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7일 저녁, 흰색 정장을 입은 카멀라 해리스가 조 바이든 대통령 당선자의 승리 선언에 앞서 단상에 올랐다. 최초의 여성 유색인종 부통령이자, 여성으로서 미국 역사상 최고위직에 오른 그가 입은 흰색 정장의 의미는 분명했다.
미국 정치에서 여성의 흰색 옷은 상징적이다. 힐러리 클린턴은 201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을 할 때 여성인권 투쟁의 상징으로 흰색 정장을 입었다. 2020년 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국회 연두교서를 발표할 때, 민주당 여성 의원들은 여성 참정권 10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흰색 정장을 입었다. 민주주의의 교과서라는 미국에서조차 여성은 1920년에야 투표할 권리를 가졌다. 1870년 수정헌법 제15조를 통해 흑인 남성에게 처음 투표권이 부여된 것에 견줘, 미국 여성들은 더 오랜 시간을 힘들게 투쟁해야 했다. 당시 여성들이 입은 흰색 옷은 ‘온건하고 순수한 투쟁’을 상징했다. 미국 여성 참정권 100주년인 2020년, 해리스의 미국 부통령 선출은 그동안 미국 여성들 머리 위에 있던 유리천장을 시원하게 깨뜨린 상징적인 사건이다.
해리스 이전에도 주목받았던 여성 정치인은 많다. 특히 지난 대선에서 총득표수에서 트럼프 후보를 이겼음에도 선거인단 득표에서 석패한 힐러리 클린턴은 미국 여성 정치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힐러리는 대통령 후보일 때 이미 상원의원과 국무부 장관, 게다가 전직 대통령의 부인으로서 오랜 기간 정계에 몸담은 노회한 정치인 이미지가 있었다. 이에 견줘 해리스는 중앙 정치 무대에선 신선한 인물이다. 해리스는 샌프란시스코 검사, 캘리포니아주 검찰총장을 한 뒤 2016년 상원의원으로 당선했다. 그는 힐러리보다 인지도가 낮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낮은 인지도가 이번 선거에서 장점이 됐다. 초선 의원이었기에 상대적으로 그의 정책이나 언행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고 그만큼 비호감도가 낮아 반대 세력이 많지 않았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로 거론된 미셸 오바마나 엘리자베스 워런과도 해리스는 차별화됐다. 미셸은 대통령 부인 역할을 하며 흑인 사회와 진보 진영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오바마 부인이란 틀에 갇힌다는 단점이 있었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집권할 때, 그의 많은 정책이 인종 문제로 치환되는 상황이 지속됐다. 흔히 ‘오바마 케어’라고 하는 의료보험 개혁 정책도, 실제 혜택을 보는 백인 유권자조차 “오바마 케어는 흑인을 위한 정책”이라고 비판했다. 물론 해리스도 비슷한 비판을 받을 수 있겠지만, 해리스의 남편(변호사 더글러스 엠호프)이 미국 주류 사회의 일원인 유대인이며 해리스 본인이 흑인이자 아시안 혈통이어서 미셸보다 상대적으로 외연을 넓히리라는 기대를 받았다.
해리스는 유력한 부통령 후보로 거론된 엘리자베스 워런 상원의원에 견줘 유색인종을 직접적으로 대표한다는 장점이 있었다. 사실 정치 경력으로만 보면 워런 의원이 부통령 후보로 더 유력했다. 워런은 진보적인 엘리트 백인 여성이라는 점에서, 버니 샌더스의 지지층과 지난 대선에서 힐러리에게 실망한 여성 유권자를 결집할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워런이 ‘힐러리 2.0’이 될 거라는 우려가 있었다. 특히 5월 말 미니애폴리스에서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흑인 조지 플로이드가 숨지는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인종차별 반대 운동(Black Lives Matter)이 전국에 퍼지면서 바이든은 해리스를 그의 러닝메이트로 선택했다.
이번 대선 캠페인에서 예상외로 해리스는 자기 정치를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 선출 과정에서 바이든을 강하게 공격했고, 검사 출신이라는 경력 때문에 강경한 이미지를 보였다. 하지만 해리스는 캠페인 기간에 본인을 낮추며 바이든을 적극적으로 보조하는 역할을 했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나 TV광고에선 “투표하라, 투표하려면 빨리 하라”라는 투표 독려 메시지를 줄곧 내보냈다. 이는 한 차례 있었던 부통령 후보 토론회에서 두드러졌다. 해리스는 대부분 발언의 마지막을 “투표하세요”라고 마무리하며, 지난 대선 때 상대적으로 투표장에 많이 나오지 않았던 흑인 유권자의 투표 독려에 힘을 쏟았다.
해리스의 일관되고 열정적인 투표 독려 캠페인은 지난 대선 때 민주당을 지지함에도 힐러리에 대한 비호감 때문에 투표장에 나오지 않았던 유권자를 투표하게 하는 동력이 됐다. 또한 이전 대통령 후보들에 비해 열성 지지자가 많지 않던 바이든에게도 좋은 전략이 됐다. 2016년 힐러리 대선 캠페인 때는 누가 부통령 후보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 상황을 떠올리면, 이번 대선 캠페인에서 해리스의 역할은 매우 지대했다.
대선 승리 선언 연설에서도 “바이든이 오바마에게 그랬듯” 해리스 본인도 바이든에게 최선을 다하겠다는 충성심을 보이며 겸손한 자세를 취했다. 이런 행보는 매우 전략적으로 평가된다. 고령의 바이든을 보조하는 것에서 한발 더 나아가, 다음 대선까지 염두에 둔 ‘충성스러운 후계자’ 면모를 보였기 때문이다. 과거 힐러리에 대한 높은 비호감도와 달리, 많은 여성 유권자가 해리스에게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있다.
미국에서 부통령은 상원의장 역할도 맡는다. 미국 현지시각 11월12일 기준 개표 상황에서 상원은 민주당 48명, 공화당 50명으로 구성될 전망이다. 만약 민주당이 2021년 1월5일 조지아주 결선투표에서 나머지 2석을 확보한다면 상원 구성은 민주당 50명, 공화당 50명으로 예상된다. 이 경우 해리스는 상원의장으로서 1표를 행사하므로 캐스팅보트(승패 결정) 역할을 한다. 또한 낸시 펠로시가 다시 하원의장으로 선출된다면, 미국 역사상 최초로 여성이 상·하원 모두에서 의장이 된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상·하원 의장이 당적을 갖고 단순히 의사 진행을 할 뿐 아니라 의사결정에도 참여할 수 있다. 실질적인 정치를 할 수 있는 셈이다. 민주당 소속이지만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펠로시와 상원의원 가운데 가장 진보적이라고 평가됐던 해리스가 상·하원 의장을 각각 맡는다면, 어떻게 서로 발맞춰 나갈지 기대된다.
이번 선거에서 해리스가 주목받고, 공화당에서도 역대 최다의 여성 의원이 당선되면서, 미국에선 많은 여성 정치인에게 관심이 쏠리고 있다. 대표적 인물이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코르테스(AOC) 민주당 하원의원이다. AOC는 2018년 정계에 진출할 때부터 현역 10선 의원인 조지프 크롤리 민주당 하원의원을 예비선거에서 이기고 최연소 하원의원(당선 당시 29살)이 되면서 언론과 여성계의 지속적인 관심 대상으로 떠올랐다. AOC는 보편적 의료보장제도, 공립대학과 직업학교의 무료화, 학생 부채 탕감 등 진보적인 정책을 내세웠다. 특히 2020년 7월 공화당의 테드 요호 하원의원이 AOC에게 성차별적인 폭언을 한 뒤, AOC는 의회 연설에서 미국 내 뿌리 깊은 여성에 대한 폭력과 차별적 권력 구조를 지적하며 많은 젊은 여성의 지지를 받았다.
이번 대선 캠페인에서 AOC는 ‘어몽 어스’(Among Us)라는 온라인게임을 유권자와 함께 하며 트위치(Twitch·비디오게임 전용 인터넷 개인방송 서비스)에 실시간 중계해, 기존에 접촉하기 어려웠던 젊은 진보적인 유권자와 소통하는 시간을 마련했다. ‘어몽 어스’는 한국에서 하는 ‘마피아게임’과 비슷한 게임 규칙을 가진 온라인게임인데, 미국 젊은층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당시 약 44만 명이 AOC의 중계를 실시간 시청했고, 이후 사흘 동안 약 520만 명이 볼 정도로 큰 관심을 끌었다. 트럼프(6천 건)와 바이든(1만7천 건)의 트위치 라이브방송 조회수와 비교하면 폭발적인 관심이다.
이 밖에 최초 이슬람 여성 하원의원 일한 오마, 매사추세츠주 첫 흑인 여성 하원의원 아이아나 프레슬리, 팔레스타인 난민 2세 출신이자 이슬람교도인 러시다 털리브는 모두 유색인종 여성 의원이다. 이들은 AOC와 함께 ‘스쿼드’(The Squad·진보 성향 여성 초선 하원의원 4인방)라는 별칭으로 주목받으며, 이번 선거에서 모두 재선에 성공했다.
물론 이 여성 신예 정치인들에게 찬사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급진적인 진보 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을 향해 낸시 펠로시 하원의장은 격하게 비판했고, 민주당이 너무 왼쪽으로 가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하지만 100년 전 여성의 참정권 요구 또한 급진적이라는 이유로 제한됐던 역사를 생각하면, 새로운 여성 정치인들과 최초의 유색인종 여성 부통령인 카멀라 해리스가 어떤 역사를 만들어나갈지 기대된다.
미네소타(미국)=김한나 미네소타대학교 정치학 박사 수료
*표지이야기-미 바이든 대통령 시대로
http://h21.hani.co.kr/arti/SERIES/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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