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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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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원버스

등록 2008-11-26 10:38 수정 2020-05-03 04:25

만원버스에서 자리 양보를 두고 실랑이 벌이는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가뜩이나 치민 짜증을 배가시킨다. 마땅히 붙잡을 손잡이도 찾지 못하고 어정쩡한 자세로 중심을 잡으며 앞뒤 사람 입냄새·땀냄새에 불쾌지수가 요즘의 환율 곡선을 탈 즈음 들려오는 50대 남성(빽빽한 승객들로 시야가 가려 직접 볼 수는 없으니 추정일 뿐이다)의 갈라진 목소리.
“어린것이 말야, 노인네가 애까지 안고 있는 게 안 보여?”
이어지는 20대 여성의 항변.
“못 봤어요. 못 볼 수도 있는 것 아니에요?”
이 노선은 대학을 여러 개 경유하기 때문에 평소 출근 시간에 버스를 이용하는 대부분의 20대 승객은 대학생들이다. 저 학생은 지난밤 헤어진 남자친구 생각에 정신을 놓고 있었던 걸까? 너무 피곤해서 못 본 체하고 싶었던 걸까? 피곤했다면 왜일까? 지난밤 늦게까지 친구들과 어울린 걸까? 아니면 부모님이 감당하기 어려운 학비를 보태려 새벽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 걸까? 장학금이라도 타보려고 책과 씨름하다 늦게 잠들었을까? 젊음의 낭만은 고사하고 중년보다 힘들다는 요즘 청년 세대 아닌가.
“학생, 내가 미안해, 미안해….”
60대 여성의 잦아드는 목소리. 그는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붐비는 버스에 노인이, 아이까지 데리고 탄 죄? 아들·며느리가 맞벌이라 손자를 봐주고 있는 걸까? 부모 잃은 손자를 홀로 키우는 노인일까? 아이를 데리고 일터로 가는 길일까? 왜 그는 택시를 탈 생각은 못했을까? 저런 노인들에게 넉넉한 생활비를 대주는 사회 안전망은 필요 없는 걸까? 세계 7대 경제대국을 목표로 한다는 대한민국 아닌가.
“왜 자꾸 반말하세요? 어른이라고 함부로 그래도 되나요?”
20대 여성의 반격. 그래, 저 50대 남성은 왜 다짜고짜 욕지거리에 가까운 반말을 했을까? 점잖게 나무라거나 충고를 하거나 ‘자리를 좀 양보해주면 안 되겠느냐’고 주선을 할 수는 없었을까? 나이가 적은 이에겐 일면식 없이 하대해도 되는 걸까? 어려운 시절을 살아오느라 교양 있는 소통의 방식을 터득할 기회가 없었던 걸까? 차창 밖을 지나는 고급 승용차 뒷좌석의 50대 남자도 그와 같을까? 하기야 이런 상황은 늘 만원버스를 타는 이에게나 일어나는 일이지. 마침 버스는 서울 강남의 한 거리를 달린다. 교양 있는 강남 사람들답지 않게 세련되지 않은 디자인으로 내걸었던 ‘종부세 폐지하라’ 펼침막이 보이지 않는다.
“….”
조용해진 걸 보니 아마도 자리 양보 절차가 마무리된 모양이다. 버스가 급커브를 돌며 짜증 곡선이 한 차례 더 치고 오른다. 이런 콩나물시루 버스의 생존 환경은 양보나 존중 따위 고상한 가치를 푹 삶아낸 배춧잎처럼 만들고 만다. 쉬고 싶다는 근육의 아우성이랄까, 그런 원초적 본능이 더 파릇파릇해지는 공간이다.
“….”
아까부터 계속 무표정한 승객들. 버스 기사도 무표정한 얼굴이다. 그러고 보니, 버스의 탓이 크다. 왜 이 노선은 배차 간격이 유난히 긴 걸까? 같은 시각에 다른 노선보다 승객 밀도가 높은 걸까? 당국에서 승객 수요를 조사해 배차 간격을 조정할 수는 없는 걸까? 가능하면 모두가 자리에 앉을 수 있는 버스 시스템은 어려운 일일까? 서울시장이나 장관이나 대통령이 이 노선을 이용해도 상황은 지금과 같을까?
내릴 때가 됐으니, 꼬리를 무는 의문의 ‘수도쿠’를 마쳐야겠다.
그런데, 버스를 내리면 저 실랑이를 지켜보는 불편함도 털어버릴 수 있을까? 경제 전망은 어두워지고 정부 정책은 이기주의를 확대재생산하는 데 열중하고 있으니, 생존과 안락을 추구하는 본능이 연대와 공동체 정신과 부딪치는 파열음은 과연 그칠까? 버스 밖 세상은 또 다른 버스 안이 아닐까? 버스야 내려버리면 된다지만, 버스 밖 세상에서도 내릴 길이 있을까? ‘비상구’란 이름의 저 주점이 그런 곳일까?
버스문이 열린다. 헐벗은 바람과 시든 나뭇잎이 서로 할퀴고 난 뒤 거리는 어느덧 처연한 초겨울이다.
박용현 편집장 pia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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