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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우리의 운명 스탕달

<레 미제라블>의 그르노블에서 태어난 스탕달… <적과 흑> 통해 독재와 밀착한 종교권력 비판하다
등록 2016-04-09 17:32 수정 2020-05-03 04:28
프랑스 그르노블의 스탕달 생가, 브랑그 박물관의 스탕달 전시물(왼쪽부터). 그르노블의 자랑인 스탕달은 <적과 흑>에서 정치가 현대인의 운명임을 강조했다. 임헌영

프랑스 그르노블의 스탕달 생가, 브랑그 박물관의 스탕달 전시물(왼쪽부터). 그르노블의 자랑인 스탕달은 <적과 흑>에서 정치가 현대인의 운명임을 강조했다. 임헌영

스탕달(1783~1842)은 일곱 살 때 어머니를 잃은 상처로 유부녀의 사랑을 갈망하며 독신으로 살았다. 그의 고향 프랑스 그르노블은 론알프스 지역의 드라크와 이제르 두 강이 합류하는 풍치 좋은 산악지대다. 바스티유 요새를 오르내리는 달걀형 케이블카가 명물이다.

시 외곽 산꼭대기로는 ‘나폴레옹 코스’가 보인다. 엘바섬을 탈출한 ‘괴물’이 골프쥐앙에 상륙, 산길로 디뉴를 거쳐 그르노블에 이르렀던 코스다. 디뉴는 의 첫 장면의 무대다. 디뉴성당의 미리엘 주교는 은수저의 은혜로 장발장을 감화시켰는데, 그 모델은 미올리스 주교로, 디뉴 신학교를 졸업한 제자 샤스탕(한국명 정아각백) 신부를 한국으로 파견시킨 실존 인물이다. 디뉴에서 장발장은 신학교와 주교좌성당 앞 광장을 지나갔다. 광장 모퉁이에 있던 인쇄소는 나폴레옹이 엘바섬 탈출 뒤 첫 성명서를 인쇄한 곳이라고 은 밝혀준다.

샤스탕 신부는 기해박해(1839) 때 순교, 명동 대성당 지하 유해실과 절두산 순교성지에 안치되어 있다. 그곳에 가면 우리 시대의 미리엘 신부는 어때야 할지 생각해보자. 신학생들은 제1부 1장 ‘올바른 사람’을 꼭 읽었으면 좋겠다.

이 자세히 그린 예수회

그르노블의 자랑은 단연 스탕달이라 그르노블3대학을 스탕달대학으로 부르며 옛 시청사에다 기념자료실을 두고 있다. 그의 생가는 장자크 루소가(街) 14번지의 4층 건물 중 2층이지만 표지판만 남았다.

스탕달은 고루한 변호사로 왕당파였던 아버지에 반발해 열렬한 공화파가 되었고, 극도로 엄격했던 예수회의 훈육 때문에 신앙에 냉담했다. 그래서 나폴레옹 몰락 뒤 왕당파가 재집권해 백색테러를 자행하자 그는 해외로 떠돌거나 고등룸펜으로 지냈다.

도대체 세도가들은 예나 이제나 반성을 않는다. 대혁명 뒤 부르봉 왕가는 쫓겨나면서도 일말의 자책도 없이 망명했다가 나폴레옹 몰락 뒤 다시 왕정복고 했지만, 선정을 베풀기보다는 복수심에 불타 더 잔혹해져 결국 1830년 7월혁명을 자초했다.

7월혁명 직전 위기에 처한 왕권을 유지하려는 반혁명 음모를 꾸민 주체세력으로 스탕달은 예수회를 꼽았다. 종교개혁으로 약화되는 가톨릭을 부흥시키려고 결성된 예수회가 영국에서는 왕의 타도도 불사하는 비밀결사체가 되었지만, 프랑스에서는 왕권만이 가톨릭 신앙의 보루로 여겨 근왕파의 중추였음을 은 자세히 그려준다. 제2부 21장부터 전개되는 반혁명 비밀결사 회의는 왕권 유지를 위해 군의 강화와 외세의 지원 유치까지 논의한다.

딱 오늘 우리의 처지처럼
미슈 라 투르 부인 집 위로 보이는 브랑그성당 종탑. 임헌영

미슈 라 투르 부인 집 위로 보이는 브랑그성당 종탑. 임헌영

독재권력과 밀착한 신앙을 출세의 기반으로 삼은 게 소설의 주인공 쥘리앵 소렐의 비극이다. 프랑스 고전극을 비웃으며 인간의 운명을 좌우하는 건 정치라고 말한 것은 나폴레옹이고, 이를 다룬 소설이 이다.

우리의 정치 현실도 똑같다. 장관이나 국회의원조차 독재가 멋대로 조종하는 판이니 국민 개개인의 운명쯤이야! 그래서 정치는 현대인의 운명일 수밖에 없다.

제2부의 첫 장면은 쥘리앵이 파리행 우편마차에서 두 승객의 대화를 듣는 것으로 시작된다. 인쇄업자 출신인 40대 남자는 정치가 싫어 파리를 떠나 론강 근처 리옹 인근에서 잘 지냈는데, 시골 토박이 부르주아와 사제들의 꼴통 등쌀에 못 견뎌 도로 파리로 도주하는 처지다. “그 역겨운 선거” 때면 꼴불견이 극에 이르러 질린다. 국가란 배는 워낙 큰 돈 덩어리라 서로가 키 잡고 해먹으려는데, 평범한 승객은 구석 자리밖에 차지하지 못한다고 한탄하는 그는 정치를 타락시킨 범인으로 나폴레옹을 지목한다.

그러자 상대방은 나폴레옹 시대가 더 좋았다고 반박해 논쟁이 벌어지는데 딱 오늘의 우리 처지 같다. 왕당파들이 거짓 증언으로 생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워대는 꼴은 흡사 우리의 간첩 조작 사건을 연상케 한다.

범죄세력에 빌붙어 출세를 꿈꾸던 쥘리앵이 정신을 차린 건 애인이던 읍장 부인을 권총으로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친 죄로 법정에 서면서다. 20분간의 최후진술에서 그는 비천한 신분이라 죄가 아무리 가벼워도 “부유한 사람들의 오만한 사교계를 넘본 괘씸죄로 다시는 하층계급의 청년들이 그런 만용을 갖지 못하도록 하려는 게 이 재판”이라고 꼬집었다.

한 사제는 “어쩌면 쥘리앵은 순교자가 될지도 모르겠구나”라고 중얼거렸는데, 그 말은 적중했다. 그의 처형은 절대권력이 거슬리는 하층민을 합법적으로 청부살인한 판례가 됨직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브랑그 마을에서의 실제 사건 그대로다. 그르노블에서 북쪽으로 80km 떨어진 브랑그는 론강 언덕배기에 있다.

앙투안 베르테는 그르노블 신학교 학생으로 브랑그 동장 미슈 댁 가정교사로 들어가 미슈 라 투르 부인과 불륜을 저지른다. 일이 꼬여서 그는 성당에서 미슈 부인에게 권총을 발사했지만 그녀는 죽지 않았고, 자신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살인 미수인데도 그는 그르노블에서 스물다섯 살의 나이로 처형당했다.

달콤한 처세론이 아니길

브랑그성당 앞은 폴 클로델 광장이다. 로댕의 애인 카미유 클로델의 남동생인 이 외교관 출신의 극작가는 이 마을에서 만년을 보냈다.

“목적을 원하는 자는 수단을 원한다”는 쥘리앵의 처세론이 요즘 청년들에게 달콤하게 다가설까 염려스럽다. 차라리 정치가 현대인의 운명임을 더 일찍 깨달았으면 싶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세계문학기행



연재 순서


①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② 춘원 이광수의 양부, 일본의 괴벨스
③ 위대하고 혼란스런 파리의 빅토르 위고
④ 무시무시한 시절의 위고
⑤ 늙어서 오히려 진보한 위고
⑥ 민중의 눈으로 전쟁을 본 톨스토이
⑦ 인도주의 상징 톨스토이
⑧ 지복을 누린 괴테

⑨ 정치는 우리의 운명, 스탕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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