다. 룸살롱 여급을 아내로 맞았다. 아내는 아이를 낳고 도망갔다. 이후 김씨는 경마에 빠졌다. 2002년에는 술을 잔뜩 먹고 사고를 당해 한쪽 머리가 움푹 파였다. 2004년에는 동네에서 사람을 찔러 2년6개월간 복역했다. 아들은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아버지를 떠났다.
그는 ‘평화롭게’ 살지 않았다. 죄도 저질렀다. 젊음을 낭비했다. 그러나 이제 그는 범죄자가 아니라 ‘무능력자’다. 거리로 내몰면 그는 또 다른 결심을 할 것이다. 가난하고 불우한 이들이 범죄자가 되는가? 그것이 사실이라면 영구임대아파트에서조차 쫓겨난 사람들은 범죄의 유혹과 쉽게 손을 잡을 것이다. 4천여 세대의 20%는 월 30만원을 구하지 못해 가난하고 불우하다.
퇴거 명령서 그리고 아들의 자살일찌감치 집을 나간 김씨의 아들은 가난이 싫어 먼저 세상을 떴다. 법원의 퇴거 명령서가 날아들던 지난 1월 말, 23살 아들이 목을 매 자살했다. 아들은 지방도시의 술집에서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었다. 빈궁한 티를 내기 싫었는지 거리에 나서면 부잣집 아들 행세를 했다. 여자를 만났다. 여자는 외제차를 선물해달라고 졸랐다. 해결할 방법이 없는데, 술집에서도 해고됐다. 뭘 더 할 수 있을지 알지 못했던 아들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김씨는 죽은 아들의 옷을 입고 곧 쫓겨날 방에서 우두커니 앉아만 있다. 저승사자조차 부자와 빈자를 차별한다.
4. 평생의 반려자, 장애와 질병이곳에서는 일찍 사별한 배우자, 먼저 보낸 자식, 비극적 사고, 치명적 질병, 오래된 장애가 삶의 한 부분이다. 주민들은 분노하거나 억울해하지 않는다. 어쩌면 감정을 제대로 표현할 마땅한 방법을 모르는 것일 수도 있다. 어느 경우건 영구임대아파트 사람들은 불행을 말할 때 놀랍도록 차분하다.
최성원(70·가명)씨는 25년 전, 서울 가리봉동 셋방에 살았다. 초등학생이던 둘째아들이 촛불 장난을 하다 불을 냈다. 10살이던 셋째아들은 잠을 자고 있었다. 담요에 옮겨붙은 불 때문에 셋째아들은 전신 화상을 입었다. “다 죽게 생긴 놈을 중환자실에 눕혀놓고, 8일간 잠도 안 자고 요구르트를 먹여가며 살렸다”고 최씨는 말했다.
전세금 70만원을 포함해 전 재산을 그때 썼다. 아들이 퇴원한 뒤, 다섯 식구는 동네 공터에 들어선 노인정의 한켠에 얹혀살았다. 성인이 된 셋째아들은 뚜렷한 직업이 없다. 집에서만 지낸다. 공사장에서 석공일을 했던 최씨는 허리가 아프다. 도배를 하며 돈을 벌어온 최씨의 아내는 목이 아파 계속 기침을 한다. 그래도 얼굴부터 발끝까지 뒤틀린 셋째아들 앞에서 노부부는 아픈 티를 내지 않는다.
한국전쟁 때 피난 온 실향민 황기백(가명)씨의 왼쪽 이마에는 흉터가 있다. 술 마시고 정신없이 돌아다니다 지하철 선로에 떨어졌다. 술을 마셔야 할 이유가 있었다. 큰아들이 죽었다. 4년제 대학을 나와 결혼까지 했는데, 교통사고로 죽어버렸다. “그게 7년 전인가, 8년 전인가…. 잘 모르겠네. 뭐 알 필요도 없고….” 황씨는 담담하게 말했다.
이웃에 사는 김형성(가명)씨의 딸은 26살 되던 해에 죽었다. 그 일에 대해 김씨는 “딸을 날려버렸다”고 말했다. 왜 어떻게 죽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았다. “자살은 아닌데…. 그게 세상이 잘못되어갖고….” 말을 흐렸지만 김씨 역시 담담했다. 죽고 사는 것, 다치고 병드는 것은 그들이 어찌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다.
정영숙(53·가명)씨의 목소리는 크고 쾌활하다. 그의 음성만 들어서는 아픈 아들의 그늘을 알아차릴 수 없다. 이제 29살이 된 아들이 처음 쓰러진 것은 중학교 2학년 때다. 방에서 컴퓨터를 하고 있던 아들이 갑자기 기절했다. 쓰러지는 주기가 갈수록 짧아져 나중에는 한 달에 열 번씩 쓰러졌다. 병원에서는 간질이라고만 했다. 이유 없이 쓰러지며 몸이 굳어가는 아들을 살리려고 여기저기 빚을 얻어 병원을 다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편마저 2002년 중풍으로 쓰러졌다.
버는 사람이 없는 집들남편은 원래 액세서리 공장을 운영했다. 그 시절엔 아들도 건강했고 남편도 돈을 벌었다. 1997년 외환위기가 모든 것을 바꾸었다. 부도가 났다. 빚쟁이들이 매일 찾아왔다. 부부는 중학교에 갓 입학한 아들을 데리고 서울 도봉구 창동의 반지하로 숨어들었다. 아들의 공부를 뒷바라지하는 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랬던 아들이 쓰러지고, 그 아들을 다시 일으켜세울 치료비가 떨어지니, 낙심한 남편마저 쓰러진 것이다. 홀로 우두커니 서서 정씨는 자살을 생각했다. 아들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서 그 마음을 접었다.
질병과 장애는 가난의 원인이자 결과다. 가난해서 아프고 아파서 가난하다. 지난해 9월, 정씨 부부는 아들의 병명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파킨슨병이었다. 애초부터 치료가 불가능한 병이었다. 진작 알았다면 정씨 가족의 운명이 조금 달라졌을까. 부부는 이미 신용불량자가 돼 있었다. 4년 전, 남편과 아들의 병수발을 하면서 정씨는 마지막 승부를 걸었다. 돈을 끌어모아 마트 정육 코너를 인수했다.
자살 대신 선택한 길이었지만, 1년 만에 망했다. 그때 진 빚을 신용카드로 ‘돌려막기’ 시작했다. 빚은 1억원을 넘어섰고, 정씨는 끝내 파산했다. 영세민의 처지가 되어 지난 2008년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 발씩 떼던 아들은 이제 일어서지도 못한다. 남편은 계속 누워 있다. 정씨도 더 이상 돈을 벌지 못한다.
식구 중에 돈 버는 사람이 전혀 없다 해도 여기선 흉이 되지 않는다. 권영자(74·가명)씨 부부는 30대 후반의 딸을 데리고 산다. 누구도 돈을 벌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무릎이 아프고, 할머니는 당뇨와 자궁암이 있다. 딸도 여기저기 아프다며 일을 못한다. 임대료를 내지 못해 수백만원의 보증금을 까먹고 있다. 정미숙(57·가명)씨는 직업이 없다. 32살 아들도 직업이 없다. 아들은 몸무게가 100kg이 넘는 거구다. 여러 성인병을 앓고 있다. 정씨는 아픈 손을 치료하다 의료사고로 아예 손을 못 쓰게 됐다. 노영희(72·가명)씨는 40대 아들과 18살 손자와 함께 산다. 모두 경제적 무능력자다. 할머니는 식당일을 하다 관절염을 얻어 누워 있다. 아들은 공사판에서 일하다 허리를 다쳐 누워 있다. 태어날 때부터 아팠던 손자는 지체장애 2급이다.
5. 여자는 남자보다 가난하다
가난은 남녀를 차별한다. 남자가 일하지 않으면 여자가 가난해진다. 여자는 아무리 일해도 여전히 가난하다. 그러다 여자가 일을 놓으면 모든 것이 끝이다. 황지영(48·가명)씨는 2005년 갈빗집에서 서빙을 하다 쓰러졌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며칠 안 돼 무리하게 일을 나간 탓이었다. 건강이 나쁘다는 사실도 덩달아 알려졌다. 식당 사장은 위로하지 않고 해고했다. 집에 돌아온 황씨는 잠들지 못했다. 엄습하는 불안감을 아이들한테는 티내지 않았다. 속으로만 울었다.
황씨는 2002년 초에 이혼했다. 노름에 빠진 남편에게 매 맞고 산 지 18년 만에 결단을 내렸다. 남편은 운전사였다. 음주운전을 하다 회사에서 해고됐다. 이후 노름을 시작했다. 서울 구로동 반지하방에 아내와 아들을 남겨두고 남편 혼자 노름에 빠졌다. 노름을 말렸더니 피투성이가 되도록 황씨를 때렸다. “아이를 하나 더 낳으면 남편이 정신 차릴 것”이라고 동네 사람들이 말했다. 이제 17살이 된 딸을 그때 낳았다. 남편은 임신했다고 또 황씨를 때렸다.
때리는 남편, 방 안에서만 지내는 아들어릴 때부터 아버지의 폭력을 보고 자란 아들은 이제 25살이다. 내성적이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문을 닫고 지낸다.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술을 마시며 밤을 새우고 오후 2시에 일어난다. 고등학교는 중퇴했고 하는 일은 없다. 가끔 자해도 한다. 아이의 잘못은 부모가 책임진다. 아이가 클 때까지 그렇다. 그러나 다 자란 아들의 잘못을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 황씨는 알지 못한다.
몸이 아파 오래 서 있지도 못하는데 도대체 어디서 일을 구할 수 있을지도 황씨는 알지 못한다. 대신 한 달에 아홉 번 자활근로를 나가 20만원을 벌어온다. 그 돈으론 임대료와 관리비를 내는 것조차 빠듯하다. 나머지 필요한 돈은 친언니에게 조금씩 빌린다. 가슴에선 암세포와 근심이 함께 스멀댄다. 황씨가 가장 슬퍼하는 일은 “고등학생 딸아이한테 저녁 급식비를 못 주는 것”이다. 가장 걱정하는 일은 “아들과 딸이 자립하기 전에 내가 죽는 것”이다.
그래도 고순자(62·가명)씨는 황씨의 중년이 부러울 것이다. 시각장애가 있는 고씨는 환갑이 지난 나이로 5명의 식구를 건사한다. 역시 시각장애인이던 남편은 안마사였다. 오래 살지는 못했다. 1979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부터 고씨는 보이지 않는 눈으로 사남매를 데리고 서울 회현동과 명동 일대의 단칸방을 옮겨다녔다.
명동의 쪽방이 허물어진 자리에 최고급 호텔이 들어섰지만, 지난 30년간 식구들의 형편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남매 가운데 3명이 고등학교를 중퇴했다. 퀵서비스 일을 하는 큰아들은 결혼해 따로 살지만, 나머지 자녀는 늙어버린 고씨의 품에 기댄다. 이혼한 큰딸은 손녀 둘을 박씨에게 맡기고 강원도에 갔다. 미혼인 작은딸은 일자리를 찾고 있다. 막내아들은 공사장에서 일한다며 지방 어딘가로 갔다. 자식들은 아무렇지 않게 집에 들렀다 훌쩍 나간다. 그들이 집에 있어도 걱정, 없어도 걱정이다. 앞을 보지 못하는 할머니는 이제 10살·7살 손녀들의 뒷바라지를 한다. “어쩔 수 없이 산다”고 고씨는 말했다.
6. 알 수 없는 도움
사는 일이 힘든 그들에겐 도움이 필요하다. 체계적으로 돕기 위해 제도가 마련됐다. 그런데 그 제도는 그들을 돕지 않는다. 서초동 비닐하우스촌에 살았던 이희숙(가명)씨는 요즘 걱정이 많다. 이씨 가족은 기초생활수급권자 자격으로 영구임대아파트에 입주했다. 세대주는 남편이다. 세 아들이 성인이 되자 수급권은 박탈됐다. 몸이 아픈 남편이 죽으면 이씨는 집을 비워야 한다. 기초생활수급권자·장애인·국가유공자 등의 입주 자격을 갖추지 못하면, 세대주 변경을 아예 못하도록 지난 2006년 법이 바뀌었다. 일을 하는 아들 셋이 있으니, 이씨는 세대주 변경을 신청할 수급권자 자격이 없다. 세 아들이 합쳐 50만원을 용돈으로 주기는 한다. 그러나 부모와 닮은꼴로 가난한 아들들이 이씨의 여생을 책임지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남편의 사망과 함께 사라진 입주 자격김영희(55·가명)씨는 몇 달 전 남편을 여의었다. 남편은 뇌병변 2급 장애인이었다. 장애인 가족의 자격으로 지난 2005년 영구임대아파트에 들어왔다. 그런데 세대주인 남편에게 부여된 입주 자격이 남편의 사망과 함께 사라졌다. 김씨는 이 단지에서 쫓겨나게 될 것이다. 영구임대아파트는 쉽게 양도하거나 상속할 수 없다. 형편이 어려운 다른 영세민에게 입주 기회를 제공한다는 취지다.
하지만 김씨는 자신보다 형편이 더 어려운 가구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1천만원의 사채를 빌려, 한 달 이자만 60만원을 내고 있다. 남편 치료비는 필요한데, 은행에선 돈을 빌려주지 않았다. 김씨는 가끔 식당일을 나가 돈을 버는 정도지만, 기초생활수급권자가 될 수도 없다. 30대의 딸이 직장에 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이버대학교를 졸업해 간호사로 일하는 딸은 월 100만원을 겨우 벌 뿐이다. 오랜 식당일에 김씨의 손가락은 굽어 있다. 그 손가락으로 아무리 꼽아보아도 살아갈 방도가 없다.
왼쪽 눈으로 겨우 세상을 보는 폐암 환자 박금자(가명)씨는 암 치료조차 수월치 않다. 항암제인 하얀색 알약은 한 달치 30개에 180만원이나 했다. 1년 동안 약을 먹었더니 네 딸이 모두 빚더미에 올라앉았다. 박씨는 죽을 각오로 3개월간 약을 끊었다. 병원은 그제야 의료보험 적용이 되는 국산 복제약으로 바꿔주었다. 동사무소에서도 의료급여 혜택을 받게 됐다. 약값이 한 달 몇 만원으로 줄었다.
몇 달 전, 막내사위가 중소기업에 취직했다. 좋은 일이다. 좋지 않은 일도 생겼다. “막내사위가 수입이 있으니 기초생활수급 자격을 박탈하겠다”고 동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막내딸은 자식이 둘이고 빚까지 있다. 막내사위가 벌어오는 150만원의 월급으론 저희들 살기도 어렵다. 박씨는 동사무소에 가서 울어도 보고 소리도 질러봤다. 간신히 의료급여 혜택을 유지했다.
여태껏 못 본 곱고 귀한 것
앞으로 다른 딸, 다른 사위가 또 직장을 구한다면 몸부림치는 울음으론 부족할 것이다.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너무 힘들다”고 박씨는 말했다. 그래도 입에 무료 점심을 꾸역꾸역 밀어넣고, 박씨는 삐거덕거리는 현관문을 열어 남편이 홀로 앉은 좁은 방으로 돌아간다. 박씨의 눈앞에서 세상은 항상 희뿌옇다. 눈을 뜨나 감으나 마찬가지다. 방에 누워 바라본 천장은 흐릿하다. 칠십 평생 곱고 귀한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한 눈을 박씨는 그냥 감아버린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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