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화의 거장 혜원 신윤복(18세기말~19세기초)은 오늘날로 치면 해군 장교 출신이다. 20세기초 화가 인명록 에는 그가 수군 첨사 벼슬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지방의 해안가 포구에서 수군 병사들을 감독·훈련하던 하급 무관이다.
군대 막사에서 필력을 묵히던 시절 혜원은 속앓이가 심했을 것이다. 대대로 화원이었던 그림 가문에서 붓놀리는 재주를 이어받았지만, 어진(임금 초상)을 숱하게 그린 아버지의 후광에 가려진 처지였다. 동시대 정조의 총애를 받은 화원 김홍도·이인문의 높은 성가를 따라잡기도 불가능했다. 자연히 서울 장안의 호걸, 기녀, 중인 등과 어울리며 떠돌았고(), 도시 생활의 이모저모를 흘끔거리게 되었을 터다. 그런 경험이 필력과 만나 세속 남녀들이 질펀하게 어우러진 수십 폭의 풍속화를 만들었다. 저 유명한 과 절세의 (간송미술관)가 그 결실이다.
세속을 담았지만, 혜원 풍속화풍은 간단치 않다. 관능이 깃들되 마냥 관능만 내뱉지 않는 그림, 울분의 시선에 비친 세상을 다시금 삭히고 다듬어낸 그림이다. ‘난초 흐드러진 정원’이란 뜻의 호에 걸맞게, 선비 그림인 남종 산수가 풍속화의 정갈한 배경으로 등장하며, 기발한 지성이 번뜩이는 그림 제목과 찬시가 붙었다. ‘명주실처럼 가늘고 철사처럼 탄력 있다’는 인체의 선묘와 그네에 막 오르는 여인의 동작 스냅(‘단오풍정’), 구도는 야해도 누구나 같이 웃으며 볼 수 있는 품격은 이런 지식인의 내공에서 나왔다.
생전 행적도 후손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 혜원이 올가을 갑자기 대중문화의 아이콘으로 떴다. 관능적 풍속화와 미스터리한 삶이 드라마와 영화의 상품 메뉴에 올랐다. 그런데 뜨는 혜원은 가짜 남자, 남장 여자다. 거장 단원 김홍도의 제자, 연인이다. 새 영화 는 혜원의 ‘올누드’와 격렬한 섹스신까지 보여줬다. 철학자 보드리야르가 시뮐라시옹(모사) 담론에서 통찰했듯, 텔레비전은 혜원에 얽힌 허구와 사실의 경계를 지웠다. 많은 이들은 혜원이 거장 로댕과 제자 클로델처럼 단원에 연정을 품은 앳된 여제자라고 믿고 있다.
이런 내용의 사극 을 미술사가들이 역사 왜곡이라고 공개 비판했다. 필자는 뒤이은 논란이 정말 흥미롭다. 판에 박힌 역사 왜곡, 재해석 사이의 입씨름만 있는 것이 아니다. 벤야민이 말한, 전통예술의 유일한 아우라가 해체되는 대중예술시대의 담론에, 정서의 파편성을 내세운 포스트모던적 연출이 끼어들고,‘미디어가 곧 메시지’라는 맥루한의 언설이 논란을 증폭시키는 배경이 된다. 변질된 혜원 이미지가 원래 인물처럼 행세하는 시뮐라시옹 판타지도 얽혀들었다.
관건은 상상력의 ‘품질’이다. 에서 성전환된 혜원은 단원을 비롯한 등장 인물과 이성·동성을 오가는 감정 기복에 따라 캐릭터를 풀어낸다. 최근 개봉한 영화 는 여자 혜원과 첫 연인 강무, 단원, 기생 설화가 농염하게 얽히는 다각 애정 관계로 끌어간다. 두 작품 공히 혜원이 사랑에 빠지는 여자란 설정에 기댄다. 등장 인물들의 물고 물리는 사랑이 줄거리의 기본 동력이며, 정교한 재현 그림이나 카메라 워킹은 이를 치장해준다. 결국 기술적 연출력은 일정한 경지를 구축했지만, 상상력의 두께나 밀도는 얕고 성긴 차원을 벗어나기 어렵게 된다. 명백한 성적 정체성을 뒤틂으로써 극은 역사적 개연성을 상실하고, 상상력 반경은 연애의 범주로 국한된다. 역사적 맥락을 무시한 성전환으로, 혜원의 어떤 그림이든 여성성과 결부해 해석할 수밖에 없다. 거꾸로 사극의 상상력을 제약하는 치명적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셈이다. 학계 소장 연구자들이 의 가장 큰 문제로 극에 깔린 역사적 맥락이 만화처럼 단순하고 빤한 도식이라는 점을 지적하는 건 이런 맥락이다.
팩션극이 보편화한 지금, 전복적 상상력의 가치를 마냥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렇다고 전통 회화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는 성취만 앞세우는 건 ‘후진’ 발상이다. 처럼 콘텐츠를 수백 년 동안 재활용할 수 있는 ‘상상력의 두께’를 확보하는 데 류의 팩션물들이 얼마나 기여할 수 있을까. 사극에서 기본에 충실한 고증은 제약이 아니다. 상상력의 허무한 방전을 막고 여물게 팩션을 숙성시키는 ‘안전판’일 수 있다. 고증 범위 등 사극 제작 가이드라인을 방송사들끼리 자율적으로 의논해 정리하는 것도 대안이 될 수 있을 듯하다.
간송미술관에는 혜원이 보름달 아래 바둑이를 그린 (蘿月不吠·사진)란 동물 그림도 전한다. 달그림자를 보고 온갖 상념에 잠긴 듯한 그림 속 바둑이의 모습이야말로 성이 졸지에 뒤바뀐 혜원의 진짜 심경일런지도 모른다.
노형석 한겨레 대중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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