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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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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복을 누린 괴테 바이마르 권세에 취하다

하늘의 권능과 지상의 권세 불신한 천재… 도대체 나폴레옹에겐 왜 굴욕적이었나
등록 2016-03-31 18:38 수정 2020-05-03 04:28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생가에 있는 초상화(왼쪽)와 생가 전경. 임헌영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 생가에 있는 초상화(왼쪽)와 생가 전경. 임헌영

세계문학사에서 요한 볼프강 폰 괴테(1749~1832)처럼 모든 복을 신명껏 향유한 문인은 없다. 독일 프랑크푸르트 관광 제1코스인 그의 생가는 투르게네프의 영지와 쌍벽을 이룰 만큼 엄청나다. 온 집안이 돈으로 칠갑하기로는 단연 괴테 쪽이 앞선다. 나중에 어머니 혼자 30년간 살다가 매각했던(1795) 이 생가는 제2차 세계대전 중 피폭됐으나 전후에 복구, 1954년부터 개방됐다.

이 대저택에서 그는 태양이 처녀궁에 있던 정오의 종소리와 함께 사산아로 태어나 간신히 살아났다. 달의 방해로 죽을 뻔했으나 목성과 금성의 호의를 받은 태양의 기운으로 살아났다고 (괴테 지음, 박환덕 옮김, 범우사, 2006)은 풀이해준다.

“경건주의가 자유정신 억압”

여섯 살 때 겪은 리스본 대지진의 충격으로 그는 신의 존재를 회의하게 됐다. 1755년 11월1일 만성절 아침 9시40분경 시민들이 교회에 있다가 6만 명이 사망한 이 지진은 15m의 쓰나미까지 몰아친데다 6개월 동안 약 250회의 여진을 일으켜 영국, 아일랜드 남동부, 덴마크 남부, 오스트리아 서부 등에까지 영향을 미친 유럽의 공포였다.

“신은 정의로운 사람을 정의롭지 못한 사람과 더불어 똑같이 재앙에 희생시킴으로써 결코 아버지다운 존재로 자신을 증명하지 못했다”고 그는 에서 털어놓았다.

만년에 그는 “모든 종교는 신으로부터 직접 주어진 것이 아니라, 걸출한 사람들이 그들과 똑같은 대다수 민중들의 요구와 이해력에 맞추어 그들이 적응할 수 있게 만든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라고 할 만큼 신앙에 냉정했다.

이런 종교관인지라 괴테는 “경건주의가 만연하여 이 광신이 정치적인 경향을 띠고 전체주의에 편들어 모든 자유로운 정신 활동까지도 모두 억압하려고 한다고 탄식”하며, “그 신앙에 의해 군주의 환심을 사고 지위와 훈장을 얻으려 하고 있네!”라고 했다. 괴테가 본 “최초의 그리스도 교도들은 극단론자 출신 자유사상가들”이었다.( 요한 페터 에커만 지음, 곽복록 옮김, 동서문화사, 2007)

하늘의 권능에 낙담한 그에게 땅의 권세조차 불신토록 만든 사건은 일곱 살 때 겪은 7년 전쟁(1756~63)이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가 치른 이 동족상잔의 참극에서 외조부는 오스트리아를, 아버지는 프로이센을 지지하자 괴테는 두 왕권 다 “당파적인 불공평”으로 인식, 나중에 강력한 독일 통일론자가 되는 계기를 만들어주었다.

라이프치히대학 시절(1765~68), 그가 드나들었던 레스토랑 아우어바흐 켈라는 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파우스트를 데리고 맨 먼저 들렀던 명소다. 입구부터 실내 구석구석에 여러 장식들로 꾸며져 있다.

2년 뒤 슈트라스부르크대학으로 전학, 법학사(1771)로 변호사 개업을 한 괴테는 이듬해에 연수를 받으려 베츨라어로 갔다. 프랑크푸르트 남향 60km인 이 유서 깊은 제국 자유도시는 나폴레옹 침공 때 투항한 불명예로 몰락, 지금은 라이카 카메라의 메카와 의 무대로 유명하다.

괴테가 머물렀던(1772년 5~9월) 집은 변형, 스테이크 하우스로 단장됐지만 그의 애인 샤를로테 부프(애칭 로테)의 집과, 25살에 권총 자살한 친구 카를 예루살렘의 방과 책상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하노버의 명문 출신 요한 케스트너와 결혼한 로테는 으로 퍼진 온갖 상스러운 소문을 없애고자 정숙한 신앙인 주부로 8남4녀를 낳고 죽은 뒤 시댁 가족묘지(하노버 가든 묘지)에 묻혔다. 그녀의 유품과 남편 케스트너가 수집했던 예술품들은 그 후손이 세운 케스트너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는데, 나는 아직 하노버엘 가보지 못했다.

아우구스트 공과 수어지교
‘근대 민주헌법’으로 유명한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의 집. 괴테는 8살 아래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 왔다. 임헌영

‘근대 민주헌법’으로 유명한 바이마르에 있는 괴테의 집. 괴테는 8살 아래 아우구스트 공의 초청을 받아 이곳에 왔다. 임헌영

베츨라어에서 귀향한 괴테는 3년 뒤 26살인 1775년 1월에 아난 셰네만과 만나 4월에 약혼, 9월에 파혼하는 변덕을 부리다가 10월30일 집안의 완강한 반대를 물리치고 바이마르로 떠났다. 8살 아래인 카를 아우구스트 공이 이 천재 문사를 초청한 것이다.

여자만 보면 환장하는 이 대도무문의 호랑이 같은 지성을 불러간 아우구스트 공은 담비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공은 이 문사와 밤새워 음주와 토론으로 함께 뒹굴기도 했고, 덤불과 개천을 말 달리며 사냥, 밤엔 모닥불을 피워 오두막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는 미치광이 짓거리를 해댔다. 정치적 궁합을 시험한 셈인데, 둘은 세계 정치사상 가장 아름다운 군신관계의 시범이 될 만하다.

공을 이토록 훌륭하게 가르친 스승은 궁정 고문관인 시인 크리스토프 빌란트로 그는 “6년 후에는 그를 만나기 위해 온 세계에서 찾아오는 인파로 줄을 잇는 작은 왕국을 보게 될 것이네”라고 자신만만했다. 훌륭한 스승 밑에 위대한 지도자가 나온다는 걸 입증해준 대목이지만, 세네카와 네로의 사제지간을 보면 스승이 아무리 위대해도 막돼먹은 제자라면 어쩌겠는가.

온천 휴양지 카를스바트(현 체코. 베토벤도 단골)에 갔을 때 몰래 빠져나가 이탈리아로 2년간 여행을 떠나버려 비판자들이 극성을 떨었지만 1800탈러의 보수를 그대로 지급했다는 사실은 아우구스트가 얼마나 괴테를 신임했던가를 입증해준다.

이 수어지교(水魚之交)로 괴테는 평생 엄청난 특권과 영광을 누렸고, 아우구스트 공은 학문과 문화예술의 창달에다 독일 역사상 첫 민주헌법을 제정(1816)했을 뿐 아니라 통일에도 기여한 명군주라는 명성을 남겼다. 20세기 들어 모든 나라들의 헌법 제정 모델이 된 바이마르 헌법의 탄생지로도 유명한 이곳에는 괴테의 후반기 인생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살벌한 전쟁의 공포!

샤를로테 폰 슈타인 부인과의 사랑, 괴테의 초치로 그리로 간 헤르더와 실러 등과, 잠시 거쳐간 프란츠 리스트, 니체, 쇼펜하우어의 어머니 등등 온통 거리 전체가 문화사다.

바이마르에서 괴테가 처음 살던 일름 강변 숲 속의 이층집은 소박하나, 1782년 이사한 현 괴테박물관은 생가보다 더 으리으리하다.

남의 집이 좋다고 시비 걸 생각은 전혀 없으나, 이토록 온갖 감투에다 호사롭게 살면서 과연 국민이나 나라 걱정은 얼마나 했는지 추궁하지 않으면 인문학자 자격이 없다.

나폴레옹 군이 바이마르로 진격한 것은 1806년 10월14일. 그날 저녁 포탄이 지붕을 뚫고 지나가며 방화와 약탈이 시작됐다. 술 취한 프랑스군은 괴테의 저택에서 음식을 강요하며 주인이 나와 인사하라고 생떼도 부렸다. 점령군에게는 대문호도 수틀리면 총 한 방에 골로 보낼 수 있는 극한상황이었다. 아, 이 살벌한 전쟁의 공포!

천재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18년간 동거, 자식까지 낳은 크리스티아네 불피우스의 용감무쌍한 활약 덕분이라 괴테는 부랴부랴 정식 혼례식(10월19일)을 올렸다. 이런데도 침략자에 대한 적대감이 생기지 않을까. 의 피에르 베즈호프는 모스크바 귀족들이 다 입 모아 비난하는 나폴레옹을 옹호해 왕따가 됐지만 그가 러시아를 침략하자 증오심으로 암살을 시도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천재는 그 난리를 겪고도 “프랑스혁명의 극복자”라는 나폴레옹에 대한 종전의 평가를 수정해 “분열된 대륙의 질서 유지자”라고 평가절상했다. 1808년 10월 그는 나폴레옹을 세 번이나 ‘알현’했는데, 일부 기록은 문인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기에 족하다. 이 천재는 침략군이 준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프랑스가 물러간 뒤 의용군 모집 때까지도 달고 있었다.( 페터 뵈르너 지음, 송동준 옮김, 한길사, 1998)

다급한 변명인가 실언인가

그로부터 16년 뒤 가난한 소매 행상인의 아들인 요한 에커만이 그에게 따졌다. 침략 아래서 독일은 저절로 저항의 불이 붙고 있었기에 굳이 시인이 나설 필요가 없었다는 괴테에게 그는 ‘왜 당신은 그때 침묵했느냐’고 추궁했다.

천재는 “증오심이 일어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무기를 잡을 수 있단 말인가!” “증오할 것이 없는데 어떻게 증오의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인가! (…) 나는 프랑스인들을 미워하지는 않았어. (…) 프랑스는 이 지구상에서 가장 문화가 앞선 국가 중의 하나이며, 나 자신의 교양의 대부분도 그 덕을 입고 있는데 어떻게 그 군민을 내가 미워한단 말인가!”라고 변명했다.(

다급한 변명인지 단순한 실언인지 모르지만 너무나 황당한 논리로 이렇게 망가지는 천재도 있구나 싶다.

임헌영 문학비평가·민족문제연구소 소장
임헌영의  세계문학기행



연재 순서


① 일본의 윤동주, 일본의 톨스토이
② 춘원 이광수의 양부, 일본의 괴벨스
③ 위대하고 혼란스런 파리의 빅토르 위고
④ 무시무시한 시절의 위고
⑤ 늙어서 오히려 진보한 위고
⑥ 민중의 눈으로 전쟁을 본 톨스토이
⑦ 인도주의 상징 톨스토이

⑧ 지복을 누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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