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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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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터전서 밀려나는 프농족의 시름


외국 고무업체에 밭 빼앗기고 크메르인 이주로 원주민 공동체 점차 파괴돼
등록 2009-09-03 16:01 수정 2020-05-03 04:25
사진작가 임종진씨가 캄보디아를 여행하며 오지의 소수민족, 장애인 등 그 사회에서도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기록을 보내왔다. 몇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편집자

차창 문을 내리니 안으로 파고드는 바람의 기운이 예사롭지 않다. 툭 트인 사방은 푸른 하늘과 초록빛 산등성이가 맞닿아 이룬 고운 선으로 이분된, 더없이 그림 같은 풍경이다. 몇 시간째 자동차 안에서 뻐근해진 몸이 자꾸 아우성이다. 바깥세상에 몸을 내린다. 청정한 기운이 바람을 타고 온몸을 휘감는 것이 그대로 날아오를 것만 같다. 캄보디아 동북부 산악지대인 몬둘키리주의 숲바람이 마치 고향 찾아온 자식을 맞는 어머니처럼 아낌없이 품을 내준다.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란 이런 풍경을 말함일까. 우리의 노랫가락 한 줄이 절로 떠오르는 몬둘키리 초입의 풍경에 반해 그대로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름을 이불 삼아 홀로 서 있는 작은 집 하나가 그렇게 시선을 붙든다.

푸른 초원 위의 그림 같은 집이란 이런 풍경을 말함일까. 우리의 노랫가락 한 줄이 절로 떠오르는 몬둘키리 초입의 풍경에 반해 그대로 차를 멈출 수밖에 없었다. 구름을 이불 삼아 홀로 서 있는 작은 집 하나가 그렇게 시선을 붙든다.

캄보디아 동북부 외진 산악지대

라타나키리주와 더불어 숲이나 밀림을 뜻하는 크메르어 ‘키리’를 지명으로 사용하는 이 지역은 캄보디아에서 가장 외진 산악지역이자 그만큼 사람 손때가 덜 묻은 곳이다. 이곳에서 오래도록 터전을 일구어 살아온 프농족 사람들. 원주민인 그들은 이 나라의 주류인 크메르족에 비해 대체로 키가 작고 피부색은 좀더 어두우며 얼굴 윤곽이 뚜렷한 편이다. 크메르어와 다른 고유 언어를 사용하는 이들은 독립을 원했던 전력 탓에 캄보디아 내에서도 박해와 멸시를 피하지 못했다.

수도 프놈펜을 출발해 거친 비포장길에 터덜거리며 8시간을 달려 도착한 주도 센모노롬에서 다시 차로 40여 분을 더 들어가야 프농족이 사는 가장 큰 마을 부스라(Bousra)에 도착할 수 있다. 빽빽한 숲 사이로 놓인 흙길을 따라가는데, 난데없이 포장도로가 나오더니 바로 검문소가 버티고 있다. 이 나라 물가로 보아 만만치 않은 1만5천리엘(약 4천원)을 통행료로 내야 한단다. 마을에 오갈 때마다 내는 통행료는 도로를 건설하는 데 들어간 비용을 거둬들이는 것이라고 한다. 지역 주민들의 편의를 위해 도로를 닦았다면 통행료쯤 마다할 이유는 없지만, 실상 이 도로가 현 정부의 고위급 인사들과 결탁한 외국 고무 채취업체들과 벌채사업꾼들의 이권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언뜻 보기에도 한두 번의 우기를 겪으면 금방 쓸려 내려갈 것처럼 부실한 포장도로는 그나마 얼마 안 가 끊기고 만다. 개운찮은 뒷맛을 뒤로하고 다시 흙길을 내달리는데, 숲 위에 걸린 무지개가 슬며시 기분을 달래준다.

전기 제대로 안 들어와 어둠 속 달빛만

늦은 오후의 부스라에는 어스름한 저녁 기운이 서서히 내려앉고 있었다. 숙소 앞마당에 짐을 푸는 사이 호기심을 품은 동네 꼬마들이 갑자기 나타난 이방인에게 자꾸 시선을 던진다. 어딜 가나 아이들은 여행지의 설렘을 부드러이 다독여주는 소중한 존재다. 개구쟁이들과 어울려 공을 차다가 문득 마당 한켠에서 아기를 업고 가만히 서 있는 소녀에게 눈길이 멈춘다. 놀자고 보채는 개구쟁이들 틈을 빠져나와 느린 걸음으로 다가가는데, 마주친 눈길을 피하지 않던 소녀가 보조개를 드러내며 살짝 웃는다. 아직 친구들과 소꿉장난이나 할 만한 나이의 앳된 얼굴이다. 마당을 채워가는 어둠 속에서 소녀의 눈은 오히려 점점 맑게 빛을 발한다. 표현하기 어려운 신비로움이다. 낡고 때 묻은 옷차림이나 빗질도 제대로 안 된 푸석한 머릿결쯤은 아무런 시선을 끌지 않는다. 소녀의 이름은 츠메이, 열 살이란다. 마치 맘에 꼭 드는 선물을 받은 양 츠메이와의 만남이 작지 않은 기쁨으로 다가온다.

얼마 전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는 마을의 밤 풍경은 고즈넉했다. 가까이 국경을 맞댄 베트남에서 끌어왔다는 전기가 불을 밝힌 곳도 일부 있었지만, 대부분의 집들은 어둠 속에서 달빛만 머금고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걸어도 15분 안팎이면 다 돌아볼 만큼 작은 마을 부스라는 겉으로 보기엔 그저 평범한 시골 마을이다. 그러나 최근 몇 년 사이 외부인들의 이주로 드리우기 시작한 그늘은 생각보다 짙다. 마을의 중심지인 네거리의 상점 주인들도 모두 외부인인 크메르인이다. 센모노롬이야 그렇다 해도 프농족의 원래 터전인 이곳마저 이미 자본의 물결이 빠르게 잠식하고 있었다.

말라리아에 걸려 아무 일도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 름의 가족. 첫딸 니암(12), 막내 팟(6), 름, 아들 함(13), 남편 차(52)가 함께 집에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다(왼쪽부터).

말라리아에 걸려 아무 일도 못하고 집에서 쉬고 있는 름의 가족. 첫딸 니암(12), 막내 팟(6), 름, 아들 함(13), 남편 차(52)가 함께 집에 모여 가족사진을 찍었다(왼쪽부터).

다음날 아침 네거리 찻집에서 커피를 마시며 가만히 마을을 바라보는데, 역시 크메르인인 주인장 봉 섬밧(78)이 자꾸 말을 건다. 전직 의사라는 그는 자식 자랑, 재산 자랑에 한참 침을 튀긴다. 근래에 전기도 들이고 도로도 새로 내서 세상이 살 만해졌다는 그의 얘기를 뒤로하고 다시 마을을 둘러본다. 진흙탕길에서도 움직일 수 있다는 옛 소련제 트럭 몇 대가 탱크처럼 위용을 과시하며 길가에 주차돼 있고, 점령군처럼 골목 한켠을 통째로 차지한 프랑스 고무 채취업체 정문엔 수시로 작업 차량들이 들락거렸다. 전기가 들어오고 도로가 포장되는 이유는 이곳 주민보다는 이런 업체들의 필요에 따른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쉼없는 벌목 뒤 고무나무 심어

약간의 쌀농사와 더불어 옥수수, 채소 등을 키우며 주민들끼리 공동체 생활을 해오던 프농족 고유의 생활 방식은 외부 사람들이 들어오면서 급속도로 바뀌어갔다. 천혜의 비옥한 토양을 가진 이 지역은 고무나무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지녔기에, 정부를 등에 업은 외국 고무 채취업체들이 쉼없이 벌목을 한 뒤 고무나무를 심고 있는 심각한 상황이다. 정부가 좋은 값에 원주민들로부터 땅을 사서 업체에 제공하고 있다고 선전하지만, 이는 사실과는 동떨어진 얘기다. 오래도록 이웃들과 함께 밭농사를 지으며 순박하게 살아온 프농족은 애초부터 토지문서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을뿐더러, 평소 정책적인 혜택에서 배척돼온 이들에게 제대로 보상을 해준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얘기다. 현실에 빨리 적응한 일부를 제외한 절대다수의 주민들은 버젓이 지어먹던 밭을 빼앗기고도 별다른 하소연도 없이 그저 한숨만 내쉬는 실정인 것이다.

마을을 돌아보니 어렵지 않게 현실을 확인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도 외부 이주민들과 프농족의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말라리아에 걸려 일도 못하고 집 안에만 있다는 름(45)의 집을 찾았다. 흡사 우리네 초가집 같은 생김새의 프농족 전통가옥 안에서 만난 그녀의 가족은 남편과 아이들을 포함해 모두 다섯 명이다. 한눈에 보아도 어려운 살림임을 알 수 있는데, 름의 등 뒤로 연둣빛 플라스틱 장바구니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다. 가족의 먹을거리를 준비하기 위해 그녀가 항상 들고 다녔을 장바구니는 오래도록 할 일을 못한 양 덩그러니 자리만 차지하고 있었다. 병든 남편을 대신해 가장 역할을 해온 그녀였기에 얼굴에 시름이 가득하다.

몇 집 건너 또 다른 집의 문을 두드리니 톨(65)이 술이 덜 깬 얼굴로 일어나 앉는다. 한낮에 이미 술이 불콰해진 채 자고 있던 그는 정신을 차리더니, 며느리와 손자 셋을 놔둔 채 1년 전쯤 목을 매 자살했다는 외아들 얘기부터 꺼낸다. 밭도 빼앗긴데다 일할 체력도 바닥난 톨은 가슴이 답답하고 팔다리까지 저리다면서도 남은 가족 걱정에 한숨 섞인 넋두리를 거두지 않았다. 구호기관에서 나눠주는 분유로 돌도 지나지 않은 막내손자를 키우고 있다고, 자신은 곧 죽을 테니 괜찮지만 젊은 며느리가 불쌍해 눈을 감을 수도 없다고 말하며 그는 애꿎은 담배만 뻑뻑 피워댔다. 옆에 있던 며느리 클린(25)은 프농족 특유의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듣고만 있다. 그녀가 빚는 전통술로 이 집안은 간신히 생계를 유지하고 있단다. 무슨 위안이라도 될까마는 가족사진을 몇 컷 찍어 건네주려는데, 둘째아이 타(6)는 혼자 떨어져 가까이 오지 않는다. 그대로 사진을 찍어 즉석 인화된 몇 장을 건네자 모두가 좋다고 환하게 웃는다.

몇 가정을 더 둘러보고 돌아오는데, 길가 옆 담장에 붙은 총선용 선거 포스터가 눈에 띄었다. 순간 길 안내를 맡은 멩(30)이 담담하게 얘기를 꺼낸다.

“정부는 외국 고무업체들에 우리 땅을 90년간 쓸 수 있도록 빌려주었어요. 우리에겐 아무런 보상도 없었지요. 밭은 생명입니다. 만약 지옥불이 내려온다면 땅을 가져간 사람들에게 쏟아질 거예요.”

다소 무뚝뚝하지만 항상 웃는 얼굴이던 그가 내뱉듯 던지는 말에서 가슴에 맺힌 울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자연과 벗 삼아 살아온 프농족 특유의 여유로움과는 달리 속내를 내보인 젊은 그의 표정이 어둡기만 하다.

마을 인근 산야를 벌목해 고무농장을 조성 중인 프랑스 고무농장 사무실에 작업 차량들이 드나들고 있다.

마을 인근 산야를 벌목해 고무농장을 조성 중인 프랑스 고무농장 사무실에 작업 차량들이 드나들고 있다.

숙소로 돌아오니 아버지의 손을 잡은 한 소년이 동네 또래 아이들에 둘러싸여 마당을 거닐고 있었다. 걸음걸이도 불편하고 표정도 어눌한데다 말도 “어어~” 소리밖에 내지 못하는 것을 보니 어딘가 장애가 있는 듯하다. 소년의 이름은 트레이 니욘, 이제 겨우 일곱 살이다. 지난해 12월. 모두가 축복과 은총을 나누는 크리스마스에 소년은 그만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다. 그리고 몸과 정신을 잃었다. 재빨리 대도시 큰 병원으로 후송해야 했지만 가족은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다. 차편을 구할 수도 없었고, 말라리아가 일상적인 질병이기에 운명처럼 받아들인 탓이다. 동행한 김주헌(35) 한국외방선교회 신부에게서 휠체어를 선물받은 니욘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동네 친구들은 얼마 전부터 바보처럼 변한 니욘을 둘러싸고는 계속 손짓을 하며 웃어댔다. 그것이 놀림짓이든 아니면 함께 놀아주려는 것이든, 니욘은 휠체어에 타보기도 하고 손잡이를 붙잡고 기대 밀어보기도 하면서 덩달아 웃기만 한다. 말라리아에 걸리지만 않았다면 다른 아이들과 한창 장난을 치며 뛰어다녔을 아이다.

일상적 질병 말라리아는 ‘운명’

오후부터 동네를 돌며 가족사진을 찍어주는데, 금방 소문이 났는지 여기저기서 우리도 찍어달라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다. 일부는 크메르어로 말을 건네고 일부는 프농어로 인사를 한다.

“바흘랑!” (안녕하세요)

“카큼!” (웃어보세요)

“나으웨이 웤!”(고맙습니다)

오전 나절 다소 무겁던 가슴이 그나마 가벼워진다.

발전기 동력이 끊어지고 전기가 사라진 늦은 밤. 잠자리에 눕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겨우 며칠 머무는 과객의 짧은 눈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현실 속 고단함과는 달리 프농족의 얼굴 깊은 어딘가에 서린, 작지만 고요한 평온이 언뜻언뜻 눈에 들어온다. 문명과 자본의 상징인 전기가 들어오고 도로가 깔리는 급격한 변화의 흐름 속에서 얼마 안 되는 혜택의 중심부에서도 비껴나 있는 프농족 사람들. 그들의 고향인 부스라에 정작 그들이 설 자리는 점차 사라지고 있다.

밤은 점점 깊어가는데 근처 가라오케에서 고막을 찢듯 울려대는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농사밖에 모르던 프농족과는 달리 춤추고 노래 부르기를 즐기는 크메르 사람들이 들여온 문명의 이기 중 하나다. 귀를 틀어막고 억지로 잠을 청한다. 가뭇하게 눈이 감기는가 싶었는데, 휠체어를 타고 좋아하던 니욘의 얼굴이 다시 떠오른다. 만약 도로라도 제대로 깔려 있었다면, 누군가 차를 태워 빨리 병원으로 옮겼다면, 니욘은 말라리아에 몸을 잃지 않았을지 모를 일이다.

내일 아침이면 워낙 외진 곳에 있어 아직까지 프농족 고유의 삶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다크담’(Dak Dam) 마을을 찾아간다. 그곳에 가보면 뭔가 다른 기운을 얻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아침이면 빛은 어김없이 세상을 밝힐 것이다. 나무판자 벽 틈을 뚫고 들어온 달빛이 어서 자라고 얼굴을 어루만진다.

몬둘키리(캄보디아)=글·사진 임종진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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