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은 차마 읽어 내려갈 수 없는 책입니다. 운명은 나를 아주 졸렬하게 제본해놓았습니다.”
2017년 4월, 중국의 한 유명 소셜미디어 매체에 ‘나는 판위쑤입니다’라는 글이 올라왔다. 이 글은 그해 최고 조회수를 기록한 ‘전설’이 됐다. 판위쑤는 당시 44살로, 베이징에서 입주 가사 및 육아 도우미 일을 하던 농민공(농촌에서 도시로 일하러 온 이주노동자) 출신 여성이다. 이 글이 ‘뜨면서’ 그의 운명도 다시 제본되기 시작했다. 영국 가디언 등 국내외 유명 언론 매체에서 그를 취재해 대서특필했다. 굴지의 출판사와 언론사도 그를 찾아와 고액의 원고료를 제시하며 앞다퉈 ‘입도선매’에 열을 올렸다. ‘나는 판위쑤입니다’는 판위쑤 자신에 관한 짧은 자서전이다.
판위쑤는 12살부터 고향 후베이 샹양의 향촌 민반(정식 학교가 아니라 민간이 주체가 돼 운영하는 학교) 소학교에서 임시 교사로 일하며 살다가 20살 때 무작정 베이징행 기차를 탔다. 고향 마을에서 그렇게 평생을 건초 더미처럼 무미건조하게 살다가 썩어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를 겨우 마친 농민공 여성이 베이징에서 가장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직업은 남들 뒤치다꺼리하는 일이었다. 식당 종업원 등 온갖 허드렛일을 했다. 그러다 사는 게 버거운 나머지 둥베이 출신의 농민공 남자와 서너 번 만난 뒤 후딱 결혼해버리고 말았다. 결혼하면 좀더 따뜻하고 다정한 삶이 시작될 줄 알았지만 그의 인생은 더 깊고 차가운 펄 속으로 빠져들었다. 남편은 지독한 술꾼에 폭력을 일삼는 ‘쓰레기만도 못한 놈’이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어린 딸 둘을 데리고 이혼한 뒤 고향 마을로 내려갔다. 하지만 고향에서도 ‘이혼녀’를 환대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큰오빠는 대놓고 마치 전염병 환자를 대하듯 피하며 빨리 눈앞에서 ‘꺼지라’고 했다. 판위쑤는 그때 깨달았다. 자기에게는 이제 돌아갈 집이 없다는 사실을. 두 딸을 데리고 다시 아무 연고도 없는 베이징으로 왔다. 소문을 들으니, 이혼한 남편은 러시아로 갔다고 한다. 아마도 지금쯤은 모스크바의 어느 골목길에서 술 취해 쓰러져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가 다시 베이징으로 온 뒤 정착한 곳은 동쪽 외각의 피촌이라는, 주로 농민공이 몰려 사는 마을이다. 2014년부터 이곳 피촌에는 베이징대학의 저명한 교수와 기자, 각계 지식인 자원봉사자들이 주축이 돼 노동자 문학 소모임(이하 피촌 소모임)이 열렸다. 매주 토요일 밤, 이곳에서 문학 수업을 했고 다양한 직업을 가진 노동자(주로 농민공)들이 모여들었다. 판위쑤도 일주일에 한 번 쉴 때마다 이곳에 와서 문학 수업을 듣고 처음으로 글을 쓰게 됐다. ‘나는 판위쑤입니다’라는 글도 피촌 노동자 문학 교실에서 탄생했다.
그가 일하는 곳은 피촌과는 정반대의, 베이징의 최고 갑부들이 몰려 사는 공항 인근의 ‘부자촌’이다. 판위쑤는 그곳에서 입주 도우미로 취직해 부잣집 아이들을 돌보는 일을 했다. 집주인은 미국 잡지 포브스에도 소개될 정도로 유명한 중국 사업가였다. 판위쑤는 그 부자 사업가의 ‘여부인’(如夫人·첩) 집에서 일하며 그 여부인이 낳은 자식들을 돌보고 기르는 일을 했다. 판위쑤가 목격한 부자들의 삶은 충격적이다 못해 별세계였다. 여부인은 남자 주인보다 25살 어린 여성이었다. 몸매는 모델 뺨쳤고 얼굴도 유명 여배우보다 더 예뻤다. 저녁이 되면 진한 화장을 한 채 성장하고 소파에 앉아서 남자 주인을 기다렸다. 그리고 남자 주인이 돌아오면 젊은 여부인은 공손하게 무릎을 꿇고 그에게 식사를 가져다 ‘바쳤다’. 그 집에는 또 명문대를 졸업한 입주 과외교사가 상주하며 아이들의 모든 학업을 관리했다. 판위쑤가 그 부잣집에 입주해 남의 아이들을 돌보는 동안 어린 두 딸은 피촌의 단칸방에서 엄마 없이 학교에 다니고 밥을 지어 먹으며 일찌감치 자립생활을 하고 있었다. 판위쑤는 그런 아이들을 생각하며 밤마다 울었다. 피촌에는 부모 없이 자라는 아이가 많았다.
판위쑤는 피촌 소모임에 다니며 자신의 인생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 못지않게 신산한 가족 이야기와 주변 노동자들 이야기도 써내려갔다. 그 이야기들이 묶여 최근 두 권의 책으로 출판됐고, 나오자마자 큰 반향이 일었다. 아직도 여전히 피촌의 작은 단칸방에서 살며 가사 도우미로 일하는 판위쑤는 글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나 자신의 표현 욕구를 만족시켜주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내 마음속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쓰고 싶을 뿐입니다.”
중국 간쑤성의 한 가난한 촌마을에서 나고 자란 리원리는 판위쑤보다 다섯 살이 더 많다. 올해 56살이다. 리원리 역시 피촌 소모임에서 글쓰기를 배웠다. 리원리의 인생 역정도 판위쑤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직업도 비슷한 입주 육아 도우미다. 2017년 4월, 리원리는 당시 한창 회자하던 ‘나는 판위쑤입니다’를 읽게 됐다. 글을 읽은 뒤 그는 마음이 크게 동요했다. 그리고 곧바로 자신도 베이징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판위쑤의 글에서 자신의 희망과 미래를 찾은 것이다. 리원리 역시 판위쑤와 마찬가지로 술만 마시면 폭력과 폭언을 일삼는 ‘개같은’ 남편과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지쳐 있던 참이었다. 더군다나 2005년 남편이 교통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게 되자 두 아들의 학비와 먹고사는 문제가 모두 그가 짊어져야 할 짐이 됐다. 돈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하며 살던 중 우연히 판위쑤의 글을 읽고 인생 방향을 틀었다.
베이징으로 온 리원리는 판위쑤처럼 입주 가사 도우미 일을 했다. 그러던 중 피촌에서 매주 토요일 저녁 7시에 노동자 문학 수업이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2018년 곧장 그 모임에 합류했다. 그곳에서 리원리는 ‘나는 그저 한 명의 가사 도우미일 뿐입니다’와 같은 시를 썼다. 그림도 그리고 좋아하는 춤도 췄다. 그가 그린 그림 중에는 ‘피촌 풍경’도 있다. 리원리는 피촌 노동자 문학 교실에 와서야 자신이 시와 그림, 춤에 모두 천부적인 재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는 2024년까지 모두 500점 넘는 그림을 그렸고 여러 유명 잡지와 문학 계간지 등에 글과 그림이 실렸다. ‘몽우의 세계’라는 단독 문집도 출간했다. 그는 판위쑤와 더불어 피촌 노동자 문학 소모임이 배출한 가장 유명한 ‘신노동자 작가’가 됐다. 그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촌에 와서) 새장에서 날아오르는 새처럼 드디어 나만의 공간을 갖게 됐다.”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가 산산이 부서질 듯이 아프다 (…) 나는 5천m 깊이에서 중년의 나날을 보내며 암반을 하나씩 하나씩 폭파한다 (…) 내 몸에는 3t의 다이너마이트가 있다 (…) 나는 암석처럼 펑 하고 온 사방으로 산산이 부서져 조각난다 (…)”
2015년 말 피촌에 있는 신노동자극장에서 노동자 시를 주제로 낭송회가 열렸다. 무대 위로 한 남자가 올라왔다. 그는 중국에서 광부 시인으로 알려진 천녠시다. 그는 자신이 쓴 시 ‘작렬지’를 낭송했다. 천녠시는 1970년 산시성 출신으로 1999년부터 전국의 광산을 떠돌며 발파공으로 일하던 광부였다. 그는 매일 일을 마치고 산속의 어두컴컴한 숙소로 돌아와 밥상 겸 책상에 몸을 구부린 채 희미한 알전구 불빛 아래서 시를 썼다. 그렇게 쓴 시가 모여서 2019년, ‘작렬지’라는 제목의 단독 시집으로 출간됐다. 그 후에도 에세이와 시집 등 여러 권의 책을 줄줄이 냈다.
그날 이 낭송회를 지켜본 수많은 사람과 언론매체의 입소문을 타면서 그는 중국 역사상 가장 유명한 ‘광부 시인’이 됐다. 그에 관한 다큐멘터리가 만들어졌고 미국의 하버드대학과 예일대학에서도 그를 초청해 강연하기도 했다. 천녠시도 피촌 소모임 출신이다. 2023년에는 이곳에서 직접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문학 강연을 하기도 했다. 얼마 전에는 중국의 대표적인 독립서점 ‘단샹콩젠’ 대표 겸 공공지식인으로 유명한 쉬즈위안이 진행하는 방송 대담 다큐멘터리 ‘13인의 초대’에 나와 큰 화제가 됐다. 그는 현재 진폐증에 걸려 투병 중이다. 천녠시는 자신이 글을 쓰는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씁니다. 왜냐하면 하고 싶은 말이 있기 때문입니다.”
판위쑤와 리원리, 천녠시 외에도 베이징 피촌 소모임은 수많은 노동자 문학가를 배출했다.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르포 작가 중 한 명인 위안링은 2024년 4월 ‘나의 피촌 형제자매’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은 그가 2023년부터 피촌에 거주하며 소모임을 이끄는 한편, 모임에 참가한 13명의 노동자 문인을 취재해서 쓴 글이다. 그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쓰는 ‘노동자 문인’이 되기까지 다양한 인생역정을 그린 이 책은 농민공들이 집결해 사는 피촌과 피촌 노동자 문학 소모임의 역사를 담고 있기도 하다.
피촌은 베이징에서 가장 유명한 농민공 집단 거주마을 중 하나다. 농민공 등과 같은 도시 빈민들이 거주하는 청중촌(도시 속 마을)은 2017년, 차이치(현 중앙정치국 상무위원)가 베이징시 새 시장으로 입성한 직후부터 철거가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당시 중국 정부는 ‘디돤런커우(도시 하층민) 정리 작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했다. 그것은 빈민층을 도시 밖으로 몰아내는 작업이었다. 경제 발전 속도도 쇠퇴하고 경제 구조도 첨단 산업 위주로 재편되면서 베이징에서 더는 농민공 등과 같은 디돤런커우가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베이징시는 농민공들을 쫓아내고 그들의 집을 철거하면서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 고향의 경제 건설에 이바지하라’고 했다. 그 후 수많은 청중촌이 속속 철거됐고 농민공들도 뿔뿔이 흩어졌다. 보도에 따르면, 피촌도 머지않아 철거를 눈앞에 두고 있다고 한다. 중국에서 유일무이한 농민공 박물관이었던 피촌 노동자박물관은 이미 2023년에 철거됐다.
피촌 소모임은 2014년 9월 처음 만들어졌다. 올해 9월 딱 10주년이다. 하지만 들려오는 소식에 따르면, 소모임도 해체될 위기에 처해 있다. 팬데믹 이후 지속되는 경제 불황과 피촌에 대한 임박한 철거 소식 등으로 더는 노동자들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글을 쓸 수 있는’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사이 많은 노동자도 피촌을 떠났다. 책 ‘나의 피촌 형제자매’에 등장하는 한 노동자는 이렇게 말했다. “문학은 우리에게 살아간다는 것의 존엄을 알게 했다.”
‘개같은’ 술주정뱅이 폭력 남편들에게 시달리다 피촌 문학 모임을 통해 우연히 글을 쓰게 되면서 ‘졸렬하게 제본된’ 운명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수많은 판위쑤와 리원리는 이제 어디 가서 산다는 것의 존엄을 찾아야 할까. 피촌 노동자 문학 소모임 10주년을 축하한다. 만국의 노동자여, 펜을 들고 단결하라!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박현숙의 북경만보: 베이징에 거주하는 박현숙씨가 중국의 숨은 또는 드러나지 않은 기억과 사고를 읽는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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