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3월8일 서울 광화문에서 열린 ‘내란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3·8 여성 1만인 선언’의 한 장면. 윤석열즉각퇴진·사회대개혁 비상행동 제공
2025년 3월8일은 117주년 세계 여성의 날이었다. 여성의 날은 여성의 노동권과 인간다운 삶, 시민으로서의 존엄을 기념하는 날이지만, 동시에 기존 질서에 대한 비판과 변화의 요구가 광장으로 터져 나오는 날이기도 하다. 특히 올해는 그 의미가 더욱 긴박하게 다가왔다. 바로 이날, 한국 반여성 정치의 상징이자 내란의 주범인 윤석열이 석방됐기 때문이다.
이 당황스러운 소식과 함께 서울 광화문에서는 ‘내란 극복과 민주주의 회복을 위한 3·8 여성 1만인 선언’(이하 ‘선언’)이 거센 바람을 가르고 울려 퍼졌다. 정의당 장혜영, 더불어민주당 박지현, 여성학자 권김현영, 그리고 한국성폭력상담소장 김혜정이 선언문을 준비했고, 그 취지에 공감하는 1만2510명이 서명에 참여했다. 그리고 여성청년농민, 해직교사, 말벌동지, 이주여성, 퀴어부터 원로 여성운동가, 교수, 여성단체 활동가에 이르기까지 21명의 여성이 단상에 올라 선언문을 함께 낭독했다. 이들은 “아내 밟던 자, 나라 밟는다!”라는 1950년대 여성운동가들의 구호를 이어받아 “여성 밟는 자, 나라 밟는다!”라고 외쳤다. 그리고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의 퇴진은 반여성 정치의 퇴진이며, 성평등 정치의 귀환이 곧 민주주의의 회복”임을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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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3·8에 급진적인 여성 정치, 성평등 정치를 외친 것은 비단 한국의 페미니스트만은 아니었다. 상황이 상황인 탓이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했고, 독일의 경우 지난 2월 총선에서 극우 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이 제2당으로 부상했다. 프랑스에서도 극우 정당 ‘국민연합’(RN)이 창당 52년 만에 원내 1당으로 올라선 와중에 당의 리더이자 대표적인 페모내셔널리스트(여성의 인권을 빌미로 배제적 국가주의를 주장하는 사람)인 마린 르펜이 차기 대통령으로 점쳐지고 있다. 물론 이탈리아 총리 조르자 멜로니도 빼놓을 수 없다.
여성혐오 문화와 소수자 배제 정서가 극우의 세계관과 맞물려 돌아가는 현장이 한국만큼이나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곳은 아무래도 미국이다. 올해 미국에서는 ‘우먼스 마치’(Women’s March, 여성 행진)가 전국 규모의 시위를 조직했다. 2017년 3월8일, 트럼프 취임 직후 열린 대규모 시위에서 시작된 우먼스 마치는 미국 전역에서 400만 명에 가까운 이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면서 트럼프 정부에 대한 저항의 상징이 됐다. 그로부터 8년 뒤, 트럼프의 두 번째 임기를 맞이하면서 우먼스 마치는 ‘우리의 페미니스트 미래’라는 슬로건 아래 트럼프 행정부의 반여성, 반다양성, 반포용성 정책을 규탄했다.

프랑스 극우 정당 ‘국민연합’(RN) 소속 정치인이자 프랑스 차기 대통령감으로 점쳐지고 있는 마린 르펜. 2024년 12월16일 파리 국회에 참석해 생각에 잠겨 있다. REUTERS
그렇다고 극우 정치와 페미니즘 사이에 대립각이 언제나 선명한 건 아니다. 예컨대, 멜로니는 3·8 여성의 날을 맞아 소셜미디어를 통해 “여성 고용률이 사상 최고 수준에 도달해 1천만 명 이상의 여성이 노동 시장에 진입했다. 이건 중요한 성과지만, 모든 분야에서 완전한 성평등을 이루기 위해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다”는 메시지를 냈다. 그러나 그가 ‘강한 이탈리아’를 내걸고 반난민, 반동성애, 반유럽통합 기조를 유지하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는 그저 전형적인 페모내셔널리스트의 정치적 레토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이탈리아 성평등을 저해하는 자들이 바로 난민’이라는 식으로 쉽게 이동해버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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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스스로를 ‘기독교의 어머니’라 부르는 멜로니는 여성의 낙태권 역시 후퇴시키고 있다. 이탈리아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올해 3·8을 “멜로니 정부의 반동적 정책에 맞서는 여성의 날”이라 일컬으며 거리로 나선 이유다. 이들은 멜로니의 ‘여성 리더십’이 여성의 권리를 진전시키기는커녕 반동적이고 보수적인 정책을 가리는 “역설적인 가면”이 됐을 뿐이라고 지적하고, ‘빵과 장미’ 운동의 급진화를 촉구했다. 여기서 급진화란 “여성을 비롯해 퀴어 공동체, 노동자, 그리고 제국주의적 억압에 맞서는 모든 사회 운동의 단결”을 의미한다.
국민연합의 지도자 르펜이 프랑스 여성의 안전과 번영을 내세워 이주민 차별을 선동해온 파리에서는 급진적 페미니스트 단체인 페멘(FEMEN)이 군모를 쓰고 가슴에 스와스티카를 그린 채 행진하면서 “파시스트 전염병, 페미니스트의 반격”을 외쳤다. 2008년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된 페멘은 남성 중심적 권력구조, 정치·종교적 억압, 독재 등에 저항하기 위해 상반신 노출 시위 등 급진적인 퍼포먼스를 펼쳐왔는데, 이번 시위에서는 특히 극우 여성 정치인들을 비판하고 페미니스트 내부에서 퍼지고 있는 이민자에 대한 낙인과 트랜스젠더 인권에 대한 공격을 비판적으로 성찰했다.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2025년 3월6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스스로를 ‘기독교의 어머니’라 부르는 멜로니는 여성의 낙태권을 후퇴시켜 이탈리아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반발을 샀다. REUTERS
‘선언’은 응원봉 광장을 만들어낸 한국 여성들의 민주주의에 대한 절박한 염원이 선언이라는 형식의 신체를 입어 구체화된 것이었다. 더불어 위와 같은 흐름 안에서 보자면,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극우화에 맞서는 동시대 페미니즘 물결의 일부로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의미가 더 있다. 응원봉 광장 이후, 어떻게 대중정치에서 여성 정치의 불꽃을 되살릴지에 대한 상상력을 자극했다는 점에서, 한국 대중정치라는 관점에서도 주목할 만한 장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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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선언을 준비한 장혜영, 박지현, 권김현영, 김혜정이 어떻게 모였느냐다. 그들은 여성 정치인들이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공격받고 반페미니즘 정서가 표로 결집됐던 지난 대선과 총선을 지나면서 “다시 뛰는 여성 정치를 염원하고 응원”하기 위해 결성된 러닝 크루인 ‘다시 뛰는 여성 정치’ 멤버들이다. 그러니까 ‘선언’은 여성 대표성 문제에 대한 고민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고, 이에 여성계를 비롯해 1만 명 넘는 여성 시민이 공감했다는 의미다. 그런데 국내외적으로 이토록 복잡한 대중정치의 지형에서 도대체 여성 정치란 무엇일까? 혹은 무엇이어야 할까. 이 질문을 곱씹으면서 나는 이번 3·8 여성의 날 광장에 등장했던 “응원봉을 의사봉으로”라는 구호에 대해 생각했다.
2015년 ‘페미니즘 리부트’와 2016년 촛불광장을 지나오면서 청년 여성은 그 어느 때보다 대중정치에서 중요한 행위자이자 동인이 됐지만, 이들의 목소리는 계속 주변화돼왔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2025년 여성의 날에 발표한 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OECD 회원국 중 남녀 임금 격차가 가장 크고, 손에 꼽힐 정도로 여성이 정치적으로 과소대표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이틀에 한 명씩 여성이 친밀한 관계의 남성에 의해 살해당한다. 여성들이 응원봉을 든 것은 독재자의 꿈을 꾼 한 명의 성차별주의자를 끌어내리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여성혐오를 팔아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그 구조 자체를 뒤집기 위해서였다.
중요한 건 그 응원봉이 ‘청년 여성’이 아닌 ‘민주 시민’의 상징임을 이해하는 일이다. 제1553호 한겨레21에서 ‘체제전환운동’의 미류 공동조직위원장은 중요한 관점을 제안한다. 그는 응원봉 광장에서 “각자의 정체성을 말하며 발언하는 이들의 이야기에서 정체성만 읽어서는 안 된다”며 이를 “배제된 자들이 광장의 보편자라는 선언”으로 읽어야 한다고 썼다. ‘2030 여성’을 “연령과 성별의 표식으로 읽는 대신 새로운 민주주의로 나아가려는 모두의 얼굴로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해석이 가능한 건 실제로 응원봉을 들었던 이들이 ‘남태령 대첩’을 만들어내고 ‘말벌동지’가 되어 다양한 투쟁의 현장에 연대하며,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각자의 방식으로 넓혀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단일하게 고정돼 있지 않은 자신의 다양한 정체성에 때로는 불안하게, 때로는 유연하게 발 딛고 서서, 자신들이 경험한 주변적 위치로부터 타인의 주변적 위치를 읽어내고 그쪽으로 손을 뻗는 힘을 기르고 있다. 말하자면 자신의 정체성에 뿌리를 내리되, 유연하게 정치적 입장을 이동해 가는 “루팅 앤 시프팅”(Rooting and Shifting, 니라 유발 데이비스)의 정치를 실천 중인 것이다. 이는 정체성조차 상품으로 팔아버리는 신자유주의의 한계를 넘어 체제를 전환하는 보편 정치로의 분화 가능성을 품고 있다.
물론 응원봉 광장의 ‘여성 정치’가 급진적 보편 정치로만 귀결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미 한쪽에선 외국인을 배제하는 떡볶이 나눔이 등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차별금지법 반대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한 차례 (고색창연한 전통 극우로부터 태어나 네오 극우의 자양분이 된) 우파 여성 대통령의 실패와 탄핵을 경험한 바 있다. 그게 답이 아니라는 건, 우리가 고통 속에서 배운 다디단 교훈이다.
‘의사봉’은 ‘응원봉 정치’가 나아갈 여러 길 중 하나이며, 피해갈 수 없는 중요한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어떤 경로를 따라 어떤 의사봉이 될지 적극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이제 곧 모든 것이 대선 정국으로 휘말려 들어가겠지만, 응원봉이 키운 의사봉에 대한 이야기가 속도전이 아니라 질적인 대화로 이어지길 바란다.
손희정 시사덕후·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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