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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기도가 끊이지 않게

팽목 법당 차리고 실종자들이 돌아오길 함께

기도하며 가족들의 이웃이 된 하륜 스님
등록 2014-07-12 16:22 수정 2020-05-03 04:27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자신의 인터뷰를 읽다가 여러 번 울컥했다는 경기도 안산 주민 김삼엽씨의 말을 들으며 나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자기 말에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이웃 조카 다영이 때문에 그렇다는 걸 뻔히 아는데 뭘 묻나. 그는 과학 영재에 가까웠던 다영이가 중학교 과학반일 때 미국에 갈 기회가 있었던 일화를 미처 말하지 못했다며 아쉬워했다. 다영이의 총명함과 어여쁨을 나 홀로 들었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이렇듯 아름답게 공유될 수 있다면 그 삶은 짧아도, 길다.

종교 경계 없어진 지 오래인 팽목항

기억만 남기고 먼 이별을 하는 현장에서, 떠나는 이가 외롭지 않도록 어깨에 손 얹어주고 남아 있는 이의 가슴에 든 피멍이 서서히 풀리도록 쓰다듬어주는 사람을 만났다. 하륜 스님은 참사 직후 전남 진도 팽목항에 차려진 법당에서 한 달간 밤낮없이 귀환 기도를 하며 실종자 가족들을 보살핀 자원봉사자다. 가족들 품으로 돌아온 망자들의 영면을 기원하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지금은 일주일에 한두 번씩 진도와 안산을 오가며 가족들의 손을 잡아준다고 했다. 사랑하는 이와 영원한 이별을 하는 경계에 서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위로할 수 있는 것일까.

종교적 프레임에 대한 고정관념으로 그의 말이 부분적으로만 수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내 말은 의도적으로 거칠고 무례했다. 나는 사진기자에게 ‘스님스럽지 않게’ 찍어달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은 수줍게 웃으며 ‘제가 모자를 쓸까요?’ 물었다. 여러 질문에 부처님 말씀을 거론하면 ‘설법하지 말고 개인적 경험과 의견을 말씀해주세요’라고 했다. 무지한 요구였음에도 스님은 맑은 낯으로 충실하게 답해주었다.

적어도 팽목항에선 종교의 경계가 없어진 지 이미 오래다. 하륜 스님도 팽목항에서 경험한 그런 사례를 들려주었다. 그러므로 하륜 스님의 말은 단순히 어떤 ‘스님의 말씀’이 아니라 애끓는 이별의 현장에 발 딛고 있는 특별한 자원봉사자의 깊은 공감에 가까울 것이다. 그런 마음으로 묻고 들었다.

-진도엔 어떻게 내려가셨나요.

=사고 직후부터 안절부절못하며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처음 진도체육관으로 내려간 스님들은 잣죽을 나눠드리는 봉사를 시작하셨어요. 그렇게 일주일쯤 지나고 함께 일할 자원봉사 비구니 스님들을 모집하는 문자메시지가 왔죠. 저는 4월21일에 문자 받고 22일 아침에 진도로 내려왔어요. 제가 출가한 계기도 그렇고, 호스피스에 관심이 많은데 그걸 알고 제가 왔으면 좋겠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어요. 저는 팽목 법당이 새로 생겨서 거기 도감, 총무 같은 건데요, 그걸 맡았죠. 제가 내년에 버마(미얀마)로 죽음 수행을 공부하러 가는데 그래서 일종의 유학 준비 기간이라 팽목 법당에 하루 종일 있을 수 있었거든요.

-팽목항에서는 뭘 하신 거예요.

=빨간 등대가 있는 쪽에 천막 하나 쳐서 팽목 법당을 만들었어요. 가족들이 잠시 쉬기도 하고 기도도 할 수 있는 공간이죠. 바다 건너 사고 지점 해상도 보이고, 나중에 알게 된 건데 거기가 가족들이 공양하시고 아이들을 생각하며 걷는 길이더라고요. 첫날은 막막해서 기도만 했어요. 그다음에 몇몇 스님이 더 오셔서 원칙을 정했죠. 아침 7시부터 저녁 8시까지는 기도가 끊이지 않게 하자 그렇게요.

잊지 않고 외우면 구해준다던 그 기도

-무슨 기도를 한 건데요.

=그때는 실종자가 140명 정도 남았을 때였어요. 일주일 지났을 때라 살아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알고는 있었지만 가족들은 아직도 살아 있을 거라는 희망을 잃지 않았을 때였죠. 그래서 어떤 기도를 할까 하다가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자고 결정했어요. 바다에서 큰 풍랑을 만나 빠져 죽어도 그 이름을 잊지 않고 외우면 구해준다는 전생담이 있는 게 관세음보살이에요. 그래서 관세음보살만 계속 반복해서 했어요

그 소리가 들리는 듯해서 나도 속으로 관세음보살 했다.

-그건 망자를 위로하는 건가요, 남아 있는 가족들을 위로하기 위한 건가요.

=망자를 위로하는 기도는 이미 전국 사찰에서 하고 있었고요, 저희는 팽목 법당이 망자를 위한 기도보다 실종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 것이 우선인 법당이라는 결론을 내렸어요. 빨리 귀환해야 하는 실종자분들과 그 가족들을 위한 곳요.

-가족들과 접촉이 많으셨다고 들었어요.

=저는 팽목 법당에 기도하러 오시는 스님들을 안내해드리고 팽목항 앞쪽으로 왔다갔다 하면서 염주도 돌리고 기도도 하면서 가족분들을 어떻게 돌보면 좋을지 분위기를 보고 있었죠. 3일째 되는 날, 한 아버님이 다가오시더라고요. “스님 제가 보니 뭘 돌리면서 기도하시던데 아내가 불자는 아닌데 그걸 받았으면 좋겠다” 하시더라고요. 봤더니 가족분들이 어머님을 양쪽으로 부축하고 있는 상태예요. 그래서 얼른 드렸죠. “얼마든지 드릴 수 있습니다. 꼭 찾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서 염주를 드렸는데 나중에 들으니 스님한테 염주를 받고 아이가 왔다는 소문이 나서, 물론 매달리고 싶은 심정 때문인 걸 알죠, 그 염주가 다른 아버지, 다른 아버지 이렇게 종교와 상관없이 전달되면서 큰 힘과 위로를 주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뒤에도 염주를 원하는 분들이 계속 있었죠. 어떤 가족분은 우리가 아이들이 빨리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으로 관세음보살 기도하고 있다는 게 고맙다고 얘기하셨어요. 다른 사람들은 죽음이라든지 망자를 위한 기도를 하는데 스님들은 자기들처럼 아이들이 돌아오길 바라는 기도를 한다는 거죠. 그분도 불자가 아니었는데 그렇게 고마워하시더라고요.

-종교를 뛰어넘는 에피소드인데 종교적으로 느껴지는군요. 너무나 간절하니까 내가 기독교 신자라도 ‘스님 염주 좀 주세요’ 그런 말들이 나오는 거겠죠.

=그럼요. 저는 염주를 드리면서 그걸 돌리며 아이 이름을 부르는 것이 중요하지 기도하는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얘길 했어요. 스님 마음과 부모님 마음이 하나가 돼 그게 모아져서 아이에게 전달될 에너지가 된다, 그게 중요하다고 했죠.

승복 한계넘어 마음 연 가족들

-아이 이름 부르세요, 종교 상관없어요, 괜찮아요, 이런 말들이 굉장히 치유적이었겠어요.

=처음에는 제가 스님이니까 승복 같은 거 때문에 한계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어느 순간 마음을 다 여시더라고요. 그래서 결국 진심이 통하고 내가 그런 상이 없이 다가가면 모든 게 다 통하는구나, 종교는 크게 상관이 없구나, 느꼈어요. 제가 20년 동안 교회도 다녀봤기 때문에 그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죠. 기독교도이신 어머님이 아이를 찾게 되면 제가 미리 가서 “어머님, 목사님 오신다고 하니까 미리 인사드리러 왔어요. 잘 보내주시고, 제가 남아서 기도해도 될까요?”라고 여쭤봐요, 교회에 다니시니까. 그러면 “기도해주세요” 하시거든요. 그럼 제가 “어머님 누구누구 잘 올라가도록 계속 기도해드릴게요. 어머님 올라가셔서 목사님하고 잘 기도하세요”라고 얘기해드리거든요. 그럼 굉장히 고마워하세요. 저도 마음이 좋고요.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스님 진짜 ‘짱’이세요.

=아니에요. (웃음) 왜 그러세요, 부끄럽게.

-‘킹왕짱’이세요.

=경배하듯 스님을 향해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나도 마음이 좋아졌다. 경계를 훌쩍 뛰어넘어 고통받는 사람에게만 집중할 때 나올 수 있는 태도처럼 느껴졌다. 핑크를 좋아하는 실종자를 위해 핑크빛 연꽃초를 밝힌 채 귀환을 기원하고, 입관식 때도 반야심경 사경한 것을 핑크 봉투에 넣어줬다고 했다. 아이들의 천도재를 지내주는 사찰에선 마침 생일이었던 아이를 위해 미역국을 끓여주고, 아이들이 뭘 좋아할지 몰라 떡볶이, 콜라, 피자가 놓인 상차림을 준비했단다. 그런 말을 전하는 스님의 표정이 복사꽃처럼 환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초창기엔 가족들을 챙기는 게 가장 큰 일이고 힘든 일이었겠네요.

=그랬죠. 당시에는 식사를 하게끔 하는 게 중요했어요. 부모님들이 식사를 못하시고 링거 맞는 분이 많았거든요. 제가 염주를 나눠주면서 그랬어요. “어머니, 이거 스님들이 간절하게 기도해서 보내온 백팔 염주입니다. 이거 하나 돌릴 때마다 아이 이름을 불러주세요. 종교랑은 아무 상관 없는 겁니다. 어머님과 아이가 가장 밀접하게 연결돼 있기 때문에 어머님이 힘을 내시고 일어나셔야 아이도 힘을 내서 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식사 꼭 챙겨 드세요. 식사 안 하시면 아이도 힘이 빠져서 못 옵니다.” 거짓말이라고 하면 그럴 수도 있지만, 저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고 그래서 그렇게 얘기했어요.

내가 밥을 안 먹으면 아이가 힘이 빠져서 못 온다는데 어쩌나. 먹을게요. 그런 말이 희미하게 들리는 듯해서 눈물이 차올랐다. 간절한 염력으로 이미 오픈된 카드의 숫자를 내가 원하는 숫자의 카드로 바꾸는 마술을 보는 느낌. 치유의 법칙은 간단한 마술처럼 단순하다.

-지금도 가족들 중에 스님과 같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분이 많다고 들었어요.

=서로에 대한 신뢰가 쌓여서 그럴 거예요. 함께 기다렸고 신원확인소에서 아이들을 같이 확인도 했고 이별의 힘든 과정도 같이했잖아요. 지금도 그래요. 제가 가족들을 만나러 갈 때도 어떤 종교인이나 그분들이랑 친분이 있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냥 그분들이 원하는 순간, 그 모습으로 거기 있다가 오는 거예요.

모든 살림살이 다 본 느낌

-그분들이 원하는 모습은 뭔데요.

=그때그때마다 달라요. (웃음) 지금은 잊지 않고 같이 있어주는 거죠. 안산으로 올라갔던 실종자 가족분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번갈아가며 내려오세요. 그 고통을 아니까요. 와서 위로하고, 손 잡아주고, 같이 밥 먹고, TV 보고, 텐트 속에서 같이 잠을 자고, 함께해주는 거죠. 이제는 그만 잊지, 그만하지, 그런 게 아니라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하고 같이 있어주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수색이 어려운 걸 부모님들도 충분히 아시고 충분히 괴로워하세요. 만약 내 자식이라면…. 아직 수색할 수 있잖아요. 최선을 다해도 안 되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하지만 그걸 다해보고 싶은 게 부모 마음이잖아요. 그 마음까지는 같이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렇고 말고요, 스님. 그렇고 말고요. 속으로 합장했다.

-그런 과정을 함께하면서 스님 개인으로도 내적인 변화가 많으셨을 듯합니다.

=변화가 많죠. 이런 표현을 가족분들이 어떻게 이해하실지 모르겠는데, 제 개인적으로는 굉장히 큰 공부고 수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평생 중으로 사는 데 중심이 될 만큼요. 불교에선 내 자신의 밑바닥을 보는 걸 ‘살림살이를 다 본다’는 표현을 써요. 그러니까 내 자신의 한계와 나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모든 살림살이를 다 본 느낌이에요. 그래서 내가 앞으로 어떤 일을 어떻게 함께 해야 하는지를 많이 배웠어요.

마지막까지 중 노릇 제대로 할 스님 한 분이 또 나타나셨구나 싶은 반가움에 얼른 또 합장했다.

곁에 있어주니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스님.

=아니에요. 저는 아직도 가족분들에게 도움이 되기는 할까 생각할 때가 있어요. 팽목항에서 가족분들 위로한다고 TV 앞에 멀뚱멀뚱 함께 앉아 있는 경우가 있었어요. 그 TV 나오지도 않아요. 근데 옆에 있는 것밖엔 할 게 없었어요. 근데 아버님이 그걸 원하셨고 나중에 고모님이 그냥 같이 있는 것만으로 힘이 됐다고 얘기하시니까 그나마….

훌륭한 수도자이긴 한데 치유의 영역에선 좀 무식한 데가 있으시구나, 혼자 웃었다. 그게 얼마나 큰 위로고 치유적 기운을 주는 일인데요.

-사람들과 오래 함께하려면 심리적 자기 보호를 잘하셔야겠어요.

=저도 그게 뭔지 알아요. 처음 팽목항에 있을 때는 밥이 안 넘어가더라고요. 아이들은 차가운 물속에 있고 부모님들은 슬픔 때문에 죽도 못 넘기시는데 부모님과 같은 마음이라고 위로해주면서 나는 남이니까 이게 들어가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언젠가부터는 입맛도 없어지고 밥을 봐도 안 넘어가요.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제 몫에서 한 숟가락씩을 덜어서 바다의 아이들과 함께 하는 의식을 했어요. 그러니까 좀 넘어가더라고요. 자신들이 먹기 전에 아이들에게 밥 갖다주는 부모님들의 심정을 알겠더라고요.

-스님은 가족분들에게 어떤 존재세요. 성직자예요, 이웃이에요, 전담 치유자세요. 뭔가요.

=그냥 이 슬픔을 같이 나누는 사람요. 말없이 손만 잡아줘도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 이었으면 좋겠어요. 지금도 가장 힘들 때가 언제냐 하면 수색하는 데 진전이 없을 때예요. 그러면 가족분들을 만날 때마다 가슴이 덜컹덜컹 내려앉고 제가 죄인이 된 느낌이에요. 그러면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게 기도밖에 없어서 죄송합니다’ 얘기하거든요. 그때 아버님이 하신 얘기가 있어요. “아닙니다. 스님은 우리 곁에 있어주시잖아요. 그걸로 감사하고 감사합니다.” 그런 때 제가 말도 못하게 위로받아요. 제가 부족한 사람인데 그렇게 받아주시니 얼마나 감사해요. 제가 요만큼만 도움이 되는데 그걸 이만큼으로 너무나 크게 받아들여주세요. (웃음)

잊지 않고 기도해주는 것만으로도

특별한 수행을 하지 않아도 함께 있어주는 것만으로, 잊지 않고 기도해주는 것만으로 누군가에겐 태산 같은 위로가 된다는데 못할 이유가 뭔가. 나는 스님에게 실종자 수만큼 준비한 염주를 건넸다. 스님이 가족들에게 기도가 듬뿍 담긴 염주를 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준비한 염주였다. 어떤 게 효험이 있는지 알 수도 없고 아침 일찍 준비하느라 검은 비닐에 담긴 염주였지만 스님은 기꺼이 받아주었다. 서로 합장하며 시인의 첫 문장 하나 떠올렸다.

“지갑에서 와르르 동전이 쏟아지듯 슬픔이 몰려왔다” -김혜선 ‘붉은 줄 나비’

살다보면 혼자선 다 주울 수 없을 때 얼마나 많은가. 슬픔이 그렇게 주체할 수 없이 몰려올 때 도움받으라고 사람은 함께 사는 거예요, 마치 하륜 스님이 할 법한 해석을 내가 덧붙인다. 끝까지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모든 슬픔은 반드시 누그러진다.

심리기획자 이명수, 녹취 전다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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