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위 31도55분35초, 동경 34도48분12초.’ 이스라엘 도시 텔아비브에서 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인구 3만 명 남짓한 소도시 ‘네스치요나’가 있다. 그곳 한켠에 이스라엘 정부가 운영하는 ‘생물학연구소’가 있다. 1급 기밀시설인 그곳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다. 30여 년 전, 전도유망했던 어느 역학자의 삶이 그곳에서 지워졌다.
폴란드, 소련, 스웨덴, 이스라엘
아브라함 마레크 ‘마르쿠스’ 클링베르크는 1918년 10월7일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유서 깊은 유대인 랍비 가문이었다. 유년 시절을 함께 보낸 할아버지 모셰 차임 클링베르크 역시 명망 높은 랍비였다. 집안 전통에 따라 유대종교학교에 보내진 소년은 10대에 접어들면서 종교에 등을 돌렸다. 클링베르크는 1935년 바르샤바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먹구름이 1939년 폴란드를 덮쳤다. 독일군이 국경을 넘어오자, 부모는 아들을 소련으로 탈출시켰다. “그래도 가족 중에 한 명은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니. 이제 그만 가거라.” 클링베르크는 소련의 벨라루스공화국 수도 민스크에서 의학 공부를 이어갔다.
1941년 6월22일 독일군이 소련을 침공했다. 클링베르크는 ‘붉은 군대’에 자원 입대했다. 의무장교로 임관한 그는 최전선을 누볐다. 그해 10월 눈먼 파편이 날아와 오른쪽 다리에 박혔다. 후송돼 치료를 받은 그가 회복됐을 무렵, 우랄산맥 한 자락의 몰로토프(현 페름)에서 발진티푸스가 발병했다. 현장으로 급파된 그는 창궐하는 전염병과 맞서며 역학자의 길로 들어섰다. 이후 모스크바의 중앙고등의학훈련연구소에 진학한 그는 본격적으로 전염병학에 천착했다.
1943년 말 소련군이 벨라루스공화국을 탈환했다. 그는 선임역학자로 임명돼 현지로 파견됐다. 전쟁은 곧 끝이 났다. 소련군 대위로 전역한 그는 폴란드로 귀국했다. 돌아온 집에, 살아남은 가족은 없었다. 그의 부모와 남동생은 1942년 8월19일 나치의 트레빌린카 강제수용소에서 살해됐다. 폴란드 보건부 역학국장 직무대행으로 취임한 그는 그곳에서 미생물학자 완다 야쉰스카야(본명 아드쟈 에이스만)를 만났다. 전쟁 때 바르샤바의 게토에서 기적처럼 살아남은 유대인이었다. 두 사람은 1946년 결혼 직후, 서유럽으로 이주했다. 스웨덴에 정착한 부부는 딸 실비아를 얻었다.
1948년 11월, 클링베르크 가족은 건국의 혼란이 가시지 않은 이스라엘로 재이주했다. 이스라엘군에 징집된 그는 의무장교 복무를 시작했다. 1950년 3월 중령으로 진급한 그는 중앙군사의학연구실험실장 등 군사의학 분야의 요직을 두루 거쳤다. 전역 직후인 1957년 클링베르크는 네스치요나의 ‘생물학연구소’ 부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나이 서른아홉 때의 일이다.
생물학연구소에서 근무하면서도 그는 정력적으로 대외 활동을 수행했다. 1969년엔 텔아비브대학교 의대에 출강을 시작했고, 1978년부턴 예방·사회의학과 학과장 직을 맡았다. 1974년엔 국제적 차원에서 선천적 기형을 모니터하기 위한 학술단체도 설립했다. ‘유럽 선천성 기형학회’ 회장을 지낸 클링베르크는 1982년 영국 에든버러에서 열린 국제전염병학회 연차 총회에서 이사로 선출되는 등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어느새 세계보건기구가 주최하는 전염병·유행성 질환 관련 토론회의 단골 손님이 됐다. 파국은 그 무렵 찾아왔다.
실종, 감금 그리고 석방1982년 소련에 살던 한 유대인이 당국의 ‘출국비자’를 얻어 이스라엘로 건너왔다. 곧 정보 당국과 접촉한 그는 자신이 소련의 스파이라고 자복했다. 이스라엘 대외 정보기관 ‘신베트’는 그를 이중간첩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그를 통해 오랜 세월 주목해온 한 인물이 소련의 첩자라는 ‘강력한 정황증거’를 얻어냈다. 확증이 필요했다. 신베트는 그를 붙잡아 자백을 받아내기로 했다.
1983년 1월19일 클링베르크는 출장용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며칠 전 접촉해온 신베트 요원이 그를 공항까지 데려다주기로 했다. 신베트 쪽은 “싱가포르의 화학공장에서 폭발사고가 났는데,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전문가를 파견하기로 했다”며 그에게 출장을 제안했다. 차에 오른 클링베르크가 도착한 곳은 공항이 아니었다. 신베트가 안가로 사용하는 텔아비브의 한 아파트였다.
가혹한 심문이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열흘 만에 그가 입을 열었다. 는 지난 11월30일치에서 이렇게 전했다. “그의 암호명은 ‘록’, 운명이란 뜻이다. 텔아비브 거리의 벽면에 분필로 암호를 써놓으면, 그를 담당했던 소련 정보요원 ‘빅토르’가 접선해왔다. …수훈이 인정돼 소련에서 두 번째로 높은 영예인 ‘붉은 노동기장’이 클링베르크에게 비밀리에 수여되기도 했으며….”
클링베르크가 언제부터 소련의 ‘스파이’로 활동했는지에 대해선 주장이 엇갈린다. 이스라엘 정보 당국은 그가 스웨덴에 머물고 있던 1946년 소련 정보요원이 그와 접선했다고 주장한다. 이스라엘로 이주한 것도 소련의 ‘지령’에 따른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영국 일간지 등이 전한 클링베르크의 공소 기록을 보면, 생물학연구소 근무를 시작한 1957년부터 본격적인 스파이 생활을 했다고 그는 자백했다. 그때부터 1976년 무렵까지 이스라엘의 생화학무기 개발 관련 정보를 소련 쪽에 넘겼다는 게다.
클링베르크의 체포 소식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졌다. 그가 ‘실종’된 이후 주변에선 온갖 억측이 난무했다. 심지어 “클링베르크가 정신착란을 일으켜 유럽 어딘가의 정신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문까지 돌았다. 그러는 사이 비공개 군사재판에 회부된 그는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직업은 ‘사회과학잡지 편집장’으로, 이름은 ‘아브라함 그린베르크’로 바뀌었다. 그는 감시가 삼엄하기로 악명 높은 아슈켈론 교도소에 수감됐다. 10년에 걸친 독방 생활의 시작이었다. 이스라엘 당국은 소련이 붕괴한 뒤인 1993년에야 그의 수감 사실을 처음으로 공식 확인했다.
클링베르크의 부인 완다는 1990년 9월 숨졌다. 유언에 따라 화장된 그의 주검은 프랑스 파리의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앞서 좌파운동가로 성장한 딸 실비아는 1970년대 말 프랑스로 이주했다. 그는 프랑스 공산당에서 활동하며 철학교수인 알랑 보사와 결혼했다. 클링베르크의 손자 이안 보사는 현재 프랑스 공산당 소속 파리 시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7년, 세계적 인권단체 앰네스티가 고령과 건강을 이유로 클링베르크의 석방을 이스라엘 정부에 촉구했다. 수감 중 클링베르크는 몇 차례 뇌졸중을 앓았던 터다. 1998년 10월 마침내 그는 옥문을 나섰다. ‘기이한 가택연금’의 시작이었다. 감시카메라 설치·운용 비용은 물론 감시요원의 급여까지 클링베르크가 부담해야 했다. 이 때문에 은행대출까지 받은 그는 원리금 납부를 위해 결국 살던 아파트까지 처분해야 했다.
20년형을 만기로 채운 2003년, 클링베르크는 ‘네스치요나’ 관련 모든 사실을 함구하겠다는 각서를 쓴 뒤에야 딸이 사는 프랑스로 출국할 수 있었다. 그는 원룸 아파트에서 홀로 기거했다. 프랑스 시민권은 신청하지 않았다. 스위스 등지의 여러 대학에서 강의도 했지만, 수감 생활 동안 얻은 병마가 툭하면 그를 병상으로 끌어갔다. 그는 2007년 란 회고록을 변호사의 조언을 받아가며 출간했다.
“무기 정보 공유, 공산주의자 신념”“냉전 시절, 과학지식의 불균형이 초래할 수 있는 위협을 막기 위해 수행했던 ‘작은 일’에 대해 단 한 번도 후회한 일이 없다. 소비에트가 붕괴한 뒤에도 이런 내 감정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소련은 나치의 위협을 막았고, 내 생명을 구했고, 내가 역학자로 성장할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무엇보다 파시즘과 맞서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줬다. …한번도 내가 ‘스파이’라고 생각해보지 않았다. 소련에 정보를 건넨 건 공산주의자로서의 내 신념, 곧 무기와 관련된 정보는 모든 나라가 공유해야 한다는 확신에 따른 행동이었다.”
미국 군사안보 전문 사이트 ‘글로벌 시큐리티’의 자료를 보면, 이스라엘은 생화학무기 생산 능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또 폭탄·로켓·포탄 형태로 생화학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스라엘의 생화학무기 관련 시설은 네스치요나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지만, 공개된 관련 정보는 거의 없다. 이스라엘은 화학무기금지협정(CWC)에 가입했지만, 아직까지 의회 비준을 받지 않은 상태다. 이스라엘은 생물무기금지협정(BWC)에는 가입하지 않았다. 클링베르크는 지난 11월30일 파리에서 조용히 세상을 등졌다. 향년 97.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한겨레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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