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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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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마코의 눈, 눈을 감다

1960~70년대 서아프리카 말리 청년들의 일상 기록하며 아프리카에 관한 흔치 않은 시각을 제시한 작가 말리크 시디베
등록 2016-05-21 16:49 수정 2020-05-03 04:28
AP 연합뉴스

AP 연합뉴스

최근 몇 년간 예술계에선 서아프리카 말리의 사진작가 말리크 시디베(Malick Sidibé)의 1960~70년대 사진이 다시 주목받았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은 ‘아프리카 사진’에 바치는 첫 전시를 열었고, 잭 셰인먼 갤러리에선 시디베의 개인전이 진행 중이었다. 지난 4월14일 시디베 사망 당시 그의 4번째 개인전을 진행 중이던 셰인먼은 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사진은 서구인들이 아프리카를 보는 시선을 바꿔놓았다”고 말했다.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파티장으로

시디베는 ‘바마코(말리 수도)의 눈’으로 알려져 있다. 1960년대 초, 그는 프랑스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말리의 막 깨어나던 청년문화를 기록했다. 그의 사진은 그전까지 대체로 지역 분쟁, 기아, 질병 등에 초점을 둔 보도사진 중심의 아프리카 지역 사진과 달랐다. 시디베는 카메라를 들고 거리를 돌아다니며 식민지 독립 뒤 새로운 시대를 맞은 동시대 청년들의 활기를 사진에 담았다. 사진 속 댄스클럽, 콘서트장, 밤거리의 ‘파티 피플’ 청년들은 말리의 전통복장이 아닌 최신 유행의 옷을 한껏 차려입은 채 자신을 뽐내거나 춤을 추고 있다.

시디베의 방대한 기록은 1990년대 서구의 큐레이터와 아트 딜러들에 의해 재발견됐다. 서구의 ‘명명’으로 뒤늦게 예술사진작가로 인정받은 거였다. 이후 그는 유럽과 미국 전역에 소개되며 국제적인 스타가 되었고, 2007년 아프리카 예술가로서는 처음으로(사진작가로서도 처음이었다)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황금사자상 공로상을 받았다.

말리의 사진작가 말리크 시디베가 4월14일 바마코에서 세상을 떠났다. 향년 80.

시디베는 1935년(혹은 1936년, 정확한 생년월일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령 수단(현 말리 남부)의 솔로바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 사고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소작농인 아버지를 도와 양과 소를 치는 목동으로 일했고, 가족 중 처음으로 백인 학교에 다녔다. 일찌감치 예술적 재능을 발견한 시디베는 1952년 수도 바마코의 수단 공예학교(현 국립예술학교)에 입학했다. 재학 중 프랑스 사진작가 제라르 기야가 학교로 찾아와 자신의 스튜디오를 꾸미는 일을 도와줄 학생을 찾았고, 시디베가 일하게 되었다. 그는 이때부터 사진과 인연을 맺었다.

1956년 시디베는 제라르 기야 스튜디오의 조수가 되었다. 따로 사진 찍는 법을 배운 것은 아니었다. 그는 어깨너머로 사진 촬영 기술을 익혔다. 시디베는 자신의 첫 카메라로 ‘코닥 브라우니 플래시’를 구입해 일을 시작했다. 기야는 주로 유럽인들이 모이는 식민지의 주요 행사를, 시디베는 아프리카인들의 결혼식과 세례식 등 ‘아프리카적’인 행사를 맡아 촬영했다. 시디베는 이 시절 저녁마다 자전거를 타고 바마코 곳곳의 댄스파티, 해변파티, 나이트클럽을 돌아다니며 젊은 말리인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1958년 시디베는 자신만의 스튜디오 ‘스튜디오 말리크’를 차렸다. 저녁엔 여전히 카메라를 들고 거리로, 파티장으로 나섰다. 그는 새벽이 오도록 여러 통의 필름을 바꿔가며 사진을 찍곤 했다. 밤 동안 사진을 인화해 벽에 걸어두면 다음날 사진 속 인물들이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고르러 찾아오기도 했다. 그의 사진에 찍히기 위해 매주 완전히 다른 옷차림을 하려 애쓰던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시디베는 바마코 밤문화의 살아 있는 아이콘이 되었다.

“새 시대, 사람들은 춤을 추고 싶어 했다”

1960년 말리가 프랑스 식민지에서 독립하며, 1960년대 초반 시디베가 기록한 사진 속 젊은 말리인들의 이미지는 좀더 깊은 사회적 의미를 획득했다. 식민지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시기, 사진 속에 포착된 젊은이들의 역동성과 자신감, 에너지는 지금 보아도 생생하고 뭉클한 느낌을 준다.

잘 차려입은 두 남녀가 머리를 맞대고 파티장 바깥에서 맨발로 춤추는 모습을 담은 (Nuit de Noël·1963), 젊은 남자가 댄스클럽에서 역동적인 포즈로 최신 유행하는 서구의 춤을 추는 (Regardez-moi·1962) 등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사진들은 대체로 이 시기에 촬영됐다.

“우리는 새로운 시대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사람들은 춤을 추고 싶어 했다.” 영국 일간 에 따르면 시디베는 후일 이렇게 말했다. “음악은 우리를 자유롭게 했다. 갑자기 젊은 남자들은 여성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되었고, 손으로 그들을 잡을 수도 있었다. 이전에 그런 행위는 금지돼 있었다. 따라서 모두가 가까이에서 춤추는 모습을 찍히고 싶어 했다.”

시디베는 1970년대 들어 거리로 나가기보다 스튜디오 사진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지금은 말리의 상징적 인물사진 형식이 되어버린 특유의 ‘말리 스튜디오 사진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폭 3m, 길이 4m의 소규모 스튜디오, 다양한 기하학적 패턴이 프린트된 직물이 뒤 배경과 바닥에 깔리고, 한껏 멋을 부린 말리의 젊은이들이 웨스턴 스타일의 셔츠, 나팔바지를 차려입은 채 오토바이 위에서 혹은 트랜지스터라디오, 기타, 꽃 등의 소품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사진. 서구 문화를 비롯해 소비주의가 유입하던 시기 젊은이들은 새로 산 옷과 가방, 선글라스 등을 장착하고 사진을 찍으러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물론 그는 세례식, 결혼식 등을 기념하려고 사진관을 찾아오는 이들의 격식을 차린 가족사진도 찍었다.

시디베는 죽기 전까지 60년 가까이 이 작은 스튜디오에서 일했다. 후일 그가 국제적 명성을 얻은 뒤, 사진작가들과 사진을 좋아하는 전세계 사람들에게 이곳은 성지와도 같은 곳이 되었다. 2010년 그는 영국 일간 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 스튜디오는 다른 곳과는 달랐다. 편하고 자유로웠다. 대체로 그곳은 파티 분위기였다. 사람들은 그냥 지나는 길에 들러 뭘 먹거나 잠시 머물다 가거나 했다. 나는 현상실에서 잤다. 그들은 자신의 베스파(오토바이) 위에서 포즈를 취하거나, 새로 산 모자, 바지, 보석, 선글라스 같은 것들을 뽐냈다. 멋지게 보이는 것. 그게 그들의 전부였다. 모두가 최신의 ‘파리 스타일’을 장착하고 있어야 했다. 우리는 그 전엔 거의 양말을 신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사람들이 생제르맹데프레(프랑스 파리의 번화가)에서 온 자신의 패션 아이템들을 엄청 자랑스워하는 것이었다! 독특하고 환상적인 시기였다.”

시디베의 스튜디오는 1960∼70년대를 거치며 줄곧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유행은 변화해갔다. 시디베는 1980년대 생계를 위해 카메라 수리기사로 일했다.

성지가 된 ‘스튜디오 말리크’

그러던 중 1990년대 초 시디베는 우연한 기회에 다시 사진작가의 삶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프랑스의 사진작가 프랑수아즈 위기에와 큐레이터 앙드레 매그닌이 그를 ‘발굴’한 것이다. 매그닌은 프랑스 파리에서 시디베의 사진 전시를 기획했다. 곧 그의 사진집도 출간됐다. 아프리카에 관한 흔치 않은 시각을 제시한 시디베의 사진은 서구 예술시장의 관심을 끌었다. 1960∼70년대 촬영된 수많은 사진들이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그렇게 그는 국제적 명성을 지닌 예술사진작가로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시디베는 이때부터 죽기 전까지 뉴욕현대미술관(MoMA)과 영국 런던 바비컨센터에서의 회고전을 비롯해 세계 곳곳에서 많은 전시를 열었다. ‘사진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핫셀블라드상(2003), 세계보도사진전(2010) 수상을 비롯해 2007년 아프리카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았다. 2008년에는 라는 제목의 그에 대한 다큐멘터리가 영국 TV를 통해 방송되기도 했다.

에 따르면, 예술학자이자 전 뉴욕현대미술관 큐레이터인 로버트 스토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아프리카의 어떤 예술가도 시디베만큼 그 지역 사진의 위상을 올려놓지는 못했다. 누구도 그만큼 아프리카 역사에 기여하고, 기록 이미지를 풍요롭게 하지 못했으며,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 아프리카 문화의 질감과 변화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넓히지 못했다.”

이로사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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