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이란 명칭은 두 얼굴을 지녔다. 하나는 오랜 세월 동안 차별과 냉대, 고난과 핍박을 받은 유랑 집단. 20세기 전반 독일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는 유대인 수난사의 비극적 정점이었다. 다른 하나는, 모진 핍박에도 종교적 선민의식과 민족적 정체성을 잃지 않은 불굴의 혈통.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한 뒤 1948년 팔레스타인 땅에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세워진 것은 구약성경에 기록된 신탁의 완성이었다.
이스라엘 건국의 아버지들은 시오니즘(유대민족주의)에 사상적 뿌리를 댔다. 이들은 ‘유대인 국가’ 건설을 명확히 했지만, 그렇다고 종교국가를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 그래도 멀리는 고대 이집트의 통치 이래 수천 년 동안 디아스포라(이산 민족)로 살아오면서도 종교적 믿음과 전통, 강력한 혈통주의를 고수해온 초정통파 유대교 집단과 후손의 입김은 무시할 수 없었다. 종교주의(신정일치)와 세속주의(정교분리)의 갈등은 이스라엘이 아직도 국가 정체성을 규정한 헌법을 만들지 못한 이유다. 그 대신 대통령, 의회, 행정부, 사법부, 영토, 군대, 감사원, 경제, 선거, 인간의 존엄과 자유, 예루살렘의 지위, 팔레스타인과의 관계 등 13개 ‘기본법’이 최고법 구실을 한다. 대법원은 기본법에 어긋나는 법령을 무효화하는 방식으로 일반법에 대한 기본법 우위 원칙을 확립했다.
2023년 새해 벽두부터 이스라엘은 극심한 정치 갈등과 사회 혼란에 빠져들었다. 2022년 12월 베냐민 네타냐후(73) 총리가 여섯 번째 임기를 시작하면서다. 그 한 달 전 총선에서 네타냐후가 이끄는 리쿠드당은 크네세트(이스라엘 의회, 전체 120석)의 과반 확보에 실패했지만, 극우 종교 정당들을 끌어들여 의석수 64개로 연립정부 구성에 성공했다. 네타냐후는 1996~1999년과 2009~2021년 재임에 이어, 이스라엘 역사상 최장수 총리라는 기록을 또다시 경신했다.
네타냐후 연정에는 초정통파 유대교 정파 연합인 ‘독실한 시오니즘’, 토라유대주의연합, 샤스 등 극우 종교 색채가 짙은 정치세력이 대거 참여했다. 리쿠드당 의원이자 노골적인 유대인 우월주의자인 야리브 레빈이 법무장관, ‘종교적 시오니즘당’의 베잘렐 스모트리히 대표가 재무장관, 같은 당의 이타마르 벤그비르 의원이 국가안보장관, 샤스당의 아리예 데리 대표가 부총리 겸 내무·보건장관(겸임)으로 입각했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극우 성향의 정권이 꾸려진 것이다.
네타냐후 정권은 출범 초기부터 ‘사법개혁’을 비롯해 여러 분야에서 극우 성향 정책을 밀어붙이고 있다. 연정 구성 직후인 2023년 1월4일, 크네세트 법제사법위원회는 기본법 조항 3개의 개정안 독회를 열었다. 야리브 레빈 법무장관과 심카 로스만 의원(종교적 시오니즘당)이 주도한 독회의 명칭은 ‘시온이 정의와 함께 실현될 것-사법시스템에 정의 되찾기’였다. 말이 사법개혁이지 내용을 보면 사법부를 무력화하고 의회와 행정부의 권한을 대폭 강화한 ‘사법 개악’에 가깝다.
첫째 개정안은 정부 정책에 대한 법무장관의 법률 자문에 법적 구속력을 없애고 정부가 자체적으로 법 해석권을 행사하도록 했다. 다른 두 개정안에는 의회에 대법원 결정을 뒤집는 권한 부여, 대법원의 법령 무효화 기능 제한, 대법원의 정부 각료 임명 철회 명령의 무력화 같은 내용이 담겼다. 사법부에 대한 행정부의 일방적 우위와 통제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려는 시도다. 현지 일간 <예루살렘 포스트>는 “여론의 반발이 클 경우 개정안 일부를 바꾸거나 삭제해 신속한 입법을 할 수도 있지만 결국은 여론의 광장에서 장기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스라엘 사법부는 그동안 기본법을 토대로 세속주의 원칙과 보편적 인권을 지키는 보루 구실을 했다. 하레디(초정통파 유대인)의 병역면제 특권 취소, 안식일에 경제활동 허용, 성소수자(LGBTQ) 권리 인정, 팔레스타인 땅 몰수와 유대인 정착촌 건설 금지, 불법 정착촌이 이미 지어진 팔레스타인 영토의 합병을 규정한 법률의 무효화 등이 대표적이다. 네타냐후 연정에 참여한 초정통파 유대 정당들에 법원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다.
행정부 최고위직인 총리와 부총리의 범죄 혐의와 전과도 극우 연정이 사법개혁을 강행하는 한 배경이다. 네타냐후 총리는 재임 중 끊임없이 ‘부패’ 추문에 휩싸였고, 2019년에는 이스라엘 역사상 현직 총리로는 처음으로 뇌물수수, 사기, 배임 등의 혐의로 정식 기소됐다. 네타냐후는 총리직 연임으로 수사와 재판을 피해왔다. 유대교 정당 샤스 대표로 입각한 아리예 데리 부총리도 수뢰와 탈세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은 전력이 있다. 2023년 1월 대법원은 데리 대표의 장관 입각은 부당하다며 그의 임명 취소를 결정했다.
네타냐후 연정이 추진하는 극우 정책의 또 다른 축은 ‘팔레스타인 축출’이다. 이스라엘 정부는 최근 두 달 새에만 팔레스타인 자치령인 동예루살렘의 공공장소에 팔레스타인 국기 게양 금지, 불법 유대인 정착촌 확대 강행, 팔레스타인 ‘테러 용의자’의 시민권 박탈과 추방 등의 법령을 잇달아 공표했다. 특히 유대인 정착촌 확대에 더 속도가 붙고 있다. 2월13일 이스라엘 정부는 요르단강 서안지구 전역에 ‘아웃포스트'(Outpost·전초기지)라 부르는 정착촌 9곳을 합법화하고, 약 7100채의 주택 신축을 인가했다.
그뿐 아니라 팔레스타인이 미래 국가의 수도로 여기는 동예루살렘에서 무허가 주택을 철거하는 ‘질서 회복' 명령을 공표했다. 동예루살렘에서 유대인 정착민의 주택 신축은 자유롭지만 팔레스타인 주민이 건축허가를 받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어쩔 수 없이 ‘불법 건축물’에 살아야 하는 팔레스타인 주민들은 불도저에 삶터가 파괴돼 쫓겨나기 일쑤다. 1967년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 가자지구 등 팔레스타인 영토를 점령한 이래 동예루살렘에서만 유대인 정착민 집이 5만8천 채 지어졌으나 팔레스타인 주택은 단 600채뿐이라는 집계도 있다.
최근 미국 시사주간 <네이션>은 이스라엘에서 팔레스타인의 권익과 공존 운동에 힘써온 이스라엘 언론인 2명의 기사를 실었다. 이들은 “새 정부가 의회 과반을 차지한 총선 결과를 사회적 균형을 바꿔놓을 일생일대의 기회로 여기는 건 이상할 게 없다”며, “연정이 추진하려는 반자유주의적 엄호사격”의 정책 목록을 폭로했다. 요르단강 서안 점령의 불가역적 고착화, 율법학자(랍비)의 권한 확대, 아프리카 난민 추방, 공영방송 폐쇄와 미디어 지형 개편, 교육시스템 재편, 노동조합 축소 등이 담겼다. 잡지는 “그중에도 가장 위험하고 파장이 큰 것은 크네세트에서 팔레스타인계 정당을 불법화하려는 계획”이라며, “그럴 경우 이스라엘 시민권자의 20%가 투표권을 박탈당하고 극우세력의 영구집권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2023년 들어 이스라엘에선 주말마다 시민 수만 명이 네타냐후 정부의 사법개혁과 팔레스타인 정책에 반발하는 시위를 벌인다. 시위에는 야당과 좌파 그룹뿐 아니라 정치적 중도파, 기업인, 심지어 연정 지지자도 참여하고 있다. 또 요르단강 서안의 팔레스타인 자치지구에선 아랍계 주민과 이스라엘 군경 및 주민의 유혈충돌과 보복으로 사망자가 속출하고 있다.
이스라엘 극우 정권의 막무가내 행보와 거센 역풍은 법의 본질과 역할, 나아가 한국의 정치 상황에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꼭 1년 전인 2022년 3월, 한국 대선에서 전직 검찰총장이 0.73%포인트 박빙의 차이로 승리하면서 건국 이래 처음 ‘검찰 정권’이 들어섰다. 정치가 사라진 자리에 사법이 횡행한다. 법은 유용하고도 위험한 양날의 칼이다. 생명과 인권을 보호하는 도구가 될 수도, 파괴와 죽음을 부르는 흉기가 될 수도 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법인류학자이자 법사회학연구센터 소장인 퍼난다 피리 교수는 저서 <법, 문명의 지도>(이영호 옮김, 아르테 펴냄, 2022)에서 이렇게 갈파했다.
“법은 사회적 비전을 구체적이고 명시적으로 만들어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한다. 왕·종교·엘리트·공동체·국가의 약속일 수도 있고, 그들이 정당한 권력을 추구하는 수단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명시적으로 표현되면, 그 비전은 고유한 생명력을 갖는다. 법이 권력의 도구이자 이에 저항하는 수단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강압적인 통치자는 법을 자기 뜻에 따르게 하고,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며,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하는 데 사용한다. 그러나 대다수 사람은 법적 구조와 절차에 접근하고 말할 수 있는 한 규칙을 인용하고, 결국 통치자들로부터 자신의 법을 되돌릴 수 있다. (…) 독재자들은 규칙서를 찢을 수 있지만, 눈에 띄지 않게 그럴 수는 없다. 모호함, 부정확함, 비밀주의는 독재자, 마피아 두목, 폭군의 도구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조일준 선임기자가 지구촌 곳곳에서 벌어지는 현안들의 역사적 맥락과 관련 지식, 그에 얽힌 사람들 이야기를 4주에 한 차례씩 연재합니다. 호모 미그란스는 ‘더 나은 삶을 찾아 이주하는 인간’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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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아스포라가 낳은 디아스포라제1차 세계대전 때 고전하던 영국 정부는 유대계 금융자산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재정 지원을 받기 위해 종전 뒤 ‘유대 민족국가 건설을 지지하겠다’는 밀약(1917년 밸푸어선언)을 맺었다. 전쟁의 결과는 엄청난 지정학적 격변을 낳았다. 600년 넘게 존속해온 오스만제국(오늘날 튀르키예의 전신)은 패배한 뒤 해체됐다. 지중해 동부 아나톨리아와 팔레스타인, 아라비아반도 서해안의 제국 영토는 승전국 영국과 프랑스가 차지했다. 두 열강은 일정 기간 해당 영토에 위임통치를 한 뒤 레바논, 시리아, 트랜스요르단(오늘날 요르단의 전신), 이라크 등 신생 아랍국가의 수립에 깊숙이 관여했다. 현대 중동의 판세가 이때 짜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나치 독일의 패배로 끝난 뒤 팔레스타인 땅에는 유엔 결의를 근거로 유대인 국가 이스라엘이 들어섰다. 1948년 5월14일, 유대 민족이 구약성경 빼고는 아무런 근거가 없는 ‘약속의 땅’에 나라를 세운 것이다. 팔레스타인에는 동예루살렘과 요르단강 서안에 자치 영토가 주어졌다. 유대인에게는 수천 년 디아스포라(이산민족)의 설움을 끝낸 축제였지만, 팔레스타인 사람에게는 문자 그대로 ‘나크바’(재앙)였다. 팔레스타인 선주민 70만 명이 졸지에 땅과 집을 빼앗기고 추방됐다. 이번에는 그 후손이 주변 아랍국가들에서 거대한 디아스포라 집단이 됐다. 유엔 팔레스타인난민구호기구(UNRWA)에 따르면, 2021년 기준 팔레스타인 난민은 560만 명에 이른다.
이스라엘 건국은 7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지속하는 팔레스타인과의 갈등과 중동분쟁의 화약고에 불을 댕겼다. 이집트를 주축으로 한 주변 아랍국가들은 이스라엘의 건국 선포 다음날 수도 텔아비브를 폭격했다. 제1차 중동전쟁이다. 이후 1973년까지 이스라엘과 아랍국가들은 모두 네 차례 전쟁을 치렀다. 특히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이집트령 시나이반도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 시리아령 골란고원, 요르단령 요르단강 서안을 점령하는 대승을 거뒀다. 이 중 시나이반도만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으로 이집트에 반환됐을 뿐, 나머지는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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