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법상 명예훼손죄는 오늘날처럼 ‘표현의 자유’가 권리가 아니었던 지나간 시대의 범죄다. 여전히 언론을 제한하는 다른 나라들에 영국은 본보기가 될 것이다.”
2010년, 영국 법무부 장관은 ‘명예훼손죄’ 폐지를 선언하며 이렇게 말했다. ‘본보기’라는 그의 말은 과장이 아니다. 영국은 ‘명예훼손죄의 수도’라 불렸다. 명예를 지키려고 결투나 보복을 하는 사람들을 막기 위해 13세기에 명예훼손법을 제정한 뒤, 진실이든 거짓이든 다른 사람의 명예를 침해한 행위를 형사처벌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0년 전부터는 국가가 명예훼손죄를 묻지 않는다.
‘표현의 자유 수도’라는 명성답게 미국도 명예훼손죄가 사실상 없다. 극소수 주에서 ‘허위사실 명예훼손죄’를 두고 있지만, 검찰이 기소하는 사례는 거의 없다. 대신 징벌적 손해배상 소송이 활용된다. 사람의 명예(평판) 보호가 아니라 사생활의 비밀 보호(프라이버시권)를 위한 장치다. 이때도 정치인 등 공인의 공적 사안에 대해서는 손해배상 범위를 크게 제한해 표현과 언론의 자유, 알 권리를 최대한 보장한다.
박경신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사실상 명예훼손죄 자체가 없는 영미 중에서도 영국을 한국이 가야 할 길로 본다. “영국이 가장 선진적이다. 명예훼손 형사처벌을 폐지했고 진실적시 명예훼손죄에 대해선 민형사 책임이 모두 없다. 또 (인격권 보호를 위한) 개인정보보호법도 표현의 자유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다양한 조항을 두고 있다.”
명예훼손적 표현이 허위사실일 때만 법으로 규제하는 국가들도 있다. 독일은 명예훼손죄를 형사처벌하지만 진실한 사실임을 증명하면 책임을 없애준다. 다만 사실이든 진실이든, 타인이 모욕적인 감정을 느꼈다면 모욕죄가 인정된다.
일본은 한국과 비슷하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을 범죄로 규정하되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라는 공익성이 인정되면 처벌하지 않는다. 그러나 법 적용에는 차이가 있다. 일본은 진실한 사실을 표현하는 자체에 공익적 목적이 있다고 전제한다. 또 명예훼손죄를 친고죄로 뒀다. 그래도 개인이 직접 명예훼손죄를 묻겠다고 누군가를 고소하면 그때부터 사실의 진실성을 따져 유무죄를 가린다. 개인이든 법인이든 누구나 명예훼손죄로 다른 사람을 고소·고발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수사가 시작되면 진실성과 공익성을 하나하나 따져나가는 한국과는 다르다.
윤해성 한국형사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의 의견이다. “제일 좋은 안은 독일식이다. 우리는 대륙법을 따르고 있어 영미법으로 가기는 어렵다. (사실적시 명예훼손죄가 없는) 독일식으로 한번에 가는 게 어렵다면 일본처럼 (그 조항을) 존치는 하되 (실질적으로) 한국보다는 표현의 자유를 굉장히 넓게 보장하는 식으로 가야 한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
*표지이야기-'사실적시 명예훼손'의 운명은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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