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12일 영국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제러미 코빈이 당대표로 선출됐다. 당내 좌파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1차 투표에서 59.5%를 득표했다. 이로써 1930년대 조지 랜즈버리 이후 영국 노동당은 가장 ‘왼쪽’에 서 있는 당대표를 얻었다. 이날 당선 연설을 마친 코빈은 맥줏집으로 자리를 옮겨 뒤풀이를 했다. 1990년대 토니 블레어의 ‘신좌파’가 내다버린 옛 노동당 당가인 ‘적기가’를 팔뚝질을 해가며 목청껏 불렀다.
짤막한 연설도 했다. 유튜브에 올라온 현장 화면을 보면, 코빈은 왼손으로 두 가지 물건을 들고 있다. 엄지와 검지, 중지를 이용해 마이크를 잡았다. 약지와 새끼손가락 사이엔 천조각이 걸려 있다. 그렇게 그는 7분 남짓 말을 잇고는, 마이크를 오른손으로 고쳐잡았다.
아버지로부터 정치, 어머니에게선 신념 배워
“여기 들어오는 길에, 누가 이걸 주더군요. 같이 읽어보시죠.” 코빈이 왼손에 들고 있던 천조각은 ‘레디컬티타월닷컴’이란 업체가 제작한, 가격 9.95파운드짜리 티타월이다. 한때 ‘영국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로 불렸던 이의 캐리커처와 함께 그가 남긴 문구가 그 안에 새겨져 있었다. “희망은 진보의 연료, 두려움은 당신이 스스로를 가두는 감옥이다. 토니 벤.”
앤서니 닐 웨지우드 벤(사진)은 1925년 4월3일 런던의 개신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친가와 외가 할아버지 모두 하원의원을 지냈다. 그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윌리엄 벤도 하원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웨스트민스터 국회의사당 앞마당이 어린 벤의 놀이터였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표현은 이럴 때 쓴다.
자유당 소속이던 윌리엄 벤은 1928년 노동당으로 당적을 옮겼다. 이후 노동당 내각에 참여해 인도 담당 장관 등을 지내던 시절인 1931년 영국을 방문한 마하트마 간디를 집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토니 벤이 6살 때 일인데, 그는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당시 경험을 이렇게 떠올렸다. “무슨 말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확실히 기억하는 게 있다. (간디는) 여느 어른들처럼 내 머리를 쓰다듬고는 아버지와 얘기하러 가지 않았다. 형과 나와 함께 바닥에 앉아 한참이나 얘기를 나눴다.”
아버지를 통해 일찌감치 ‘정치’에 눈을 떴다면, 신학자이자 여성운동가였던 어머니에게선 ‘신념’을 배웠다. 그는 2012년 3월20일 와 한 인터뷰에서 “어머니는 매일 성서를 거르지 않고 읽으셨는데, 언젠가 하신 말씀을 평생 잊지 못한다. ‘성서는 힘을 가진 왕과 올바름을 가르치는 선지자 사이의 투쟁 이야기’라는. 어머니는 왕 대신 선지자 편에 서라고 하셨다”고 말했다.
1943년 7월 웨스트민스터고교 졸업과 함께 공군에 입대한 그는 아프리카의 로디지아(현 짐바브웨)에서 조종사 훈련을 받기도 했다. 종전과 함께 1945년 8월 전역한 그는 옥스퍼드대학교 뉴칼리지에 진학했다. 학업은 몰라도 연설은 빼어나, 1947년엔 학생회장에 선출됐다. 그가 평생의 동반자인 미국 유학생 캐롤라인 미들턴 드캠프를 만난 것도 대학 교정에서다. 벤은 드캠프를 만난 지 9일 만에 공원 벤치에서 청혼했고, 부부는 이 벤치를 시 당국의 허락을 받아 나중에 집으로 옮겨왔다.
대학 졸업 뒤 잠시 <bbc> 프로듀서 생활을 한 벤은 1950년 정계에 입문했다. 그해 건강 악화로 은퇴한 스태포드 크림스의 뒤를 이어 브리스틀 사우스이스트 지역구 보궐선거에 노동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됐다. 그의 나이 25살 때였다. 프로듀서 경험을 바탕으로 선거운동 방송을 맡는 등 젊은 벤은 차곡차곡 경력을 쌓아갔다. 하지만 1960년 그의 정치 이력은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된다. 귀족(자작)이던 부친이 숨지면서, 그가 작위를 자동 승계하게 된 탓이다. 영국 귀족은 하원이 아닌 상원에서 활동한다. 벤은 즉시 하원에서 축출됐다.
25살 하원의원 당선 뒤 노동당의 ‘왼쪽’ 지켜
그대로 물러설 그가 아니었다. 벤은 귀족 작위 승계를 거부하고, 1961년 5월 치러진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선거에선 이겼지만, 후보 자격이 없다는 이유로 의원직을 인정받지 못했다. 벤은 싸움을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63년 귀족법 관련 조항 개정을 이끌어냈다. 그는 그해 8월20일 치러진 보궐선거에서 당선돼 의회로 복귀했다. 1964년 해럴드 윌슨 총리 정부에서 우정국장을 시작으로 벤은 1970년까지 기술부·에너지부 등을 두루 거치며 각료로 활동했다. 어느새 당 지도부의 익숙한 얼굴이 됐지만, 국유화 정책 등을 두고 당내 갈등이 깊어진 시기이기도 하다. 이 무렵 벤에겐 “내각에 진출한 뒤 더욱 급진적으로 바뀐 드문 인물”이란 평가가 따라다녔다.
1979년 5월 마거릿 대처의 시대가 열렸다. 선거에서 패한 노동당은 ‘더 오른쪽’으로 나아가려 했다. 벤은 “얼음판 녹는 줄도 모르고 스케이팅을 하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당내 좌파 진영을 등에 업고 1981년 전당대회에 부대표로 나선 그는 ‘주류’인 데니스 힐리에게 1%포인트 차이로 석패했다. 이때 벤의 선거운동을 지원했던 제러미 코빈은 2년 뒤 하원의원에 당선됐다.
노동당이 내분으로 휘청이는 새, 포클랜드 전쟁을 승리로 이끈 보수당 정부는 1983년 총선에서 다시 한번 압승을 거뒀다. 당시 총선에서 선거구 획정으로 지역구가 사라진 벤은 브리스틀 남부로 옮겨가 출마했지만 보수당 후보에 밀렸다. 그는 1년 뒤인 1984년 3월 탄광지역인 체스터필드로 지역구를 옮겨 당선돼 의회에 복귀했다. 그는 폐광에 맞선 탄광노동자 파업을 적극 지원했지만, 당 지도부는 탄광노조와 선을 그으려 했다. 벤은 1988년 전당대회에서 닐 키녹 당대표에게 도전장을 던졌지만, 이번엔 큰 표차로 밀렸다. 잇따른 선거 패배로 당내 좌파의 기반이 무너진 게다. 한때 노동당 전당대회를 쥐고 흔들었던 토니 벤의 시대는 그렇게 저물어갔다.
1994년 전당대회에서 ‘제3의 길’을 내건 토니 블레어가 당대표에 올랐다. 노동당은 오랜 야당 생활을 접고, 이듬해 집권에 성공했다. 당은 계속 오른쪽으로 나아갔다. 반세기를 함께한 부인이 암 선고를 받은 2000년 벤은 미련 없이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그는 “정치에 좀더 집중하고 싶어서 의회를 떠난다”고 말했다.
실제 그의 정치는, 정치권을 떠난 뒤에야 꽃을 피웠다. 그가 창설한 ‘전쟁반대연합’(STW)이 2003년 2월 런던에서 주최한 이라크전 반대 집회엔 영국 역사상 가장 많은 75만 명 이상이 참가했다. 반전 집회에 나설 때마다, 그는 유엔헌장 전문을 입에 올렸다. “우리 연합국 국민들은 우리 일생 중에 두 번이나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인류에 가져온 전쟁의 불행에서 다음 세대를 구하고….” 미-영의 이라크 침공을 불과 몇 주 앞두고 이라크를 방문해 사담 후세인을 만나기도 했던 그는 만년까지 “토니 블레어를 전범재판소에 세워야 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말년에 무너진 좌파 기초 세우는 데 힘 쏟아
“좌파에겐 ‘직업적 비관주의’란 특징이 있다. (그러나) 우린 고립된 소수가 아니다.” 평화운동과 함께 그가 열정을 기울인 것은 무너진 좌파의 기초를 다시 세우는 일이었다. 80대로 접어든 뒤에도 전국을 돌며, 하루에도 몇 차례씩 연단에 올랐다. “진보는, 인간의 마음속에서 불타고 있는 두 개의 횃불로 만들어진다. 불의에 대한 분노와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희망 말이다.” 그는 2013년 3월25일 옥스퍼드대 학생회 간담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1945년 총선 때다. ‘전시에 폭격을 해야 하는데, 예산이 부족해 못한다는 소리 들어본 적 있나? 사람 죽이는 데 쓸 돈이 있다면, 사람 살리는 데 쓸 돈도 당연히 있다.’ 그렇게 국민건강보험(NHS) 제도를 실현시켰다. …처음엔 당신의 주장을 무시할 것이다. 그다음엔 미쳤다고 할 것이다. 그러곤 위험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나면, 더 이상 당신의 말에 이의를 다는 사람이 없게 될 것이다. 노예제도 폐지도, 여성 참정권 인정도, 다 그렇게 이뤄졌다. 모든 진보가 그렇다.”
토니 벤은 2014년 3월14일 런던 자택에서 자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숨을 거뒀다. 향년 88. 그해 3월27일 열린 그의 장례식은 조문객들의 ‘적기가’ 합창으로 마무리됐다.
정인환 영상센터 기자 inhwan@hani.co.kr</b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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