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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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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어서 오히려 진보한 위고

파리의 하수도에서도 역사와 진보를 보았던 위고…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열리는 새 시대를 해석하다
등록 2016-03-10 18:16 수정 2020-05-03 04:28




연재 순서


①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② 춘원 이광수의 양부, 일본의 괴벨스
③ 위대하고 혼란스런 파리의 빅토르 위고
④ 무시무시한 시절의 위고

⑤ 늙어서 오히려 진보한 위고
*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글을 볼 수 있습니다.


파리코뮌 직후 위축됐던 빅토르 위고는 이내 상원에 진출, 정치와 문학과 외도(!)까지 병행, 진보적인 휴머니즘을 타계할 때까지(1885년, 83살) 지속, 국민적인 숭앙을 넘어 인류의 스승이 되었다. 늙을수록 과격해진 그는, 육체적 건강은 과시하면서 세상은 치매 수준으로 보는 한국의 노년층에게 타산지석이 아닐 수 없다.

위고에게 역사란 진보였고, 진보는 “인류의 일반적인 생명”이요 “국민들의 영원한 생명”이었다. “그것은 천국적이고 신적인 것을 향해서, 지상적이고 인간적인 대여행을 한다. 거기에는 낙오자들을 집합시키는 휴식처들이 있고, 갑자기 그의 지평을 드러내는 어떤 찬란한 가나안의 땅 앞에서, 명상하는 정류장들이 있고, 잠자는 밤들이 있다.”(, 정기수 옮김, 5권 117~118쪽)

하수도 그리고 워털루
프랑스 파리의 하수도 내부(위쪽). 하수구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빅토르 위고 석상. 임헌영

프랑스 파리의 하수도 내부(위쪽). 하수구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는 빅토르 위고 석상. 임헌영

그의 진보적인 역사관을 체득할 수 있는 첫 관문이 프랑스 파리의 하수도다. 파리7구 레지스탕스 광장, 알마교의 하수구 박물관은 에서 1832년 6월 5~6일간의 시민봉기 때 기절한 마리우스를 장발장이 둘러업고 구출한 기념물이다. 지하로 통하는 계단은 좁지만 막상 내려가면 그 규모와 시설에 압도당한다.

아, 오물도 파리에서는 이런 대접을 받는구나! 장발장이 헤맸던 하수도는 훨씬 좁고 위험했다. 이 하수도에는 전시실까지 갖추고 있다.

왜 하필 하수도인가. “하수도, 그것은 도시의 양심이다. 모든 것이 거기에 집중되고, 거기서 얼굴을 맞댄다. 이 창백한 장소에는 암흑이 있지만,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사물은 저마다 제 참다운 모습을 가지고 있거나, 어쨌든 제 최종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5권 159쪽) 모든 존재의 최종적인 모습 앞이기에 뱀 같은 자베르도 장발장과 화해하지 않았던가. “역사는 하수도를 통과”하는데, 그것은 민중적이자 진보적일 수밖에 없다.

위고가 본 또 하나의 역사 현장은 워털루 전투다. 엘바섬을 탈출, 100일 황제로 다시 유럽 제패를 노리던 괴물 나폴레옹이 영국과 프로이센 등 연합군에 패배한 이곳은 브뤼셀 남향 18km에 있다.

둔덕 이름(라이언스 마운드)처럼 사자상이 많은 이곳은 1815년 6월18일 대격전의 현장과는 5km 떨어져 있지만, 거대한 기념관에는 전황을 실감토록 조형한 지형지물들에다 각국 군대를 배치, 음향효과까지 갖추고서 전투를 재생해준다.

위고가 이곳을 찾은 건 1861년 5월7일, 그는 콜론호텔에 묵으며, 유명한 A자형 지형, 각국 군의 배치도, 나폴레옹의 섬세한 옷차림, 격전지 몽생장과 우구몽의 폐허를 통해 권력무상의 역사적인 필연성을 도출해냈다.

“웰링턴 때문에? 아니다”
나폴레옹이 연합군에 완패한 벨기에 중부 워털루의 라이언스 마운드. 임헌영

나폴레옹이 연합군에 완패한 벨기에 중부 워털루의 라이언스 마운드. 임헌영

이 전투는 나폴레옹에 대적한 영국(웰링턴 장군)과 프로이센(블뤼허 장군) 등 연합군 간의 전 유럽의 운명을 건 사투였기에 괴물은 연합군이 다 모이기 전에 각개격파한다는 전략을 세웠다. 포병장교 출신인 그는 아침 6시에 영국군을 공격, 프로이센군이 올 때면 웰링턴이 서 있는 것을 보지 못하게 만들 작정이었다.

그런데 전투 전날 밤부터 비가 쏟아져 땅이 파헤쳐지고 질펀하여 말들이 포대를 끌고 갈 수 없게 되어 땅이 마를 때까지 출발을 지연시킨데다 마침 길 안내자조차 돌아가게 해서 11시35분에야 공격을 개시했다. 결국 영국군과 이전투구, 결사전은 오후 늦게까지 지속되어 양군이 다 지쳐서 지원군이 오는 쪽이 승리할 형세였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 블뤼허 장군이 등장, 연합군이 완승했다.

이를 두고 “비가 오지 않았더라면 유럽의 미래는 달라졌으리라. 몇 방울의 물이 더 많으냐 더 적으냐가 나폴레옹의 운명을 좌우했다”고 할 수 있을까? 위고의 생각은 다르다.

나폴레옹의 패배를 그는 “웰링턴 때문에? 블뤼허 때문에? 아니다. 천운 때문이다. 보나파르트가 워털루의 승리자가 되는 것, 그것은 더 이상 19세기의 법칙에는 없었다. (…) 여러 사건들이 오래전부터 그에게 악의를 나타내고 있었다”고 규명한다.

그 첫째 이유로 위고는 “인류의 운명에서 이 한 사람의 과도한 무게는 평형을 깨뜨리고 있었다” “단 한 사람의 머릿속에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는 인류의 모든 활력, 한 인간의 두뇌에 떠오르는 세계, 만약 그것이 지속된다면, 그것은 문명의 파멸을 초래하리라”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연기를 뿜는 피, 넘쳐나는 묘지들,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들” 등, 이 전쟁괴물에 희생당했던 생령들에 의하여 그는 “고발되어 있었고, 그의 추락은 결정되어 있었다”(2권 54~55쪽).

“억제할 수 없는 자신의 일”

“워털루는 19세기의 돌쩌귀다. 그 위인의 소멸이 위대한 시대의 도래에 필요했다. (…) 워털루 전투에는 구름보다 더한 것이 있었다. 거기에는 유성이 있었다. 하느님이 지나간 것이다.”(2권 70쪽)

위고에게 역사는 혁명이다. “혁명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진보라고 불러보라. 그리고 만약 진보란 무엇인가를 이해하고 싶다면 그것을 ‘내일’이라고 불러보라. ‘내일’은 억제할 수 없게 자신의 일을 하는데, 그 일을 바로 오늘부터 한다.”(2권 85쪽)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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