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고개 숙이고 눈물만 흘린 2020년은 아니었다. 우리 삶을 더 높고 밝은 곳으로 밀어올리기 위한 싸움 또한 지속됐다. 장애나 성적 지향, 정치 성향, 종교 등을 이유로 한 어떤 차별도 허용하지 말자며 ‘차별금지법’을, 노동자가 일터에서 죽지 않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게 하자며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을 도입하려는 시민들의 움직임이 활발했다. 여성을 무자비한 착취 대상으로 삼은 ‘텔레그램 n번방’ 사건의 범인들을 사법의 심판대에 올렸다.
고난과 희망이 교차한 2020년, <한겨레21> 독자에게 생생한 정보를 전한 취재원과 필자 19명이 ‘올해의 하루’를 일기 형식으로 보내왔다. _편집자주
멕시코라고 해서 전세계적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2월28일에 첫 확진자가 보고되더니 확진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한 달 만에 2단계 경보를 발령했고, 3월31일부로 필수 업종을 제외한 전 업종은 재택근무를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한발 늦게 찾아간 슈퍼마켓에는 마스크, 세정제와 식료품이 동났다. 알음알음으로 비싼 값에 마스크를 살 수밖에 없었다.
내가 운영하는 법무법인도 2020년 4월1일 재택근무를 시행했다. 정부 명령도 명령이지만 직원들 불안이 극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재택근무를 결정하면서 나는 ‘아니야, 이건 현실이 아니야, 만우절 거짓말이야’라는 말을 되뇌었다. 직원들과는 주 3일 근무, 80% 급여 지급을 합의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11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나도 신기하게 같은 장소, 같은 날에, 같은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2009년 3월 말 멕시코에서 신종플루A(돼지독감, H1N1바이러스)가 세계 최초로 발생했을 때, 나는 공기업 주재원 신분으로 멕시코에 있었다. 독감에 걸린 줄 알았던 가족과 친구가 갑자기 숨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초기 대응이 부실해서 확진자와 사망자가 늘어났다고, 부실한 사회안전망을 비판하는 기사가 넘쳐났다. 당시 뚱뚱한 정부 관료들을 빗대어 돼지독감의 원흉이라는 블랙유머도 유행했다.
치료제로 알려진 타미플루를 구하는 게 현실 권력의 상징이 됐다. 부랴부랴 간편식, 마스크, 세정제를 사러 간 슈퍼마켓의 긴 줄과 동난 식품점 코너는 우리 가족을 다시 한 번 절망케 했다. 돼지독감이라는 단어에서 주는 상징성과 혐오감이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이 멕시코에서 실현되는 게 아닌가 하는 끔찍한 상상을 하게 했다. 그날도 만우절이었다.
일본 주재원들은 대부분 본사로 복귀했다. 하지만 독종 같은 한국 주재원들은 가족만 한국에 보내고 꿋꿋이 버티면서 남았다. 지금 생각하면 매우 위험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나는 매일 우리 기업 감염자 발생 상황을 종합해 대사관과 본사에 보고하는 일을 했다. 다행히 본사에서 타미플루가 파우치를 통해 도착했다. 정말 심각한 일이 있을 때만 사용하라는 명령과 함께 일주일 치 분량을 받았다.
11년이 지난 지금 나는 여전히 멕시코에 있다. 신분이 주재원에서 동포 변호사로 바뀌었을 뿐이다. 상황은 그때보다 더 심각하다. 치료제도 없다. 치명률은 높아졌다. 11년간 개선됐어야 할 사회안전망은 여전히 허술하다. 교민과 주재원은 많고, 확진자와 사망자는 늘어난다. 확진자 중에는 멕시코 병원을 믿지 못해 해열제를 먹고 한국행 비행기를 타는 사람도 적지 않다. 한국 뉴스에 멕시코에서 온 확진자의 나이와 지역 이름이 나오면 대충 짐작이 가는 이도 있다.
나에게는 2009년 4월1일과 2020년 4월1일이 마치 11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어제와 오늘의 일처럼 느껴진다. 이런 기막힌 우연이 또 있을까.
멕시코시티(멕시코)=엄기웅 문두스아페르투스 법무법인 대표 변호사
*엄기웅 변호사는 통권 제1315·1316호 표지이야기 ‘코로나 뉴노멀’에 멕시코 현지 소식을 다룬 글 ‘“코로나19 일부러 퍼뜨린다”는 괴소문’을 기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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