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그라운드라는 불공정 무대

선수 보호하지 못하는 KBO 야구 규약의 역사는 1915년 메이저리그로 거슬러 올라가… 합리성 내세우며 누리는 위법의 ‘특혜’
등록 2012-05-10 16:50 수정 2020-05-03 04:26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더니 유령이 고개를 내민다. 100년 가까이 메이저리그를 배회하며 커미셔너 사무국과 구단주들을 괴롭혔던 유령이다. 한국 프로야구에도 출몰한 이 유령은 미국에서처럼 프로야구의 근본을 바꿔버릴 것인가, 아니면 존재의 이유를 잃고 이내 사라져버릴 것인가.

“10구단 창단 유보는 담합 행위“

법무법인 에이팩스의 장달영 변호사는 지난 4월19일 공정거래위원회에 ‘사업자단체금지행위 신고서’를 제출했다. 피신고인은 한국야구위원회(KBO)다. KBO 이사회가 제10구단 창단 논의를 사실상 유보함으로써 “일정 거래 분야에서 현재, 또는 장래의 사업자 수를 제한하는 행위”를 금지한 공정거래법 26조 1항 2호를 위반했다는 것이다.

NC소프트가 지난해 9구단으로 리그에 참여함에 따라 프로야구는 10구단으로의 확대 여부를 결정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구본능 KBO 총재는 10구단 창단을 해법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기존 구단들의 반대에 직면해 있다. 구 총재는 지난해 8월 취임 뒤 구단주들과 회동을 가졌다. 이 가운데 일부 구단주들은 ‘넥센 히어로즈의 파행 운영’을 이유로 들어 10구단 유치에 반대 의사를 나타냈다. KBO 사무국은 지난해 12월 이사회에 10구단 문제를 안건으로 올리려 했지만 ‘분위기가 무르익지 않았다’는 구 총재의 판단 아래 유보했다. 해를 넘긴 올해 4월에야 이사회에 안건이 올라왔다. 그런데 논의 자체가 미뤄졌다.

장 변호사는 “KBO도 공정거래법상 사업자이므로 창단 방해는 위법 행위”라는 태도다. 그는 “앞으로 KBO 이사회의 위법성에 대한 근거를 추가 발표할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위가 장 변호사의 손을 들어준다면 KBO는 담합 행위에 따른 과징금을 물거나 공정위의 시정 권고를 받아들여야 한다.

프로스포츠라는 산업에 ‘공정거래’라는 잣대를 들이댄 첫 사례는 191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는 1900년부터 내셔널리그와 아메리칸리그라는 양대 리그와 16개 구단 체제로 운영됐다. 1914년 페더럴리그라는 ‘제3의 리그’가 출현했다. 기존 두 리그는 즉각 ‘전쟁’을 선포하고 갖은 방법으로 신생 리그를 압박했다. 재정난에 빠진 페더럴리그는 두 시즌을 끝으로 소멸했고, 소속 구단 일부가 기존 리그에 매입되는 것으로 ‘야구 전쟁’은 끝났다.

하지만 ‘제값’을 받지 못한 한 구단주가 내셔널리그를 상대로 소송을 걸었다. 양대 리그의 영업 방해 행위는 ‘셔먼 반독점법’ 위반이라는 취지였다. 1890년 제정된 이 법은 한국 공정거래법의 모태 격이다. 7년이 걸린 이 소송에서 미국 법원은 “프로야구는 주간(州間) 상업이 아니므로 반독점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는 판결을 내렸다.

2012년 현재에도 메이저리그는 반독점법 적용 면제라는 특혜를 누린다. ‘특혜’인 이유는 미국 프로풋볼리그(NFL)나 전미농구협회(NBA) 등 다른 프로스포츠는 법 적용 대상이기 때문이다. 가령 뉴저지에 새로운 구단을 만들고 싶은 사업자는 메이저리그가 허가하지 않더라도 반독점법 소송을 낼 수 없다. 대신 1998년 제정된 커트플러드법으로 ‘선수 고용에 영향을 끼치는 사안’은 반독점법 적용 대상이 됐다.

한국 프로야구는 어떨까. 공정위는 2001년 3월29일 프로야구에 관한 최초의 심의를 했다. 이 심의에서 공정위는 “KBO는 공정거래법에서 규정하는 사업자 단체에 해당”하므로 “에이전트 계약 금지, 일방적 트레이드, 자유계약선수(FA) 자격 취득 조건과 구단당 자격 획득 선수 수 등에 관한 야구 규약은 수정 또는 삭제”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KBO는 메이저리그의 사례를 들어 “프로야구는 공정거래법 적용 대상이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불합리하게 적용된 ‘합리성의 원칙’

프로스포츠는 특수한 산업이다. 2001년 판결에서 공정위는 “프로야구 구단은 단독으로 경기를 생산할 수 없으므로 사업 영위를 위해서는 상호 협력이 요구된다”고 규정했다. 이는 프로야구에는 ‘당연위법의 원칙’(per se violation)보다는 ‘합리성의 원칙’(Rule of Reason)이 적용됨을 시사한다. ‘합리적 사유’가 존재한다면 어떤 담합 행위는 위법하지 않다는 게 합리성의 원칙이다.

2001년 이후 9차례에 걸쳐 공정위는 프로야구 관련 사안을 심의했다. 결과는 KBO의 전패였다. 그러나 9차례의 공정위 판결에도 프로야구 규약은 본질적으로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가령 에이전트 고용 금지 문제에 대해 KBO는 공정위로부터 시정 명령을 받은 뒤 “에이전트를 둘 수 있되 시행 시기는 추후 결정한다”고 규약을 바꾼 뒤 ‘추후’를 계속 미루는 방법으로 피해갔다. 선수 쪽이 구단과 대등한 교섭력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는 공정거래법의 보호는 큰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합리성의 원칙을 적용하더라도 현행 프로야구 규약은 대한민국 법률 체계 내에서 ‘충분할 정도’로 합리적이지 않다는 게 9전 전패 결과로 입증된다. 법적 분쟁의 불씨는 여전히 살아 있다. 반독점법 전문가인 조성호 미국 볼링그린스테이트대학 교수는 “신인 드래프트나 FA 제한 등 프로야구에서 이뤄지는 많은 것들이 공정거래법 위반일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한다.

최민규 기자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