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이건 아닌데’ 싶어 누군가에게 옐로 카드라도 보여주고 싶은 그 순간 어디 한두 번인가. 화장실이나 매표소에서 길게 줄을 서 있는데 새치기를 하는 누군가에게, 다음날 차 빼기 편하려고 비어 있는 주차 공간을 무시하고 이중주차부터 하는 누군가에게, 또 그 비슷한 일을 벌이는 수많은 ‘누군가’들에게.
새치기나 불량 주차 관행 말고도 ‘이건 아닌데’라며 옐로 카드, 나아가 레드 카드라도 내밀고 싶은 일이 어디 한두 가지인가. 하지만 문제는 옐로 카드를 빼들며 한마디 준엄하게 던지기에는 내가 너무 소심하다는 데 있다. 내가 나서기는 뭣하지만 다른 누군가가 대신 나서주면 좋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소심하게 숨죽이며 살다 보니 불의에는 한없이 관대하고 불이익에는 그지없이 예민한 내가 있다. 이런, 나는 이보다는 품격 있게 살 줄 알았는데!
참으로 감사한 것은 이 와중에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며 사는 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국방부에서 불온서적 목록을 지정한 것에 대해 군대 내 장병들의 기본권을 침해한다며 헌법소원을 낸 군법무관들이 있다. 교육전문가로서 양심을 걸고 일제고사를 반대한 교사들도 있고 일제고사를 보는 날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체험학습을 강행한 학부모도 있다.
품격을 지키는 데는 엄청난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국민 모두가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야구경기에 정신이 쏠려 있을 때, 국방부는 헌법소원을 낸 법무관 7명 중 2명에 대해 파면 징계를 내렸다. 파면의 사유는 군 위신 실추와 복종 의무 위반, 장교 품위 손상 등이라 한다.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들은 교단에서 쫓겨났으며, 아직도 길 위에서 싸우는 중이다. 일제고사 보는 날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은 학부모는 지난 2월 “무단 결석 1일, 사유- 국가고시 거부”라고 적힌 자녀의 생활기록부를 받아보았다. 양심에 따라 집총을 거부한 이들은 감옥으로 갔고, 광우병에 대한 프로그램을 제작했던 PD는 검찰 수사에 시달리고 있다. 품격의 대가를 치르는 이들이 너무 많다.
아닌 걸 아니라고 하기가 왜 이리 힘겹나몇 년 묵은 얘기인데, 내게도 비용을 치러야만 했던 일이 있었다. 앞에 열거한 사례에 비해 너무 하잘것없지만. 이라크전이 발발하자 나는 평화를 주제로 한 수업을 했다. 이러저러한 경로로 이 수업이 신문에 실리게 됐고. 대통령은 ‘국익에 반하는 행동’을 한 교사를 문책하라 하고, 교육청은 학교에 조사를 명하고, 교장·교감 선생님은 나를 몰아붙였다. 의연한 듯 대처하기는 했다. 문제가 생겨도 내가 승소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래도 무서웠다. 어쨌든 내 생활을 갉아먹게 될 것이 분명한 그 상황 자체가. 별일 없이 마무리됐지만, 내가 치른 대가는 스트레스만은 아니었다. 나는 더 소심해졌다.
코끼리가 자기 힘으로 충분히 끊을 수 있는 쇠사슬에 묶인 채, 인간에게 복종하도록 하는 법을 아는가? 아기 코끼리일 때 쇠사슬에 묶였던 기억이, 아무리 애써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었던 그 기억이, 성장해 큰 힘을 가지게 된 뒤에도 코끼리를 묶어놓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코끼리는 쇠사슬에 묶인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소심함에 묶여 있다는 것.
우리가 정의롭지 못한 크고 작은 일들에 항거하는 품격 있는 삶을 선택하지 못하고 일신의 안일을 먼저 구하는 소심한 삶을 사는 원리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에게는 이미 불의의 쇠사슬을 끊어낼 만한 힘이 충분히 있는데, 힘 없던 시절의 상흔이 우리를 묶어놓은 게 아닐까.
그러니까 최근 들어 내가 느끼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우울함, 무력감, 좌절감, 분노 등)의 원인은 결국 나 자신인 것이다. 누구를 탓하랴, 비용을 치르기를 두려워하는 비겁한 인간이라서 그런 것을. 맞다. 다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억울하다. 품격을 지키는 삶에 너무 비싼 값을 매기는 이 사회가 문제 아닌가. 인간으로서의 품격을 지키면서 살려면 밥줄 끊기는 것도 각오해야 하고, 법정도 감옥도 겁내지 말아야 하는 이 세상이 더 문제 아닌가. 아닌 것을 아니라고 하는 일이 왜 이렇게 힘겨운 거야.
박현희 서울 구일고 사회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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