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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성인·본성인·대만인…‘아시아 고아’의 과거

미-중 무역전쟁 와중에 대만 방문한 펠로시… 중국과 대만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역사
등록 2022-08-27 06:25 수정 2022-08-29 00:15
2013년 5월8일 덩리쥔(등려군)이 숨진 지 18년째 되는 날을 맞아, 전세계에서 모인 팬들이 무덤에 선물을 놓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2013년 5월8일 덩리쥔(등려군)이 숨진 지 18년째 되는 날을 맞아, 전세계에서 모인 팬들이 무덤에 선물을 놓고 있다. 신화 연합뉴스

동갑내기 학부모 푸메이 부부는 둘 다 대만인이다. 아이들이 어릴 때 사업 확장을 위해 대륙의 수도 베이징으로 이주해 10여 년을 살았다. 사업은 별 탈 없이 상승세를 이어갔지만, 아이들이 자라면서 교육이 가장 큰 난제로 등장했다. 대만 아이들이 중국에서 학교를 다니려면 중국 정부의 ‘하나의 중국’ 정책상 ‘대만 동포’ 신분으로 학교를 다녀야 한다. 홍콩과 마카오를 비롯해 아직 통일되지 않은 대만의 동포도 중국법상 모두 ‘중국인’에 해당하기에, 그들의 자녀는 중국에 사는 외국인 자녀가 다니는 국제학교 입학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대만 동포’ 자격으로 중국 공립학교를 다녀야 한다.

하지만 푸메이 부부는 애초 아이들에게 중국식 교육을 하고 싶지 않았다. 초등학교는 그나마 중국 국적 아이들도 입학이 가능한 몇몇 중·영 쌍어(중국어와 영어를 함께 사용하는) 학교에 보낼 수 있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 큰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갈 나이가 되면서 본격적인 교육문제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중국 현지 공립학교를 제외하고는 ‘받아주는’ 국제학교가 없었다. 2016년 민주진보당(민진당)의 차이잉원이 대만 총통에 당선된 뒤 양안 관계가 갈수록 악화하자 그동안 ‘모른 체하며’ 받아주던 쌍어 국제학교들도 죄다 입학을 거절했다. 갈 수 있는 학교는 ‘대만 동포’ 자격으로 허용되는 중국 공립학교뿐이었다. 많은 고민 끝에 푸메이 부부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중국 철수’를 결정하고 고향 대만으로 돌아갔다.

중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만난 푸메이 부부에게 “우리 아들도 중국 공립학교에 다니는데 마음을 비우면 그럭저럭 다닐 만하다”고 말하며 중국과 ‘헤어질 결심’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라고 설득했지만 그들의 입장은 단호했다. “우리는 대만인이고 아이들도 대만인이다. 그런데 왜 우리 아이들이 중국식 교육을 받아야 하는가?” 그들은 그렇게 10년 이상 정착했던 베이징을 떠났다. 이유는 오직 하나, ‘대만인’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서.

1990년대까지 ‘본성인’이 대만인

1995년 5월8일, 타이 치앙마이에서 42살의 덩리쥔(등려군)이 급사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 덩리쥔의 고향인 대만은 충격에 빠졌다. 당시 덩리쥔은 아시아 가수로는 거의 유일하게 ‘세계적인’ 슈퍼스타였다. 우리나라에는 영화 <첨밀밀> 개봉 이후 뒤늦게 알려졌지만 당시 동남아시아와 일본, 미국 그리고 유럽 등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현 중국 국가주석 시진핑도 자신이 젊은 시절에는 매일 덩리쥔의 노래만 들었다고 고백했을 정도로 그의 인기는 중국 대륙에서도 뜨거웠다. 하지만 중국에서는 덩리쥔의 노래를 ‘정신오염’이라는 이유로 1983년까지 합법적인 유통을 금지했다.

당시 중국 정부가 덩리쥔의 노래를 금지한 가장 중요한 ‘정신오염’적 요소는 그의 노래와 그가 지향하는 ‘정체성’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덩리쥔이 생각한 가장 이상적인 ‘하나의 중국’은 대만 국민당이 통치하는 과거 ‘중화민국’으로의 수복이었다. 덩리쥔의 부모는 각각 중국 허베이와 산둥성 출신의 대륙인으로,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배한 국민당 군대를 따라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이었다.

외성인은 제2차 세계대전 뒤 대만이 약 50년간의 일본 식민통치(1895년 중국은 청일전쟁 패배 뒤 시모노세키조약으로 대만을 일본에 넘겨줌)에서 해방된 뒤, 주로 중국 대륙 등에서 대만으로 새로 이주한 사람을 부르는 말이다. 이에 반해 ‘본성인’은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줄곧 대만에서 나고 살아왔던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일반적으로 1990년대까지 대만에서는 본성인이 곧 ‘대만인’과 같은 의미로 쓰였다.

본성인은 다시 한족 계통 본성인(주로 민난어를 쓰는 푸젠성 출신과 객가어를 쓰는 객가인)과 토종 원주민 계통 본성인으로 나뉜다. 대만 원주민은 대만이 1685년 무렵 중국 청나라에 정식으로 복속되기 전부터 대만에 살던 토착민이다. 현 차이잉원 총통의 부모는 모두 민난어를 쓰는 한족 계통 본성인이지만, 그의 할머니는 파이완족이라고 부르는 고산족 계열 원주민이다. 이런 ‘출신성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차이잉원은 2016년 총통 재임 뒤 지금까지 줄곧 자신을 ‘중국인’이라고 하기보다는 ‘대만인’이라고 강조했다.

덩리쥔은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의 자녀였고, 1995년 숨질 때 그의 관에 대만 국기와 국민당 당기가 덮인 채 장례식이 이뤄졌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덩리쥔은 대만으로 이주한 외성인의 자녀였고, 1995년 숨질 때 그의 관에 대만 국기와 국민당 당기가 덮인 채 장례식이 이뤄졌다. 유튜브 영상 갈무리

“국민당은 점령군”이라는 인식

1995년 5월8일 치앙마이에서 급사한 덩리쥔의 유해는 고향 대만으로 돌아왔고 5월28일 타이베이에서는 유례없이 성대한 ‘정치적 장례’가 치러졌다. 그의 장례식에는 대만의 정치, 경제, 군사 등 모든 분야의 요인이 총집결했다. 덩리쥔의 유해를 덮은 관 위로 국민당 당기와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홍기’가 덮였다. 그는 죽어서 대만의 민족의식을 고취한 ‘애국 예인’으로 추서됐다.

그해 12월에는 우리나라 국회의원선거와 같은 대만 ‘입법위원’ 선거가 예정됐고 다음해인 1996년 3월에는 대만 역사상 최초의 직선제 총통 선거가 치러질 계획이었다. 당시 총통은 1988년 숨진 (장제스의 아들) 장징궈를 계승한 리덩후이였다. 리덩후이는 덩리쥔의 장례식을 여러 정치적 목적에 활용했다. 그는 외성인 출신인 덩리쥔의 명성과 인기를 활용해, 국민당 내에서 본성인 출신이라는 자신의 정치적 약점을 극복하고 대만 최초의 직선제 총통이 되려 했다. 계획대로 그는 총통이 됐다.

리덩후이는 1923년 일본 식민지 시절 객가인 출신 아버지와 푸젠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본성인으로, 대만 정치사상 최초의 본성인 출신 총통이다. 리덩후이는 “지금까지 대만의 모든 정치권력은 다 외래에서 온 사람들이 장악했다. 국민당 역시 외래 정권이다. 그들은 대만인을 통치하기 위해 대만에 온 사람들이다”라고 발언하며 ‘대만인에 의한 대만 통치’ 논쟁에 불을 붙였다. 그는 대만과 대만인의 정체성을 재정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덩후이 같은 대만 본성인들은 1947년 ‘2·28 사건’을 계기로 대만을 통치하던 국민당 정권을 자신들의 진정한 통치자가 아니라 ‘점령군’으로 인식하게 됐다.

2·28 사건이란 1947년 2월27일 본성인 청년이 숨진 사건에서 시작된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이다. 타이베이에서 당시 불법으로 정부 전매제품인 담배를 몰래 팔던 한 노점상 여인이 단속반원들에게 폭행당하자 주변 시민들이 과잉 단속에 항의하던 과정에서 무고한 한 청년이 숨졌다. 다음날 분노한 타이베이 시민들이 대규모 항의시위를 벌였고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국민당 당국은 계엄령을 내린다. 이는 대만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대량학살 사건으로 이어진다. 이 사건은 1987년 계엄령 해제 전까지 대만 사회에서 언급이 금지됐다.

대만과 대만인의 슬픈 역사를 가장 잘 보여줬다고 평가받는 허우샤오셴 감독의 영화 <비정성시>에도 ‘2·28 사건’을 전후해서 대만 본성인이 대륙에서 온 외성인 점령자에게 느끼는 분노와 실망, 울분이 잘 묘사돼 있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 가족의 맏형은 이렇게 한탄한다. “우리 대만인이 제일 불쌍해. 일본인과 대륙인에게 차례로 괴롭힘을 당하니 말이야.” 1945년 일본 패전으로 대만을 돌려받은 국민당 정부는 ‘조국의 품에 안겼다’고 좋아하는 대만인을 ‘상상 이상으로’ 억압하고 탄압했다. 당시 대만 본성인들은 일본 식민지 시절이 더 좋았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들은 ‘일본 개가 물러가니 중국 돼지들이 몰려왔다’는 말을 은밀하게 퍼뜨리며 새로운 ‘점령자’로 등장한 국민당 정부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공유했다.

1997년 반환 이후 망가져간 홍콩을 보면서

장징궈는 본성인과 외성인 간의 갈등을 종식하기 위해 리덩후이 같은 본성인 출신 엘리트를 정계로 발탁했고, 1987년에는 38년간 지속된 계엄령을 해제하는 등 각종 민주화 조처를 하며 대만 정치의 본토화를 추진했다. 1987년 7월27일, 대만 본성인 출신 원로들을 초청한 만찬 자리에서 장징궈는 “나는 대만에서 이미 40년을 살아왔다. 나는 이미 대만인이 됐다”고 연설했다. ‘대만(본성)인’들의 민심을 얻지 못하면 대만 정치가 안정될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장징궈의 유화정책에 힘입어 본성인 출신으로는 최초로 국민당 총통이 되고 대만 민주화 시대를 열었던 리덩후이는 1995년 덩리쥔의 장례식이 끝난 며칠 뒤인 6월7일, 미국의 모교 코넬대학을 ‘개인 자격’으로 방문했다. 코넬대학 방문 연설에서 무려 17차례나 ‘대만 중화민국’을 언급한 것에서 드러나듯, 리덩후이는 대만의 정치적 실체를 국제사회에 알리고 인정받기 위해, 이른바 대만 문제의 ‘국제화’를 공공연히 모색했다.

현 총통인 차이잉원도 리덩후이가 발탁한 ‘대만인’ 정치인이다. 리덩후이의 뒤를 이어 2000년에 본성인 출신으로는 두 번째 총통이 된 민진당의 천수이볜과 역시 민진당 출신인 현 총통 차이잉원은 대만 정치의 ‘탈중국화’를 선언했고, 대대적인 교육과정 개편으로 ‘중국인 정체성’ 교육이 아니라 ‘대만과 대만인의 정체성’을 가르치는 교육을 강화했다. 굳이 이런 교육정책 변화가 아니더라도 1990년대 이후 민주화 물결을 타고 등장한 대만의 새로운 세대는 더 이상 본성인이냐 외성인이냐로 자신의 정체성을 규정하지 않고 ‘나는 대만인이다’라고 당당하게 외쳤다.

얼마 전 대만 정치대학 선거연구센터는 대만인의 정체성에 관한 설문조사를 했다. 응답자의 약 64%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중국인이 아니라 ‘대만인’으로 여긴다는 결과가 나왔다. 2.5% 정도만이 자신의 정체성을 ‘중국인’이라고 응답했다. 30.4%는 ‘대만인과 중국인 양쪽 정체성을 갖는다’고 응답했다. 1992년 같은 설문조사에선 약 18%가 자신의 정체성을 ‘대만인’이라고 응답했다. 참고로 2012년에는 54%였다.

무엇이 그들을 ‘나는 대만인’이라고 응답하게 했을까. 언젠가는 ‘하나의 중국’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고 여겨왔던 수많은 대만인은 1997년 중국 회귀 이후 ‘망가져가는’ 홍콩을 보면서, 1945년 해방 뒤 일본 대신 새로운 점령자로 등장한 국민당 정권 계엄령하의 ‘백색공포 통치’ 시절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1983년 대만의 유명 가수 뤄다유는 <아시아의 고아>라는 노래를 발표했다. 당시 유엔에서도 쫓겨나고 모든 나라가 대만과의 단교를 선언하면서 졸지에 ‘아시아의 고아’ 신세가 된 대만의 상황에 대한 노래다. “아시아의 고아가 바람 속에서 울고 있다네. 노란 얼굴에는 붉은 흙탕물이 묻어 있고, 검은 눈동자에는 하얀 공포가 어려 있다네…. 아무도 너와 놀아주려 하지 않는다네….”

‘아시아의 고아’와 놀러 온 미 펠로시

2022년 8월2일, 미국 하원의장 낸시 펠로시가 ‘영원한 친구 대만과의 우정을 위해’ 그리고 ‘민주주의와 독재의 투쟁에서 대만을 지지하기 위해’ 25년 만에 미국 고위급 인사로는 처음으로 다시 대만을 방문했다. 미국은 자신들이 ‘아시아의 고아’ 신세로 만들었던 대만과 우정을 회복하고 ‘놀아주기 위해’ 찾아온 것일까. 미국이 지키려는 것은 ‘대만과 대만인’일까, 아니면 대만에 대한 ‘정치경제적 이해관계’일까.

뤄다유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사람들은 고아가 아끼는 장난감을 가지려 한다네. 그리고 묻는다네. 아가야, 넌 왜 우니….”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북경만보는 베이징에 거주하는 박현숙씨가 중국의 숨은 또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사고를 읽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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