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의 하늘은 백성이고 백성의 하늘은 밥이다.” 조선조 최고의 태평성대를 이뤘다는 세종의 말씀이다. 정치의 기본은 먹는 문제의 해결이라는 뜻일 터인데, 지금도 다를 게 없다. 총선·대선을 앞두고 복지가 화두로 떠오르자, 보수정당조차 ‘좌클릭’에 나선 건 ‘밥의 정치’라는 철칙이 작용한 탓일 게다. 문제는 ‘어떻게’다. 정치인들이 입에 달고 사는 예산 타령이 아니다. 내 입에 들어가는 ‘밥’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비정규 노동 등 타인의 눈물,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소·돼지·닭·오리 등 뭇 생명의 고통을 수반하지 않은 ‘밥’은 정녕 불가능한가?
절대 빈곤이 사실상 해소된 21세기 한국 사회에서 ‘밥의 정치’란 이제 더 많은 밥을 뜻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밥’을 만들어내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 사람과 뭇 생명의 관계, 요컨대 ‘생태·정치적 정당성’을 둘러싼 제 정당·사회세력 간 각축의 문제다.
‘2012년 3월4일’을 기억하자. 그날 한국 최초의 녹색당이 창당했고, 진보신당과 사회당이 합당했다. 한국 정당정치사의 한 페이지를 기록한 의미심장한 날이다. 그러나 언론은 철저하게 외면했다. 종합일간지와 공중파 방송 가운데 진보신당·사회당 합당 소식을 전한 매체는 한 곳도 없다. 녹색당 창당대회 소식은 과 만이 간단하게 전했을 뿐이다.
언론의 반응이 어떻든 녹색당 창당대회장은 첫발을 내디딘 ‘생태정치’의 부푼 꿈으로 충만했다. 하승수 녹색당 초대 사무처장은 달뜬 목소리로 “우리나라에서 녹색당이 가능하겠느냐는 회의론이 많았는데 결국 해냈다”고 외쳤다. 반면 노회찬·심상정·조승수 등 ‘유명인사’들이 떠난 당을 추슬러 정치적 존재감을 복원해야 할 진보신당의 대회장은 비장했다.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는 통합진보당에 합류하지 않은 선택을 “소멸을 무릅쓰는 용기”라고 자평하며 ‘정치적 자존감’을 강조했다. 지금, 두 소수정당의 정조는 사뭇 다르다.
국회의원을 보유하지 못한 소수정당에 대한 한국 언론의 홀대는 낯선 풍경이 아니다. 그러나 정치가 권력 쟁취를 위한 제도적 투쟁으로서의 게임을 넘어서는 것이라면, 지금과는 ‘다른 세상’의 ‘더 나은 삶’을 앞당기려는 사회적 실천을 정치라고 부른다면, 두 정당이 언론의 홀대를 받을 이유가 전혀 없다.
녹색당은 ‘생태적 지혜, 사회정의, 직접·참여·풀뿌리 민주주의, 비폭력 평화, 지속 가능성, 다양성 존중’ 등 지구 녹색당 헌장의 정신을 존중하며 탈핵·탈토건·농업·녹색노동·인권·평화·생명 따위를 추구한다. 단순화하면 ‘생태민주주의’다. 진보신당의 지향을, 홍세화 대표는 ‘전태일 정신’으로 압축한다. 풀어 말하자면 ‘비정규직 없는 평등국가, 핵과 자연 수탈이 없는 생태국가, 전쟁 없는 평화국가, 모든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이 존중받는 연대국가’를 꿈꾼다. 두 당의 지향을 두곤, ‘비현실적 이상주의’라는 비아냥이 늘 따라붙는다. 현실의 복잡함은 무겁게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다른 세상’을 상상하지 않으면 어떤 유의미한 변화도 이룰 수 없는 존재의 숙명 또한 잊지 말 일이다.
권력정치가 아닌 ‘마음을 움직이는 정치’를 추구한다는 두 소수정당에 4·11 총선은 기회이자 위기다. 총선에서 국회의원을 한 명도 배출하지 못하고 정당득표율이 2% 미만일 경우 정당법에 따라 강제 해산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두 정당이 이 장벽을 가볍게 뛰어넘으리라 장담할 이는 많지 않을 게다. 두 정당은 숱하게 명멸한 소수정당의 전철을 밟을 것인가, 아니면 총선 이후에도 정당으로서 ‘생태민주주의’와 ‘전태일 정신’을 추구할 기회를 얻을 것인가. 유권자인 여러분의 선택에 달렸다.
이제훈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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