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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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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언비어 용의자 1호 러시아의 푸시킨

‘반골 시인’에 대한 차르의 편지 검열… 죽음 뒤에야 국가 감시 벗어날까
등록 2016-05-04 11:38 수정 2020-05-02 19:28
아르바트 거리의 부부상. 임헌영

아르바트 거리의 부부상. 임헌영

후계 없는 형(알렉산드르 1세)에 이어 즉위하려던 니콜라이 1세는 데카브리스트 반란을 피로 진압하면서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었다. 크렘린의 우스펜스키 사원에서 대관식(1826년 8월22일)을 올린 황제는 관용을 과시하고 싶었다.

푸시킨은 데카브리스트들에게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호소하며, 황제에게 그날 현장에 있었다면 자신도 가담했을 거라고 했다. 그 진솔함에 황제는 거주와 창작의 자유를 허락하되 황제가 직접 검열하겠다며, 푸시킨이야말로 가장 현명한 시인이라고 치켜세웠다. 차르(황제)는 릴레예프의 아내에게 금일봉을 보내 그 가족들이 황제를 위해 기도까지 올렸지만 릴레예프를 사형시키고 말았다.

푸시킨 감시위원회 구성

‘유럽의 헌병’이란 별명답게 차르는 교활했다. 나라를 온통 헌병관구 체제로 옥죄어서 직속 비밀정치경찰국 제3부를 전 국민 감시 사령탑으로 삼았다. 제3부 책임자 알렉산드르 베켄도르프는 헌병대장을 겸임, 푸시킨도 맡았다. 웬만한 여행은 다 불허였고, 유언비어나 이상한 글이 나돌면 그 창작 용의자 제1호로 찍혀 조사를 당했다. ‘푸시킨 감시위원회’가 구성된 적도 있다. 자신의 미발표 작품을 남들 앞에서 읽는 것도 금지였다.

차르는 푸시킨에게 를 써내라고 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런 요구는 정신적인 강제징용이자 반골 시인이 황제에게 봉사한다는 어용의 이미지를 덧씌우려는 의도였다.

잠깐 카드놀이에 빠지기도 했던 푸시킨은 마음을 다잡고 데카브리스트가 왜 실패했는가 궁금해 캅카스로 유형당한 동지들을 찾아 허가도 없이 훌쩍 떠났다. 그러나 감시의 눈이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데카브리스트들은 수동적인 군중을 영웅이 지도해서 역사를 가속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푸시킨은 역사적인 합법칙성을 인식해서 영웅들 자신이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쪽이었다.

감시 속에서도 그는 자신의 심미안에 흡족한 나탈리야 곤차로바와 결혼(1831년 2월18일), 모스크바의 아르바트 거리에서 신혼을 즐겼다. 서신 검열을 알고서 그는 아내에게 쓴 편지에다 모스크바의 우체국장 불가코프라는 파렴치한 놈은 남의 편지를 뜯어보거나, 자기 딸을 흥정하는 짓을 전혀 벌 받을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당신도 편지 쓸 때는 조심하라고 썼다.

불가코프의 둘째딸은 소문난 미녀로 니콜라이 1세와 가까웠다. 푸시킨보다 3주 먼저 결혼, 첫딸을 낳자 황제가 대부가 된 사실을 빗댄 것인데, 차마 이 편지를 차르에게 보고할 수는 없으리라는 계산이었다. 푸시킨은 이 편지를 베켄도르프의 개인비서로 있는 리체이(학습원) 시절의 친구에게 보여주기도 했다. 치밀한 골탕 먹이기였다. “아마 당신 편지도 뜯어보고 있을 테니까. 이런 게 바로 국가 안보라나.” 이러고도 점잖은 척하는 젠틀맨들이 사는 변소. 그게 페테르부르크다. 살다보니 익숙해진다고 시인은 썼다.( 유리 로트만 지음, 김영란 옮김, 고려대학교출판부 펴냄 참고)

온갖 꼬드김에 직설 시로 응수
푸시킨박물관에 있는 시인의 결투 당시 권총. 임헌영

푸시킨박물관에 있는 시인의 결투 당시 권총. 임헌영

베켄도르프는 차르에게 푸시킨 같은 골칫덩어리는 차라리 관직을 줘서 가까이서 보는 게 좋겠다고 건의, 9등관직 시종보로 임명했다(1833년). 통상 18살 정도의 귀족 자제들로 구성된 그 행렬에 34살 대시인을 앉힌 건 누가 봐도 조롱거리였지만 천재의 두뇌로도 모면할 방도가 없었다. 일설에는 차르가 곤차로바를 보려고 궁중 연회에 부부가 참여하되 실속은 없는 감투를 내렸다고도 한다. 예복도 안 만들어 친구들이 옷을 구해 강제로 입혀 궁중으로 들여보내진 푸시킨은 차르에게 집필 중인 를 화두로 꺼냈다. 차르를 한 방 먹인 것이리라.

푸시킨에게 새로운 고민이 생겼다. 아내가 궁중 파티를 아주 즐겨해 여러 가지로 타일렀지만 허사였다.

독재자 밑에서는 언제나 충성 경쟁이 그치지 않는다. ‘러시아의 안녕과 행복은 차르, 그리스 정교, 농민’이라는 반혁명 이데올로기의 창출자로 악명 높은 우바로프는 베켄도르프와 충성 경쟁 중 푸시킨에게 다가섰다. 온갖 꼬드김이 잇따랐으나 응하지 않자 이내 본색을 드러내, 도리어 모략에 앞장섰다.

시인은 “이제는 더 이상 이 귀족 집에서/ 애나 보는 짓은 하지 않아도 되리라./ (…)/ 계산할 때 마누라를 속이면서 몰래 챙기는 짓을 하지 않아도 되며,/ 국가 소유의 장작을/ 몰래 도둑질하는 짓도 그만둬야지!”(위 책 302쪽 재인용)라는 시로 응수했다.

우바로프의 사촌 처남은 상속자 없는 부호로 위독해졌다. 그 유산을 착복할 음모를 꾸미다가 사촌 처남이 도로 살아나자 도로아미타불이 된 우바로프를 풍자한 시다. 누구나 우바로프를 연상해서 물의가 일자 베켄도르프가 해명을 요구했다. 푸시킨은 그분이 정말 그런 짓을 했느냐고 반문해서 사건이 일단락됐다.

아내 풍문에 결투 신청, 죽음

프랑스 귀족의 아들로 7월혁명 뒤 출국, 네덜란드 공사의 양자로 신분을 세탁, 러시아에 굴러들어 근위대 소위가 된 제비족 조르주 단테스와 곤차로바 사이의 풍문은 푸시킨을 견딜 수 없게 만들었다. 페테르부르크의 ‘검은 강’(초르나야레치카)에서 결투(1837년 1월27일)로 치명상을 입고 이틀 뒤 시인은 차르의 감시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아니, 장례식조차 감시하에 치러진 뒤 헌병대가 프스코프주 스뱌토고르스키 수도원으로 푸시킨의 주검을 비밀리에 옮겨 안장해버렸다.

어느 책갈피에다 시인은 “현명한 사람들은/ 조용히 살아간다”라고 썼는데, 죽은 뒤에도 차르는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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