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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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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을 병풍 친 그림같은 산촌


광주리 멘 아낙과 새총 든 꼬맹이… 세월이 멈춘 자연 속의 맑은 영혼들
등록 2009-09-10 16:44 수정 2020-05-03 04:25

프농족의 오랜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는 닥담(Dak Dam) 마을을 찾아가는 길에 이 지역에서 볼 만한 곳으로 소문난 부스라 폭포로 잠시 발걸음을 옮긴다. 20여m가 훨씬 넘는 폭포가 아래위로 3단이나 펼쳐진 것이 가히 장엄하다 할 만한 위용이다. 가족이나 연인이 여기저기 모여앉아 다정하게 담소를 나누고 개구쟁이들은 허리 높이까지 차는 냇물에 뛰어들어 물장난에 환호성이다. 한가로이 여유를 즐기다 길을 나설 요량으로 몸을 돌려 나오는데, 그늘에 앉아 과일을 팔고 있는 한 할머니가 눈길을 잡아당긴다. 그 앞에 다가가 쭈그리고 앉으니 프농족의 전통 양식 그대로 젖가슴을 훤히 내놓은 할머니가 배시시 웃어준다. 자신의 나이가 몇 살인지도 모른다는 ‘프로’ 할머니는 얼추 보기에도 70살이 훨씬 넘어 보인다. 저 마른 가슴으로 자식은 몇이나 키워냈으려나. 가만히 마주 앉아 함께 따라 웃다보니 낯선 선머슴 앞에서 부끄럽지나 않을까 하던 생각이 오히려 창피하기만 하다. 설익은 바나나 한 다발을 주워들고 값을 물으니 겨우 3500리엘(약 1천원)이라 한다.

고갯마루를 내려서자 홀연히 모습을 보인 닥담 마을의 정경이 동화 속 풍경 그대로다. 움푹 가라앉은 산마루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곳은 프농족 전통의 삶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고갯마루를 내려서자 홀연히 모습을 보인 닥담 마을의 정경이 동화 속 풍경 그대로다. 움푹 가라앉은 산마루 한가운데 자리잡은 이곳은 프농족 전통의 삶이 온전히 보존되고 있다.

폭포 소리와 피리 선율의 조화

바로 옆 나무에 해먹을 걸어놓고 아무런 표정 없이 누워만 있던 브랏(72) 할아버지가 슬며시 몸을 일으키더니 나무로 만든 전통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관광객에게 피리를 불어주고 품값을 받는 그의 연주 솜씨가 예사롭지 않다. “삘리리~. 삘삐리리~.” 쏴아 하는 폭포 소리와 어울린 피리 선율이 아름답게 계곡을 타고 흐른다.

잠시 뒤 닥담 마을에 가기 위해 폭포를 벗어났다. 탁 트인 산길을 따라 덜컹대는 밴 차량에 기대어 한참을 달려가는데, 다시 아름다운 풍경에 넋을 잃는다. 부스라를 찾아가던 길에 비해 한결 더 깊은 맛이 있다. 푸른 하늘은 하얀 뭉게구름과 더불어 사이좋게 반반씩 터전을 나눠 빛을 발했다. 사방으로 펼쳐진 초록 대지는 끝도 없이 넓기만 하다. 구름이 드리운 그늘을 지붕 삼아 한가로이 풀을 뜯는 들소들도 눈길을 잡아당긴다. 그 뒤를 따르는 소년 목동들은 조금은 지루하다는 듯 연방 하품을 멈추지 않다가 차에서 내려 슬쩍 다가가는 나를 보더니 갑자기 줄행랑을 친다. 구름과 눈높이를 맞추며 한참을 외길을 따라 달렸다.

몇 군데 산등성이를 벗어나 고개를 내려가는데, 그림 같은 마을 하나가 동화 속 풍경처럼 홀연히 모습을 드러낸다. 닥담 마을이다. 우리나라 강원도와 엇비슷한 품이 마치 낯익은 시골 외갓집을 찾아온 느낌이다. 사방을 둘러싼 산을 깎아내리지 않고 그 가운데에 포근히 자리잡은 마을 형세가 자연과 벗 삼은 정경 그대로다. 돼지와 오리 떼들이 꽥꽥거리며 제 집 안마당인 양 줄지어 몰려다니고 동네 꼬마들의 개구진 목소리가 예서 제서 들려온다. 온전히 마을 풍경에만 눈길이 쏠린 내게 시샘이라도 났는지 구름떼가 해를 가려 마을 여기저기에 그늘을 만든다. 앞을 가리려는 수작일 테지만 그 모습마저 정겹기만 하다.

사방을 둘러싼 산 가운데 자리잡아

숙소에 들러 짐을 풀고 나오는데, 앞집 사는 일곱 살배기 ‘렌’이 부끄러운 내색을 감추지 않으면서 자꾸 눈짓을 준다.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노릇. 아이의 관심에 화답하며 한참을 곁에 머문다. 단발머리에 동그란 얼굴의 렌이 금세 맑은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소등에 올라탄 아이는 앞으로 가보라며 자꾸 소꼬리를 흔들어댔지만, 풀 뜯느라 정신없는 소는 아랑곳 않고 서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소등에 올라탄 아이는 앞으로 가보라며 자꾸 소꼬리를 흔들어댔지만, 풀 뜯느라 정신없는 소는 아랑곳 않고 서서 움직일 줄을 모른다.

마을 큰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우리네 초가집과 닮은 프농족 전통 가옥과 판잣집들이 군데군데 사이좋게 이웃하고 있었다. 나뭇가지를 꺾어 얼기설기 만든 담장은 그저 마당을 구분하는 정도의 역할로 보일 뿐, 빨래까지 걸려 있는 것이 사이좋게 터놓고 지내는 우리의 시골 마을과 별반 다름없었다.

등바구니를 짊어진 한 아낙이 강아지 한 마리까지 안고는 종종걸음으로 다가온다. “바흘랑.”(안녕하세요) 꾸벅하고 인사를 건네자 낯선 이방인의 관심이 싫지는 않은 듯 차뷔(55)가 왕창 빠진 앞니를 살짝 가리며 환하게 웃는다. 시장 간 김에 사왔다는 강아지는 아이들 놀이 친구용이다. 서둘러 오던 걸음새를 보니 어서 집에 가 등바구니에 가득한 물건도 풀어놓고 저녁 식사 준비도 해야 할 듯싶어 오래 붙들고 있을 수도 없다. 돌아가는 총총걸음이 경쾌하다.

다시 길을 따라 걷는데, 동네 꼬맹이 몇이 새총을 들고 나무 위를 쳐다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목표를 겨누고는 고무줄이 끊어질 듯 당겼다가 시위를 놓는다. 가만히 하는 짓을 살펴보니 새를 잡는 것이 아니라 나무 열매를 쏘아 떨어뜨리는 중이었다. 나도 한번 해보자는 시늉을 하자 아이들은 대수롭지 않게 새총을 내준다. 몇 번 해보니 솜씨는 형편없어도 재미가 꽤나 쏠쏠하다.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친구가 된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새총도 쏘고 열매도 따먹었다.

마을 풍경을 조금 더 눈에 담기 위해 북쪽으로 길을 돌려 그대로 앞동산으로 걸음을 옮겼다. 일찌감치 저녁 식사를 준비하는 듯 몇 채의 집에서 화덕불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언덕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하루 종일 풀을 뜯던 소떼들이 집으로 가자는 목동의 재촉에도 아랑곳 않고 풀밭에서 머리를 들 줄 모른다. 먼 산 너머 하루의 소임을 다한 태양이 조금씩 기운을 잃고 허덕대는데, 밭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젊은 부부의 발걸음이 가볍게 울려온다. 서로 바짝 몸을 붙인 채 뭐가 그리 좋은지 함박웃음이 그치지 않는다. 은근한 훼방을 섞어 인사를 건네보니 거리낌 없이 손을 흔들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마도 그들만의 저녁 만찬장으로 어서 돌아가고 싶은 듯하다.

전깃불 없어도 모자람은 없다

저녁 노을도 저만치 사라지고 마을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까지 언덕에 그대로 주저앉아 고요를 즐긴다. 바람 소리 외엔 오로지 깊은 정적만이 흐른다. 문명의 이기들에 빠르게 소진돼가는 부스라와는 달리 닥담 마을은 그 반대편에 서서 자신들 고유의 삶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 전깃불 하나 없어도 겉으로만 남루해 보일 뿐 모자람은 없다.

길 저편에서 두런두런 대화 소리가 메아리 울리듯 들리며 잠시 정적이 사라진다. 역시 밭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한 가족의 소담스런 얘기들이 바람을 타고 흘러온 것이다. 허기를 느껴 숙소로 돌아가려던 참이었지만 가만히 그들을 기다렸다. 광주리를 등에 메고 농기구를 어깨에 걸친 모습이 영락없는 농부인데,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은 모두 여성이다. 할머니와 중년의 아낙 그리고 어린 소녀 둘. 그 모습이 정겨워 웃으며 인사를 건넸지만 왠지 경계의 눈빛이 가득하다. 하긴 늦은 시간에 난데없는 낯선 이방인이 불쑥 나타나 말을 거니 모두 여성인 그들로서는 조금 거북한 일이기도 했을 법하다. 헤벌쭉 웃음으로 만회하려 했지만 그들은 아무런 대답 없이 눈길도 마주치지 않은 채 잰걸음으로 지나갔다. 놀래려 할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아무튼 미안한 일이다. 저녁 하늘 저편으로 사라져가는 그들의 뒷모습을 따라 물끄러미 눈길이 머문다. 그렇게 닥담에서의 첫날 밤이 깊어갔다.

이른 아침 아들을 대동하고 밭일을 나서는 촌로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파이프 담배 하나를 피워물고 나서는 걸음에 집개들도 컹컹대며 주인을 따라나선다.

이른 아침 아들을 대동하고 밭일을 나서는 촌로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파이프 담배 하나를 피워물고 나서는 걸음에 집개들도 컹컹대며 주인을 따라나선다.

이른 아침, 따스한 기운이 얼굴을 간질였다. 슬며시 눈을 떠보니 사방이 분홍색 빛줄기들로 한가득이다. 나무 판자 벽 틈을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이 모기장을 파고들어와 나그네의 게으른 잠을 그렇게 흔들어 깨운다. 산등성이에 막 걸친 아침 햇살이 곱기만 하다. 닭울음이 여기저기서 울려대고 ‘메에~’ 하는 소떼들의 울음도 들려온다. 밖으로 나가 주변을 살피니 부지런한 마을 주민들이 일찍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며 하루의 소임을 시작한 모습이다. 오토바이에 한가득 물건을 싣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도 있고, 집 앞에서 방아를 찧는 아낙도 눈에 띈다. 애기를 둘러업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다른 아낙네도 어디론가 길을 나설 채비를 다 끝낸 모습이다. 어미를 따라 종종걸음으로 내달리는 어린 소녀들의 모습은 아침 햇살 기운 그대로 상큼하기만 하다.

동네 골목길 같은 편안함

이미 낯을 익힌 동네 주민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며 다시 마을 탐방에 나선다. 하룻밤 사이에 한결 익숙해진 마을 풍경이 마치 잘 아는 동네 골목길을 떠돌 듯 편안하기만 하다. 어제와는 다른 방향으로 놓인 또 다른 언덕길을 따라 밭일을 나가는 주민들의 여러 일상이 자연스레 눈에 들어온다. 주섬주섬 농기구를 들고는 뒷짐을 쥔 채 장성한 아들과 함께 일터로 향하는 한 촌로. 광주리를 메고 개 한 마리와 더불어 느릿느릿 일 나가는 아낙네. 일찍부터 무리를 이루어 놀잇거리를 찾아나선 동네 개구쟁이들.

오후 들어 가족사진을 찍어준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온 주민들과 인사를 나눈다. 이방인 사진사의 요구는 단 한 가지.

“자~, 한번 웃어주세요. 연인이나 부부들은 바짝 붙어보시고요.”

하지만 어째 자세들이 영 신통치 않다. 부부끼리도 괜스레 내외하듯이 엉거주춤 서로 거리를 둔다. 좀 가까이 서보라는 주문을 하지만 쑥스러워하는 기색이 완연하다. 어찌된 것이 한결같이 모두 엉거주춤한 폼으로 카메라 앞에 선다. 그래도 순박하니 정겹기만 하다. 재미난 일이라도 생겼다는 듯이 함께한 다른 주민들이 서로 웃으며 짓궂게 장난을 친다. 웃어라 붙어라 하는 농짓거리에 모두 배꼽을 잡으며 난리다. 총각·처녀들은 갖은 폼을 잡아가며 이렇게도 저렇게도 찍어달라며 성화를 부린다. 동네를 쏘다니다가 얼굴을 익힌 개구쟁이들도 덩달아 달려와서는 폼을 잡는다. 그러는 사이 어느새 다시 저녁이 성큼 다가왔다.

늦은 밤 홀로 마을 한가운데 있는 우물에 가서 주변을 살펴본 뒤 옷을 홀랑 다 벗었다. 펌프질로 길어올린 물을 머리끝에서부터 끼얹는다. 서늘한 밤바람만이 아서라 말리지만 더없이 시원한 물줄기에 온몸이 신경을 바짝 세우며 반응한다. 저녁부터 몰려온 먹구름에 달빛조차 안 보이는 깊은 밤. 마을에 내려앉은 어둠을 뚫고 가만히 서서 여기저기 둘러본다.

산바람과 벗하며 몸을 맡길 뿐

이곳 닥담 마을에서는 시계를 보며 바쁘게 하루를 쪼개어 쓸 일이 없다. 조급할 것도 하나 없다. 하루의 해가 뜨고 지는 것을 기준 삼아 그 흐름에 기대어 몸을 맡길 뿐이다. 산바람이 벗이 되고 하늘과 땅이 이웃이 되니 어지러울 일이 없다. 이곳에서도 어찌 고단한 일상이 없겠는가마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을 지키며 살아가는 이들의 표정에서 따라할 수 없는 여유로움을 거듭 느끼게 된다.

프농족은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자신들의 언어를 지키기 위해 어른들이 나서 아이들에게 구전으로 프농어를 가르친다. 밭을 일굴 땅 몇 뙈기만 있으면 욕심을 내세워 살 일 없이 마냥 기쁜 하루들로 채워진다. 거대 자본의 흐름에 치여가는 부스라 마을에 비해 이곳 닥담 마을의 프농족은 한결같이 표정이 맑다. 살아가는 것의 가치 기준이 무엇인지 잠시 돌아보게 된다.

세파에 찌든 도시 나그네의 헛스러운 상념 탓일까. 아니면 이들에게서 선물받은 맑은 표정 때문일까. 내일 아침 길을 떠날 때는 다시 찾아오겠다는 약속으로 인사를 대신해야 할 듯싶다. 한번 스쳐가기엔 닥담 마을의 눈빛들이 너무 깊이 가슴에 남기 때문이다.

몬둘키리(캄보디아)=글·사진 임종진 사진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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