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2003년 10월, 다니던 학교에서 ‘특강’을 했다. 그해 3월, 장쩌민의 뒤를 이어 이제 막 국가주석이 된 후진타오 시대의 새로운 통치 이념에 대한 ‘교육 특강’이었다. 그날 강사로 나온 사람의 이름과 강의 내용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가 특강을 시작하면서 했던 첫 몇 마디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천안문 사태 이후 ‘미국몽’
“1989년 6월4일 천안문(톈안먼)에서 일어났던 ‘정치풍파’(중국에서는 6·4 천안문 사건을 ‘정치풍파’라고 한다) 이후 중-미 관계가 다시 차가워졌을 때, 저는 속으로 좌절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이미 미국에서 유학 비자를 받아놓은 상태로 출국일을 얼마 남겨두지 않았거든요. ‘정치풍파’ 이후 미국에서 일부 중국 유학생의 입국을 거절하고 관료와 학자들의 순수 교류도 단절시켰잖아요. 저는 우리 정부도 자국민의 미국 유학을 당분간 중단시킬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당시 영명하신 지도자 덩샤오핑은 미국 유학을 중단시키지도 않았고 미국인들의 입국을 거부하지도 않았습니다. 덕분에 저도 무사히 미국 유학을 떠날 수 있었고요. 그제야 비로소 저는 중국 지도자들의 위대함과 사회주의 중국의 대국적 풍모를 깨달을 수 있었답니다.”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그가 ‘그제야 비로소’ 깨달았다는 내용이다. 만일 당시 미국 유학 꿈이 좌절됐다면 그는 ‘중국의 대국적 풍모와 지도자들의 위대함’을 끝내 깨닫지 못할 뻔했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수많은 중국 청년이 저마다 가슴에 한가득 ‘미국몽’을 품고 머나먼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미국으로’ 갔다. 1990년대 중국 사회를 휩쓴 이른바 ‘출국열’(出國熱)은 미국으로의 유학과 이민 붐이 핵심이었다. 베이징 주재 미국 영사관 앞은 ‘미국으로 가는’ 비자를 얻기 위한 중국인들의 행렬이 밤새도록 이어졌다. 19세기 말, 망해가는 청나라 시대에 수많은 중국인 ‘쿨리’(당시 저임금 노동자를 이르던 말)가 ‘아메리칸드림’을 좇아 미국으로 갔듯이, 20세기 말 중국인들도 ‘꿈을 좇아’ 미국으로 갔다.
1993년 중국에서 가장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뉴욕의 베이징인>에는 이런 대사가 나온다. “당신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를 뉴욕으로 보내세요. 그곳은 천국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당신이 누군가를 증오한다면 그를 당장 뉴욕으로 보내세요. 그곳은 또한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그때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로 중국인들에게 미국은 천국이자 지옥, 애증이 공존하는 ‘두 개의 미국’으로 인식된다. 하지만 중국인에게 미국은 원래 아주 오래전부터 ‘아름다운 나라’(美國)였다.
중국과 미국의 ‘첫 만남’은 1784년 2월22일 미국 상선 ‘중국황후호’가 광저우에 입항하면서다. “중국황후호를 시작으로 수많은 무역선이 중국으로 향했다. 차, 비단, 도자기 같은 중국 상품이 미국 내에서 인기를 얻자 수입업자들은 막대한 수입을 올렸다. 중국은 꿈의 거래처였다. (중략) 중국과 미국은 그렇게 처음 만났다. 그 만남은 미국인들이 중국에 다가온 결과였다.”(박홍서, <미중 카르텔>)
‘첫 만남’ 이후 중국과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비교적 ‘아름다운 관계’를 맺었다. 20세기 초 중화민국 시절부터 중국은 미국을 공식적으로는 ‘메이리젠합중국’(美利堅合衆國)이라고 하지만, 보통 줄여서 ‘메이궈’라고 부른다. 한자로만 보면 미국은 ‘아름다운 나라’다. 중국에서 쓰이는 다른 나라 이름 가운데 ‘미국’은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다. 이렇게 부르는 데는 다 연유가 있다. 중국에 미국은 역사적으로 ‘은인’이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두 차례 아편전쟁에서 모두 패배한 청나라는 당시 세계열강의 먹잇감이 되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그때 가장 ‘선한 의지’를 가지고 접근한 신생 강대국이 바로 미국이다. 1862년 7월20일 베이징에 입성한 미국의 첫 주중공사 앤슨 벌링게임은 영국·프랑스·독일 등 다른 열강의 중국 침략과 이권 쟁탈을 비난하며 중국 편에 서서 ‘공정한 외교와 무역 활동’을 주장했다. 이에 감동받은 청나라 공친왕은 벌링게임에게 중국 쪽을 대표하는 해외파견 외교사절단의 책임자를 맡아달라고 요청한다. 그는 중국 황제의 국서를 들고 미국과 영국·프랑스·러시아 등지로 가서 ‘중국의 이익’을 대변하다가 1870년 방문지 러시아에서 폐렴에 걸려 죽는다. 미국에 ‘아름다울 미’를 붙인 것도, 중국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다가 병사한 벌링게임에게 감사하기 위한 의도였다는 해석도 있다. 벌링게임은 중국 역사상 최초로 ‘유학생 선발대’ 120명을 미국에 보내 공부하게 했고, 그들은 향후 미-중 민간 교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당시 망해가던 중국에 미국은 얼마나 ‘아름다운 나라’였겠는가.
역사적 은인이었던 ‘아름다운 나라’
1949년 마오쩌둥의 사회주의 신중국이 들어서고, 미·소 중심의 냉전시대로 접어들면서 중국과 미국의 ‘아름다운 관계’도 막을 내렸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마오쩌둥이라는 ‘걸출한’ 중국 혁명가를 전세계에 처음 알린 사람은 중국인이 아니라 미국인 기자 에드거 스노다. 그는 마오쩌둥과 중국 공산당의 혁명 활동을 취재해서 쓴 <중국의 붉은 별>로 자신뿐만 아니라 마오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마오쩌둥은 소련을 견제할 목적으로 미국과 관계를 개선하고 접촉하려 할 때도 스노를 이용했다. 1970년 10월2일 <인민일보>는 가장 중요한 머리기사로, 마오쩌둥과 스노 부부가 천안문 성루에 올라 이야기를 나누는 사진을 대문짝만하게 실었다. 미국에 보내는 신호였다. 하지만 양국 냉전의 빙하가 녹기 시작한 것은 스노의 작용이 아니라, 1971년 4월4일 우연히 만들어진 ‘아름다운 오해’에서 비롯됐다. 그 유명한 미-중 ‘핑퐁외교’다.
1971년 4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참가한 미국 선수 글렌 카원이 탑승 차량을 오해하는 바람에 중국 선수단 차량에 올라탄다. <중국인과 미국인>을 쓴 홍콩대학 역사학과 쉬궈치 교수는 “중국은 이 아름다운 오해를 미-중 관계 개선의 기회로 붙잡았다”고 표현했다. 중국은 미국 탁구선수 대표단을 1949년 이후 처음으로 초청했고, 2주 뒤인 그해 4월16일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공개적으로 중국 방문을 원한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해인 1972년 2월 닉슨이 드디어 베이징을 방문하는 ‘역사적인’ 순간이 마련된다. 그전에 준비를 위해 중국을 방문한 헨리 키신저를 대면한 자리에서 마오쩌둥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원래 좌파보다 우파를 좋아합니다.” ‘우파 미국’을 좋아한 중국은 1979년 1월1일 미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수립했다. 100여 년 전 ‘첫 만남’과 달리, 이번에는 중국인들이 먼저 미국에 다가갔다.
중국 청년들의 민족주의 선언
베이징에 미국대사관 문이 활짝 열리는 것과 동시에, 중국은 냉전과 문화대혁명의 오랜 장막을 걷어내고 세계를 향해 문호 개방 정책을 시작했다. 하지만 양국 사이에 더 이상 낭만적이고 순수한 ‘아름다운 시절’은 오지 않았다. 중국이 정치·경제적으로 굴기하면서 민족주의가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낙후되면 두들겨 맞는다’는 지난 100년간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되새기며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을 부르짖었다. 그와 동시에 미국을 향해 ‘노’라고 말하기 시작했다.
“모든 중국인은 지금 ‘노’라고 말해야 한다. 지난 100년간의 치욕을 설욕해야 한다. 12억 중국인들은 미국 패권주의에 대해 다 같이 큰소리로 ‘노’라고 외쳐야 한다. 중국은 ‘노’라고 말할 수 있으며, 지금이 바로 그럴 때이다.” 1995년 중국 서점가를 강타한 <노라고 말할 수 있는 중국>은 당대 중국 청년들의 ‘민족주의 선언서’였다. 1990년대 이후 ‘출국열’이 이어졌지만, 한편에선 미국을 향해 ‘노라고 말할 수 있다’는 분노한 청년들이 나온 것이다. 소설가이지 영화평론가인 다이진화는 이 흐름을 “미국에 대해 상상했던 것에 대한 낙담과 기대의 상실이 민족주의적 분노로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중국인들이 미국에 대해 지닌 막연한 호감과 동경과 달리, 미국은 사사건건 중국에 시비를 걸고 훼방을 놓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애초 중국에 대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접근했던 미국도 지금은 중국에 대해 ‘노’라고 말한다.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미-중 관계는 ‘결별’ 절차를 밟고 있다는 분석이 곳곳에서 들려온다. 2020년 7월23일,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은 캘리포니아주에 있는 닉슨도서관 앞에서 “닉슨이 시작했던 중국 포용정책은 이미 실패했다. 미국과 동맹국들은 힘을 합쳐 중국 공산당 정권의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정권교체)를 이뤄야 한다”는 요지의 연설을 통해 시진핑 정부를 강도 높게 비난했다.
“중국인들은 미국에 대해 복잡한 애증 감정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대내 정치·경제·문화 등에서 이룩한 성과에 대해서는 긍정적 감정을 가졌지만, 미국의 대외정책에서 보이는 행위에 대해서는 혐오와 증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2000년 중국사회과학원 미국연구소 연구원 자오메이가 실시한 ‘중국인의 미국관 조사’ 연구보고서)
미국과 중국은 서로에게 ‘천국이자 지옥’이다. 가장 사랑하는 ‘척’하는 연인 사이였다가 또 어느 순간 가장 증오하는 ‘척’하는 적이 된다. 세계적 국제정치학자인 존 미어샤이머의 분석처럼 중국이 어느 날 모든 분야에서 미국과 비등한 ‘힘’을 가졌을 때, 둘 사이에 서로의 안보와 패권 우위를 지키기 위해 ‘치고받고 싸우는’ 이른바 ‘강대국 정치의 비극’이 일어날지도 모른다. 또 국제정치학자 박홍서가 <미중 카르텔>에서 주장하듯이 ‘갈등적 상호의존을 전제로 하는 카르텔 관계’일지도 모른다. 천국과 지옥, 냉탕과 온탕, 열정과 냉담 사이를 수시로 드나드는 이 둘의 관계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우리가 언제 진짜로 싸웠나요?”
1972년 닉슨이 처음 베이징에 내려 차를 타고 마오쩌둥을 만나러 이동할 때, 온 거리에 ‘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나붙은 걸 본다. 마오를 만난 자리에서 닉슨이 구호 얘기를 건네자, 마오가 웃으며 말한다. “그건 그냥 빈말입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저우언라이 총리가 한마디 거든다. “우리는 맨날 미국 제국주의 타도를 외치고, 당신들도 맨날 우리를 타도하자고 외치지 않습니까? 근데 우리가 언제 진짜로 싸웠나요?”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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