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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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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경만보] 어린이날 없애고 어른이날 만들자

열다섯 평생 가장 짜증 나는 날이 어린이날인 딸아이의 잔혹한 ‘어린이 세계’와 놀이공원 ‘환러구’
등록 2020-05-05 00:02 수정 2020-05-07 11:22
세계 어린이날에 아버지와 아들이 베이징 놀이공원 환러구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있다. EPA 연합뉴스

세계 어린이날에 아버지와 아들이 베이징 놀이공원 환러구에서 놀이기구를 타고 있다. EPA 연합뉴스

‘부부의 세계’ 못지않은 또 다른 잔혹한 세계가 있다. ‘어린이의 세계’다. 그 슬프고 잔혹한 세계를 이제 막 건너온, 한 ‘애늙은이’ 소녀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어릴 때나 지금이나 사는 낙이 없고, 이제 남은 건 늙어가는 일뿐’이라고 말하는 소녀는 이제 겨우 15살이다. 가끔 ‘삶은 소대가리도 웃을 법한’ 뻔뻔한 신세 한탄을 늘어놓는다. 지나온 15년 인생은 150년을 산 것처럼 피곤하고 힘들었노라며. 살아오면서 가장 지겹고 짜증 났던 날은 ‘어린이날’이었다는 엽기적인 고백도 했다. 이 불쌍한 애늙은이는 내 딸이다. 친하게 지내는 이웃집 남자는 “혹시 부모가 아이를 학대한 건 아니냐”고 의심하지만, 맹세컨대 ‘기억나지 않는’ 일이다. 하지만 딸의 거침없는 입에선 ‘학대의 기억’이 쏟아져나온다. 그것도 다섯 살 적에 말이다.

미안했다, 공주야

막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하던 다섯 살 무렵. 학부모 모임을 하고 귀가한 엄마가 난데없이 동화책 한 권을 집어들더니 자기에게 ‘읽어보라’고 했다. 이제 막 글자를 익혀서 줄줄줄 유창하게 읽지 못하고 더듬더듬 읽자, “넌 이런 쉬운 동화책도 못 읽냐”며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더라는 것. 효자손 등긁이를 든 엄마 손이 언제든 자기를 후려갈길 듯이 부르르 떨면서 말이다. 당시 엄마의 그 괴물 같은 표정은 지금까지 꿈에 나타날 정도로 무서웠다고 한다. 그 동화책도 아주 또렷하게 기억하는데, 제목이 <사랑해 공주>였다고.

듣고 보니 생각이 난다. 그날 학부모 모임에서 만난 엄마들의 ‘자식 자랑’에 열 받아서 저질렀던 ‘우발적 학대’였다. 다섯 살밖에 안 된 아이들이 한글은 이미 기본으로 다 습득했고, 영어 파닉스(발음 교수법)를 하고 있다느니 초등학교 수학 문제집을 풀고 있다느니 등의 얘기를 듣고서는 잠시 충격을 받았다. 어떤 아이는 자기 전에 매일 동화책 8권을 꼭 읽는다고도 했다.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잠시 머리가 돌아서 ‘사랑하는 공주’를 학대했던 것이다. 미안했다, 공주야.

딸아이의 잔혹한 ‘어린이 세계’가 본격적으로 펼쳐진 건 초등학교에 입학한 뒤부터다. 학대의 주요 주체는 엄마에서 학교와 선생님들로 변했다. 어깨가 무너질 듯 무거운 책가방과, 에베레스트보다 더 오르기 힘든 숙제의 산들, 그리고 매일 앵무새처럼 되풀이되는 훈화와 재미없는 잔소리를 늘어놓는 선생님은 ‘사는 낙’을 빼앗아가는 약탈자였다. 특히 가장 싫었던 날은 6월1일 ‘어린이날’이다.

중국 어린이날은 6월1일이다. 이날은 ‘국제아동절’이기도 하다. 1942년 6월10일, 독일의 히틀러 나치 군대가 체코의 리디체라는 마을에서 16살 이상의 모든 남성과 영아를 학살한 사건을 추모하기 위해 지정한 날이다. 잠깐 부연 설명을 하자면, 당시 학살로 마을에 살던 16살 이상 남성은 생존자가 없었다고 한다. 여자와 아이들은 강제수용소로 보내졌고, 그중 많은 아이가 독일인 가정에 입양돼 철저한 ‘세뇌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아이들은 자기 이름과 부모가 누구인지 모른 채 자랐고, 나치는 리디체 마을에서 저지른 학살의 기억을 깡그리 지워버렸다. 마을 역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국제아동절과 중국 어린이날의 유래는 이렇게 슬프다. 하지만 어른이 아이들에게 이날을 마냥 슬퍼하라고 지정한 건 아닐 것이다. 아이들의 슬픈 역사가 있었던 날, 모든 아이가 이날 하루만이라도 슬픔을 잊고 즐겁고 행복한 날을 보내기 바라는, 어른들의 ‘깊은 뜻’이 담겨 있을 것이다. 어른은 항상 ‘사려 깊은’ 사람들이 아니던가.

어린이날 잔혹사

그러나 딸아이가 기억하는 어린이날은 늘 힘들고 짜증 나는 날이다. 중국은 어린이날도 학교에 간다. 휴일이 아니다. 학교에 가서 정규 수업은 하지 않지만, 대신 고된 ‘기쁨조’ 활동을 해야 한다. 어린이날 한 달 전부터 아이들은 학년별, 반별로 장기자랑 연습을 한다. 5월부터 베이징은 여름이라서 한낮에 뙤약볕이 이글거리는데, 아이들은 매일 체육 시간에 죽어라 어린이날 행사 연습을 한다.

그렇게 모든 아이가 매일 땀을 뻘뻘 흘리며 연습해도, 정작 어린이날 당일 무대에서 공연하는 아이는 소수다. 학년별 평가에서 일등 한 반을 제외하고 나머지 아이들은 연습만 실컷 하다가 결국 뙤약볕 아래 앉아서 구경꾼 노릇을 해야 한다. 딸아이는 지금 생각해도 정말 분통 터지는 일이라고 했다. 딸이 들려주는 어린이날 학교 행사 풍경은 이렇다.

“안녕하세요! 존경하는 귀빈 여러분, 학부모 여러분! 오늘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준비한 최고의 공연을 저희와 함께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 한마음으로 아이들의 꿈을 높이 날게 하고 중국몽(중국 부흥을 꿈꾸는 통치 이념)을 노래하면서, 조국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을 가져봅시다. 아름다운 중국몽은 우리 아이들의 것입니다. 시진핑 주석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어릴 때부터 사람됨을 배워야 한다. 어린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고, 너희는 바로 조국과 민족의 가장 아름다운 미래다’라고요. 우리 어린이들은 시진핑 주석의 가르침에 따라 어릴 때부터 사회주의 핵심 가치관을 배우고 실천해서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운동장에 울려퍼지는 우렁찬 박수 소리.) 국기 게양식에 이어 우리 학교를 관할하는 파출소 소장님의 인사 말씀을 듣겠습니다. 이어서 학부모 대표의 인사말과 교장선생님의 훈화 말씀이…. 자, 소년선봉대원들은 단상으로 올라와서 국기 게양식을….”

어린이날 잔혹사는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오전에 ‘어른들을 위한’ 모든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산더미 같은 ‘어린이날 숙제’가 기다리고 있다. 선생님들과 어른들은 말로는 ‘오늘 하루 즐겁게 보내라’고 하지만 숙제는 잊지 않고 내주고, 안 하면 어김없이 혼낸다. 어린이날 숙제는 대부분 역사 속 ‘어린이 영웅’에 대한 책이나 영화 등을 보고 감상문을 쓰는 것이다. 어린이 영웅 책은 선생님이 지정해주는데, 그중에는 시진핑 주석이 어릴 때 감명 깊게 읽었다는 책이나 영화가 많다.

‘어른의 날’ 그날엔

당시 과제로 읽었던 ‘꼬마 영웅’ 책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닭털편지>라는 책이다. 영화도 있는데, 언젠가 학교에서 단체관람도 했다. 항일전쟁 때 비밀 소년 공산당원이던 시골마을 소년의 이야기다. 긴급한 ‘닭털편지’(항일전쟁 때 국민당과 공산당이 비밀 서신에 닭털을 붙여 전령을 통해 보냈다고 한다)를 전하러 가다가 일본군을 만나고, 용감한 소년의 지혜로 그들을 매복한 공산당 부대로 유인해 섬멸했다는 내용이다.

어린 항일 영웅에 대한 책이나 영화를 보고 감상문을 쓸 때마다 딸은 아주 기막혔다고 한다. 어떻게 어른이 열 살 정도밖에 안 되는 어린아이를 이용해 그런 위험한 편지 심부름을 시킬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러다 아이가 죽으면 누가 책임질 거냐고. 자기는 그런 일을 하다가 죽어서 ‘영웅소녀’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했다. 그래도 감상문은 ‘닭살 돋게’ 썼다고 한다. ‘조국을 위해 용감하게 닭털편지 심부름을 한 그 꼬마 영웅처럼 나도 지혜와 용기를 갖춘 사람이 되어 조국에 보답하겠습니다.’

지금은 어린이 딱지를 떼고, 인생을 다 살아버린 150살 할머니 같은 소녀가 된 딸은 두 가지 소원이 있다. 나중에 진짜로 ‘어른이 되면’ 꼭 이루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다. 들어보니 어른들에 대한 복수다.

첫째, 어른이 되어 높은 사람이 되면 어린이날을 없애고 ‘어른의 날’을 만드는 것이다. 그날은 모든 어른이 한 달 전부터 여러 장기자랑을 준비해 베이징 환러구(놀이공원)로 모여야 한다. 어린이는 환러구의 각종 놀이기구에서 시원한 음료수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어른들의 장기자랑을 구경한다. 본격적인 행사가 열리기 전에, 여러 어린이 대표들의 ‘축하 연설’을 들어야 하고, 어른으로서 지켜야 하는 ‘당부의 말’도 경청해야 한다. 어른은 이날 종일 ‘어른 영웅’에 대한 책과 영화 등을 보고 감상문을 제출해야 한다. 어른들이 장기자랑을 하는 동안 어린이는 놀이기구를 마음대로 타면서 논다.

둘째, 엄마를 환러구에 데리고 간다. 어릴 때 그렇게 울고불고 제발 한 번만 환러구에 같이 놀러 가자고 했는데도 엄마는 고소공포증이 있다는 핑계를 대며 늘 거절했다. 어른이 되면 늙은 엄마를 환러구에 데리고 가서 가장 높고 빠르게 달려가는 청룡열차와 자이로드롭을 온종일 타게 할 것이다. 고소공포증으로 새파랗게 질린 엄마를 끌고 아이스크림과 피자, 스테이크 가게에 가서 산처럼 쌓아놓고 먹게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환러구를 나오는 길에 엄마를 스케이트보드에 태워 뻥 뚫린 도로 위를 씽씽 달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집에 가서 자기 전에 <사랑해 공주>를 읽게 할 것이다. 줄줄줄 못 읽으면 큰소리로 야단치며 망신을 줄 것이다.

어린이여, 단결하라

딸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며, 제발 한 번만 환러구에 가서 함께 놀자고 한다. 어릴 때 가장 하고 싶었던 일이 바로 환러구에 가서 엄마 아빠랑 청룡열차를 타고 하늘 높이 훨훨 달리는 일이었다며. 생각해보니 나도 어릴 적에, 어린이날 딱 하루 부모님이랑 놀이공원에 갔던 일이 가장 즐거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는 고소공포증도 없이 온갖 무서운 놀이기구를 타고 ‘부라보콘’과 카스텔라를 먹으며 종일 놀아도 지겹거나 힘들지 않았다. 어쩌다 어른이 되어서는 고소공포증이 생겨나 그 신나는 놀이공원을 가장 싫어하게 되었을까. 심지어 어린이날에 아이들이 학교에서 오전 공연만 마치고 일찍 집에 돌아오는 것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 학교에서 아이들이 저녁밥까지 먹고 왔으면 좋겠다고 대놓고 말하기도 한다.

딸의 소원대로 아이들을 괴롭게 한 어른들에게 복수하면, 세상의 모든 어린이가 놀이공원에 가서 해방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전세계 어린이여, 단결투쟁해서 어른들의 세상을 박살 내거라!

베이징(중국)=박현숙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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