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순서
<font color="#C1C1C1">
①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② 춘원 이광수의 양부, 일본의 괴벨스
③ 위대하고 혼란스런 파리의 빅토르 위고
④ 무시무시한 시절의 위고
⑤ 늙어서 오히려 진보한 위고
⑥ 민중의 눈으로 전쟁을 본 톨스토이</font>
⑦ 인도주의 상징 톨스토이
<font size="2"><font color="#991900">* 링크를 클릭하시면 해당 글을 볼 수 있습니다.</font></font>
톨스토이가 태어난 세계적인 명소 야스나야폴랴나는 러시아 모스크바 남동쪽 200km에 있다. 시내에서 50km를 달리면 안톤 체호프가 32~38살까지 살았던 멜리호보로 빠지는 표지판이 나타나는데, 의사 체호프의 당시 진료 시설은 물론 직접 가꾼 약초원과 야외극장까지 갖춘 곳이라 놓치면 후회한다.
야스나야폴랴나로 가는 길은 톨스토이가 마차로 달렸던 도로 폭에다 양옆은 밀집한 자작나무 숲이라서 러시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적당한 데다 차를 정차시키고 숲을 뚫고 나가노라면 대평원에 압도된다. 하늘도, 구름도 더 넓고 풍성한 그 우람한 대지가 너무나 탐난다. 민요 를 여러 판으로 들으며 달린다. 우리나라의 도 여기서 들으면 괜히 회개하는 네흘류도프가 된다.
야스나야폴랴나는 작은 학교 규모다. 톨스토이는 여기서 태어나 여기에 묻혔다. 1층 집필실들은 와 를 쓴 곳이다. 2층에 있는 40살 이후의 집필실에는 그 유명한 소파가 놓여 있다. 톨스토이와 형제들은 물론 그의 자식들이 태어났다는 이 사슴가죽(지금은 검은색 유포)이 덮인 참나무 소파를 그는 생가가 헐릴 때 책상 옆에 옮겨다놓고 평생 동안 몹시도 아꼈다. 그만의 비밀 보관함이었던 안락의자도 이 방에 있다. 사후에 아내에게 전할 편지와 그녀에게 숨기고 싶었던 불륜소설 초고를 그 밑바닥에 감췄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82살 타계 때까지 성욕으로 고민</font></font>옆방 침실에서 그는 항상 아침 6시에 기상했다. 아내 소피아가 직접 손바느질한 평상복과 침구, 손잡이 끝을 펴서 어디서나 앉을 수 있는 유명한 지팡이와 아령 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15개 국어가 가능했다는 이 희귀한 천재가 애장한 2만3천여 도서도 눈길을 끈다. 세상을 향해 토하던 그의 울분도 쩌렁쩌렁한 생전의 녹음 육성으로 들을 수 있었다.
2살에 어머니를, 9살에 아버지를 잃고 할머니마저 10살 때 세상을 떠나자 그는 13~20살 때까지 카잔으로 시집간 고모 집에서 지냈다. 두 중퇴생(톨스토이와 레닌)으로 유명해진 카잔대학 재학 시절에 그는 창녀에게 총각 딱지를 뗐는데, 너무나 왕성한 성욕 때문에 일생 동안 시달렸다. 오죽하면 고리키에게 “남자들에게 최대의 비극은 지금이나 앞으로나 바로 침실이란 이름의 비극”이라고 털어놓았겠는가. 82살 타계 직전까지도 자제할 수 없는 성욕으로 고민한 그는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가 52살 때 은퇴한 걸 상기하면 참으로 놀라운 남자다.
톨스토이는 물고 태어난 금수저를 버리고 스스로 흙수저로 돌아간 사람이다. 성인이 되자 야스나야폴랴나 영지와 350여 농노를 유산으로 상속받았다. 최고 지주는 농노를 20만 명, 상층 지주는 1천 명, 중간 지주는 500명, 하급 지주는 100여 명을 소유하던 때였다. 그는 젊은 시절의 방랑과 도박, 방탕으로 빚이 많았다. 맏형이 장교로 복무하던 캅카스로 무작정 찾아가 현지 입대, 장교로 크림전쟁에 참전했다. 제대 뒤 두 번에 걸친 유럽 장기 여행과 간헐적인 모스크바 체류 기간을 빼고는 거의 고향을 떠나지 않았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금수저 버리고 스스로 흙수저로</font></font>모스크바에서 묵던 이층집(1882~1901)이 현재의 톨스토이 문학 박물관이다. 마당 옆 별채는 당시 출판 일을 하던 곳이다. 1층 식당에는 그가 썼던 주발, 벽시계들이 있다. 2층 접객실의 사모바르(samovar·러시아 전통 주전자)가 놓인 쪽이 톨스토이의 자리였고, 문제의 피아노도 여기 있다. 톨스토이의 외도와 독선은 아무리 현처인 소피아도 견디기 어려웠던 모양. 그녀는 잠시 노총각 피아니스트로, 모스크바음악원 원장인 타네예프와 이 피아노로 연주(만 했을까!)하기를 즐겼는데, 노작가는 노골적으로 분통을 터뜨리곤 했다. 2층 끝 방이 서재다.
그는 인생 후반기부터 자신도 모르게 인류의 큰 스승이 되어버렸다. 유럽 여행 중 그는 빅토르 위고와 같은 프랑스 브장송 출신의 혁명가 프루동을 벨기에 브뤼셀에서 만나 ‘소유란 도둑질’이라는 이론에 매료당했다. 그 한참 뒤 미국인 헨리 조지의 에 감동, 사유재산을 부정해서 가족과 격렬한 불화를 자초했다.
그러나 그의 혁명론은 당시 러시아의 진보적인 지식인에 훨씬 못 미쳤다. 혁명이라고는 데카브리스트가 최고라고 여겼던 그는 1905년 페테르부르크 파업과 가폰 신부의 빈민 행렬에 이은 여러 반정부 투쟁에도 국가권력을 내놓으라는 요구는 있을 수 없다며, 혁명은 18세기 말~19세기 초반에나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를 인류의 스승으로 만든 건 반전 평화와 비폭력 저항, 사형제 폐지 등 인도주의의 대원칙과 경자유전의 토지문제 때문이었다. 침략전쟁을 극구 반대했지만 그는 러일전쟁 때 아들을 자원입대시켰고, 일본이 수십 년 내로 기술적으로 유럽과 미국을 능가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font size="4"><font color="#008ABD">세계 위인 중 가장 소박한 묘지</font></font>만년에 피를 토하듯이 쓴 는 차르의 탄압에 대한 격렬한 고발장이다. 밧줄이 잘 옭아매지도록 올가미에 비눗물을 발라 교수형을 집행하는 전율스러운 묘사! 20여 년 전에는 단 한 명이었던 사형 집행인이 늘어나 1908년에는 한 명당 100루블씩 받고 집행하더니, 두당 50루블로 내리기 무섭게 15루블씩으로 처리했다는 참담한 사실을 고발한 이 치밀성에 세계는 경악했다.( 빅토르 쉬클롭스키 지음, 이강은 옮김, 나남출판 참조)
영국에 의해 배포 금지된 에서 그는 남의 나라 지배를 받는 인도인을 질책하며 해방을 위해 비폭력 저항을 전개하라고 부르짖었다. 가출로 객사한 죽음과 세계 위인들 중 가장 소박한 묘지를 남긴 그의 최후는 위대한 인도주의의 상징으로 결코 모자람이 없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카카오톡에서 을 선물하세요 :) <font color="#C21A1A">▶ 바로가기</font> (모바일에서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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