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횔덜린(1770~1843)은 두 살에 아버지를, 아홉 살에 계부를, 여기에다 두 의붓동생까지 잃었다. 일흔세 살까지 장수했지만 서른여섯 살부터는 정신병을 앓는 폐인으로 독일 튀빙겐시 풍광 좋은 네카어 강변의 ‘횔덜린의 탑’에서 37년간 살다가 죽었다. 가끔 경련과 발작을 일으켰지만 평소엔 온순했는데, 어머니마저 외면한 그를 돌봐준 것은 애독자 에른스트 치머와 그 가족이었다. 시인이 입원해 있던 튀빙겐 의료원의 목수였던 그는 소설 을 읽고 감동하여 자진해서 그 일을 떠맡았다. 횔덜린이 3년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을 애석하게 여겨 집으로 데려다 돌보다가 부부가 먼저 죽었지만, 치머의 딸은 결혼도 않은 채 죽을 때까지 그를 극진히 보살폈다. 네카어 강변으로 치머의 집을 찾으니 횔덜린이 쓰던 2층 반원형 방엔 의자만 덜렁 두 개 놓여 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헤겔과 신학교 같은 방 친구 </font></font>튀빙겐신학대 학생인 하숙생 빌헬름 바이블링거가 이 고상하게 미친 사나이를 가끔 산책시켰고, 시인의 명성을 좇는 학생들의 방문도 잦았지만, 정작 생모나 형제들은 40여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단 한 번도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고신과수(孤辰寡宿)살이 낀 걸까.
묘비에는 시 ‘운명’의 한 구절이 새겨 있다. “폭풍 중 가장 성스런 폭풍 가운데/ 나의 감옥의 벽 허물어지거라./ 하여 보다 찬란하고 자유롭게/ 내 영혼 미지의 나라로 물결쳐 가라!”( 장영태 지음, 문학과지성사 펴냄)
“감옥의 벽”이란 의 명귀 “궁핍한 시대”의 갇힌 삶으로 읽고 싶다. 물질뿐 아니라 봉건영주 권력이 짓누르는 자유의 압살과 경건주의 신앙이 조성한 영혼의 빈곤까지 아우른 궁핍이다. 이런 감옥의 벽을 허물려면 혁명 말고는 없는데, 그걸 시인은 “가장 성스러운 폭풍”으로 노래하지 않았을까.
네카어 강변 라우펜에서 태어난 횔덜린은 뷔르템베르크 공국의 경건주의 신앙에서 헤어날 길이 없었다. 횔덜린이 다녔던 명문 마울브론 수도원 학교의 철벽 같던 규율은 이젠 한갓 전설로 남았지만, 어머니는 그 시대 부모들이 다 그랬듯이 오로지 아들이 목사가 되기만을 소망했다.
수도원 학교 졸업 뒤 좁은 문인 튀빙겐 신학교(현 튀빙겐대학)에서 그는 헤겔과 같은 방을 쓰면서 아이작 폰 징클레어와도 친했다. 칸트의 책도 금서인 시절이라 필사해서 읽어야 했던 철통 보안 속에서도 젊음은 문학서클 ‘독수리인들의 모임’을 형성했다. 프랑스혁명을 지지하는 운동권들은 를 애창 가요로 불렀다.
친구 사촌 여동생과의 파혼, 방황 속에서도 졸업, 목사 자격 시험에 합격한 그는 한사코 목사의 길만은 외면했다. 관비로 공부한 신학생에게 목사 복무는 의무여서 다른 직업을 가졌다는 취업신고를 해야만 면할 수 있었다. 그는 실러가 소개해준 샤를로테 폰 칼프 집안의 가정교사로 들어갔다. 괴테와 실러 등과도 관계가 깊은 이 분방한 여류작가는 마침 바이마르로 출타 중이어서 22살 미망인 키름스가 횔덜린을 맞아 여러 일을 처리해주었다. 그녀는 이듬해에 딸을 낳았으나 곧 죽어버렸는데, 그 아버지가 횔덜린이라는 설이 분분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목사 대신 가정교사로 살다 </font></font>그가 맡은 제자는 소문난 말썽꾸러기로 가정교사를 바꿔치는 재주가 뛰어났다. 횔덜린이 책을 읽어주는 동안 그는 “바지를 풀어헤치고 자지를 움켜쥔 상태”로 스승을 “도전적으로 응시”해서 너무 놀라 만류하다가 도리어 선생이 기절해버렸다. 이 악동은 자신의 행패는 숨기고 스승에게 병이 있다고 부모에게 일러바쳤다.( 페터 헤르틀링 지음, 차경아·박광자 옮김, 까치 펴냄)
잠시 방랑 뒤 다시 가정교사로 들어간 프랑크푸르트의 은행가 곤타르트 집에서 억눌렸던 횔덜린의 여난살(女難煞)이 터지고 말았다. 26살 순진한 청년은 한 살 위로 4남매의 어머니인 안주인 주제테 곤타르트와 지순한 사랑에 빠졌다. 헤겔은 당장 그 집에서 나오라고 충고했지만 결국 쫓겨나 횔덜린의 영육은 황폐화되어갔다. 이 집은 1944년 폭격으로 사라져버렸다.
목사가 되어달라는 어머니의 끈질긴 소망을 등진 채 다른 가정교사 자리를 찾아 스위스로 갔다가 해고, 다시 프랑스 보르도까지 갔던 그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단 귀향했지만, 이미 정신분열 증세가 뚜렷한 폐인이 되어 있었다.
헤센-홈부르크 공국의 행정자문관으로 있던 징클레어가 그에게 도서관 사서직을 주선했다. 문득 민족시인 박봉우가 떠오른다. 파고다공원에서 결혼식을 올린 그는 정신병원과 경찰서에 번갈아 드나들다가 전주 시립도서관에서 울분으로 만년을 보냈다.
횔덜린은 에서 독일을 야만의 나라로 보았다. 300여 영주국의 조국은 침략자 나폴레옹에 의해 30여 영주국으로 강제 통폐합당했다. 어떤 영주는 침략자 편에 붙어서 자기 땅을 늘리고 왕도 되곤 하던 시절이었다. 뷔르템베르크 영주도 선제후에서 왕으로 승격되면서 독재를 강화해 공화파들의 불만을 샀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진짜 미쳤을까? 미친 척했을까?</font></font>프랑스혁명을 지지한 서른여섯 살의 시인은 전제군주를 반대했다. 징클레어의 권유로 참석했던 비밀모임이 반역죄로 밀고당하자 친구는 구속되고, 시인은 정신이상 징후로 조사 뒤 석방되었다. 이후 시인은 바로 병원에 갇힌 몸이 되었다가 치머의 집으로 옮겨졌다.
그가 진짜 미쳤는지, 체포를 피하느라 미친 척했는지는 김시습이나 햄릿처럼 논란거리지만, 마지막까지 “민중의 소리 그것은 하늘의 소리”라고 노래한 자유의 투사였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연재 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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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② 춘원 이광수의 양부, 일본의 괴벨스
③ 위대하고 혼란스런 파리의 빅토르 위고
④ 무시무시한 시절의 위고
⑤ 늙어서 오히려 진보한 위고
⑥ 민중의 눈으로 전쟁을 본 톨스토이
⑦ 인도주의 상징 톨스토이
⑧ 지복을 누린 괴테
⑨ 정치는 우리의 운명, 스탕달
⑩ 프리드리히 실러</font>
⑪ 자유의 투사 횔덜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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