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이 미국의 제47대 대통령으로 다시 당선됐다. 행정부의 수장이 된 그는 의회권력은 물론 사법권력까지 거머쥐고 2025년 1월20일 낮 12시에 임기를 시작한다. 적어도 중간선거가 치러지는 2026년 말까지 아무도 그를 막을 수 없다. 바야흐로 ‘트럼프의 시대’가 열렸고, 미국은 ‘트럼프의 나라’가 됐다. 그가 만들어갈 ‘다시 위대해진 미국’은 대체 어떤 모습일까?
해리스는 왜 따라잡지 못했나
막판까지 승부는 박빙일 것으로 보였다. 결과는 전혀 달랐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인구 비례에 따라 주별로 할당된 선거인단(312 대 226)은 물론 총득표수에서도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300만 표 이상 앞섰다. ‘압승’이라 부를 만한가? 딱히 그렇진 않아 보인다. 경합주(스윙스테이트) 개표 결과를 자세히 보면, 해리스 부통령의 당선도 얼마든지 가능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개표 초반 해리스 부통령이 앞서 나갔던 3개 경합주에서 당락이 갈렸다.
에이피(AP) 통신 등 현지매체 보도를 종합해보자. 위스콘신주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은 169만7298표를 얻었다. 해리스 부통령은 166만7881표를 얻었다. 표차는 단 2만9417표. 위스콘신주에 할당된 선거인단 10명은 모두 트럼프 전 대통령이 차지했다. ‘승자독식’이라 그렇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선거인단 15명이 걸린 미시간주에서 8만618표 차로, 선거인단 19명이 걸린 펜실베이니아주에선 13만9678표 차이로 각각 이겼다. 세 군데 모두 따라잡을 수 없는 격차가 아니었다.
이들 3개 주에 할당된 선거인단은 모두 44명이다. 해리스 부통령이 3개 주에서 모두 승리했다면, 확보 가능한 선거인단 수는 ‘매직 넘버’인 270명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3개 주에서 모두 패했다면, 확보 가능한 선거인단 수는 268명에 그친다. 해리스 부통령이 이들 3개 주에서 모두 승리했다면, 총득표수에서 뒤지고도 대통령에 당선될 수 있었다는 뜻이다. 앞서 2016년 대선 때 트럼프 전 대통령도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에게 총투표수에서 300만 표가량 뒤지고도 확보 선거인단(304 대 227)에서 격차를 벌리면서 당선된 바 있다. 다른 세상은 충분히 가능했다.
“노동자 버린 민주당을 노동자가 버렸다”
해리스 부통령은 왜 판세를 뒤집지 못했을까? 온갖 분석이 오랜 기간 쏟아질 터다. 미국 진보파의 상징 격인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은 “노동자를 버린 민주당이 노동자한테 버림받은 것은 놀랄 일도 아니다”라고 짚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 버클리 캘리포니아주립대 교수도 비슷한 생각이다. 그는 11월13일 소셜미디어에 올린 장문의 글에서 상황을 이렇게 풀었다.
“2015년 가을, 갈수록 변해가는 노동과 노동자의 삶에 대한 연구를 위해 미시간·위스콘신·펜실베이니아 등 7개 주를 방문했다. 1990년대 노동부 장관 재직 시절 처음 만났던 많은 사람을 다시 만나 얘기를 나눴다. 상당수는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친구와 성년이 된 자녀를 데리고 왔다. 그러다보니 대화가 일종의 ‘포커스 그룹’ 심층면접 같은 형식이 됐다. 내가 방문했던 지역 모두 한때 경제적으로 번성했으나, 이제는 쇠락한 지역이었다.
1990년대 만난 사람들은 삶이 예전만 못하다고 실망감을 표출했다. 2015년에 그 실망감은 분노로 바뀌어 있었다. 고용주와 연방정부, 월스트리트의 금융자본에 분노했고, 은퇴 이후를 대비해 충분한 저축을 하지 못한 자신에 대해 분노했다. 만성적인 고용 불안에 분노했고, 자신들이 젊었을 때보다 오히려 나빠진 자녀들의 처지에 분노했다. 부동산 가격 폭등으로 내 집 마련이 사실상 불가능해진 현실에 분노했고, 지역 학교가 낙후한 데 분노했고,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로 치솟은 물가에 분노했다. 상당수는 2008년 금융위기와 뒤이은 경기침체로 일자리를 잃었고, 저축은 바닥났고, 살던 집까지 잃은 경험이 있었다. 2015년 무렵까지 대부분 새 일자리를 구했지만, 구매력 측면에서 보면 임금은 20여 년 전보다 열악했다.
일부는 극우 성향의 티파티에 가담한 적이 있고, 월스트리트 점령(오큐파이) 운동에 참여한 사람도 있었다. 민주당 지지자, 공화당 지지자, 무당파층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은 정치에 그리 관심이 없다고 말했다. 인종적으로도 백인·흑인·라틴계 등이 뒤섞여 있었다. 노조원도 있었고, 비조합원도 있었다. 이들의 유일한 공통점은 가계 소득이 중산층 또는 그 이하란 점이었다. 모두 생계를 꾸리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었다. 이민이나 낙태, 성소수자 권리 등에 대한 인식에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경제적 포퓰리즘’에 동조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당시 미국 경제는 고용과 성장률 측면에서 전반적으로 괜찮은 편이었다. 하지만 이들 지표는 미국인 절대다수가 느끼는 경제적 불안감과 불공평에 대한 반감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 열심히 일해도 삶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 고졸 이하 노동자들의 좌절감도 반영하지 못했다. (…) 이제 현실로 돌아와보자. 기득권 정치세력은 현실을 부정하고 있다. 그들은 트럼프의 당선을 정치적 피해망상, 외국인 혐오증, 백인 기독교 우파, 인종주의, 여성혐오 탓으로 돌리고 있다. 틀렸다. 2016년에 이어 2024년에도 트럼프는 공장이 문을 닫고 양질의 일자리가 사라져버린 지역에 사는 수백만 노동자의 표심을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2016년 대선에서 힐러리 클린턴 후보가 승리했다면, 2024년의 도널드 트럼프도 없었을 게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당선 이후 미국 진보 진영에서 “버니(샌더스)라면 이겼을 것”이란 탄식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돌아온 ‘대통령 트럼프’는 이전보다 강력해졌다. 4년의 백악관 경험은 그를 더욱 노회하게 만들었다. 주변에서 쓴소리하던 참모들은 모두 내쳤다. 충성파로 채워진 행정권력은 물 샐 틈조차 없어 보인다.
대선과 함께 치러진 총선에서 공화당은 연방 상원의 다수당 지위를 회복했다. 2024년 11월14일 현재 9개 선거구에서 여전히 개표가 진행 중인 하원에서도 공화당은 과반의석(218석)을 이미 확보했다. 2016년 첫 당선 때와 마찬가지로 의회권력이 그를 뒷받침할 것이다. 사법권력도 그의 든든한 버팀목이 돼줄 것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첫 재임 기간에 임명한 3명을 포함한 보수 성향 대법관 6명이 연방대법원에서 진보 성향 대법관 3명을 압도하고 있어서다. 거칠 게 없어 보인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당선 직후부터 발 빠르게 집권 2기를 준비하고 있다. 11월7일 공동 선거대책위원장이던 수지 와일스를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지명한 이후 각종 인선 결과를 쏟아내고 있다. ‘트럼프 2.0’ 시대를 가늠해볼 수 있는 프리즘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11월11일 톰 호먼 전 이민관세집행국(ICE) 국장 권한대행을 불법이민 문제를 총괄할 ‘국경 차르’로 지명했다. 경찰 출신으로 오랜 기간 ICE에 몸담았던 호먼 지명자는 “붙잡아 가두는 건 누구보다 잘한다”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다. 트럼프 전 대통령이 선거운동 기간 강조했던 ‘불법이민자 체포·추방’을 대대적으로 수행할 것임을 공언한 바 있다. 호먼 지명자는 트럼프 행정부 1기 때도 불법이민자 단속을 주도했는데, 미성년 자녀와 부모를 분리 수용해 인권침해 논란을 부른 바 있다.
11월12일엔 크리스티 놈 사우스다코다 주지사가 ICE의 상급기관인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지명됐다. 4선 하원의원 출신인 놈 지명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속에 2018년 사우스다코다주 사상 첫 여성 주지사로 당선됐다. 그는 하원의원 시절인 2017년 트럼프 당시 대통령이 발동한 ‘행정명령 13769호’를 적극 지지했다. 7개 무슬림 국가 국민의 미국 입국을 90일 동안 금지하고, 이들 국가 출신 난민 지원도 120일 동안 중단하는 내용이 뼈대였다.
이주민을 겨냥한 ‘광풍’이 불 조짐인데, 증시는 생뚱맞은 반응을 보이고 있다. 플로리다에 본사를 둔 다국적 구금시설 운영업체 지이오(GEO)의 주가는 대선 당일인 11월5일 15.13달러에 그쳤다.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 뒤 4거래일 만인 11월11일 이 회사 주가는 26.48달러까지 치솟았다. 같은 기간 경쟁업체인 코어시빅의 주가도 13.63달러에서 23.94달러까지 뛰었다. 불법이민자 체포 뒤 추방 때까지 구금시설 이용이 급증할 것이란 기대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11월11일 연방 환경보호청(EPA) 청장에 지명된 리 젤딘 전 하원의원은 어떤가? 그는 하원의원 시절인 2018년 4월 블룸버그 통신과 한 인터뷰에서 파리기후변화협약이 “특정 국가에만 유리하게 작용한다”며 반대 의사를 분명히 한 바 있다. 그는 EPA 청장 임명 직후 소셜미디어 엑스(X)에 이렇게 썼다. “미국 에너지 산업의 압도적 우위를 복원시키겠다. 자동차 산업을 재활성화시켜 양질의 일자리를 창출할 것이며….”
불법이민자 단속·추방도, EPA 기능 축소·약화도 미국 보수 진영의 오랜 숙원이다. 한국의 보수가 여성가족부 폐지를 원한다면, 미국의 보수가 폐지를 추진하는 건 교육부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자신의 공약집 ‘어젠다 47’에서 교육부 폐지론을 주장한 바 있다. 이유가 뭘까?
“학교가 인종과 성별, 기타 정치적 편견으로 학생들을 세뇌하는 데만 골몰하고 있다. 이제 학교는 학생들이 사회에 진출해 성공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데 다시 집중해야 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은 동영상 공약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학교가 ‘세뇌에 골몰’하게 된 건 “조 바이든과 그 추종세력이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어 자녀 교육에 대한 학부모의 권리를 내세워, 학교에서 성정체성이나 성별 전환 등과 관련한 교육을 중단하겠다고 말했다. 국가 정체성과 애국 교육, 서구 문명의 우위성을 인식할 수 있는 교육은 확대·강화할 뜻도 밝혔다. 정교분리 원칙에 따라 제한된 ‘학교에서 기도할 자유’를 복원하고, 학부모의 학교 선택권 보장 차원에서 종교학교에도 예산을 지원하겠다고 덧붙였다. 이어 연방 교육부를 폐지하고, 각 주정부가 원하는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교육정책 결정권을 이관하겠다고 강조했다.
미국 교육부는 1979년 10월 ‘연방교육부 조직법’에 따라 보건·교육·복지부에서 독립해 창설됐다. 연방정부 부서 가운데 최소 규모인 교육부는 △고도 빈곤지역 초중등 교육 지원 △장애 학생 교육비 지원 △대학생 학자금 대출 제도 관리·감독 △연방정부 예산을 지원받는 학교 내 인종·성별·성정체성 등에 따른 차별 금지 등 크게 네 가지 역할을 수행한다. 교육부 폐지를 통해 미국 보수가 무엇을 노리는지 어림해볼 수 있다.
미국 보수 진영을 대표하는 연구단체 헤리티지재단은 1980년부터 대선 때마다 ‘보수 대통령’을 위한 정책공약을 집대성해 자료집을 발간한다. 이번엔 ‘프로젝트 2025’란 이름이 붙었다. 922쪽 분량의 방대한 자료집에는 불법이민 단속도, EPA 기능 축소도, 교육부 폐지도 모두 망라돼 있다. 백악관부터 연방정부 각 부처와 외청의 기능과 역할 변경 문제까지 세밀하게 담겨 있다. 자료집 발간에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친위조직’ 격인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AFPI)가 참여했고, 트럼프 1기 때 백악관 국가무역위원장으로 대중 무역전쟁을 주도했던 피터 나바로도 50여 쪽에 이르는 ‘무역정책’ 분야를 집필했다.
헤리티지재단은 2016년 대선을 앞두고도 같은 형식의 자료집을 내놓았다. 재단 쪽은 2018년 1월23일 낸 보도자료에서 “트럼프 행정부가 집권 첫해에 채택·이행한 정책제안은 총 334개 항목 가운데 64%에 이른다”고 밝혔다. 프로젝트 2025는 새 보수 대통령의 과제로 ‘가족과 교회의 가치 복원’을 첫손에 꼽았다. ‘트럼프의 나라’에서 ‘문화전쟁’이 불을 뿜을 조짐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영상] 광화문 선 이재명 “난 죽지 않는다”…촛불 든 시민들, 이름 연호
‘58살 핵주먹’ 타이슨 판정패…30살 어린 복서는 고개 숙였다
에버랜드가 50년 공들인 ‘비밀’…베일 벗자 펼쳐진 장관 [ESC]
“어떻게 2년 반을 더”…학부모·해병·교수·노동자 이은 ‘촛불 행렬’
‘트럼프 없는 곳으로 도피?’…4억이면 4년 동안 크루즈 여행
‘10도 뚝’ 찬바람 부는 일요일…다음주 서울은 영하 추위
130쪽 이재명 판결문…법원, ‘백현동 발언’ 당선 목적· 고의성 인정
[영상] “속상해서, 정작 죄 있는 사람은 뻣뻣한데”…비 내리는 광화문 메운 시민들
‘정년이’ 김태리 출두요…여성국극, 왜 짧게 흥하고 망했나
러시아, 중국 에어쇼에서 스텔스 전투기 첫 수출 계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