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취해 있었다. 술에 그런 것인지 아니면 약물 탓인지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빛을 발했다. 역시 술이 이유인지 아니면 해 지기 전 마지막 불꽃을 피운 태양빛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땟국물이 그대로 말라붙은 러닝셔츠. 반쯤 감긴 두 눈에, 아무렇게나 삐죽삐죽 솟은 수염. 그리고 ‘조폭형’ 스포츠 머리. 어딜 보나 그의 겉모습은 선뜻 좋은 점수를 매기기에 무리가 있었다. 시선이 서로 부딪히자마자 그는 갈지자 걸음으로 비틀거리며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초점 풀린 눈으로 말을 걸었다.
“헤이, 미스터! 쏨 아오이 바라이.”(어이, 아저씨! 담배 하나 주슈)
지난 7월 초 어느 날 늦은 오후, 바(30)와의 첫 만남은 그랬다.
자신의 집에서 수줍은 미소를 짓는 바. 빗물이 고스란히 들이치는 두 평 남짓한 그의 집은 마을에서 가장 허름하다.
‘언제 불난다’ 소문 뒤 어김없는 화재
그가 사는 ‘타이분롱’ 마을을 처음 본 것은 3년 전이었다. 프놈펜의 뽀쩬통 국제공항 근처에서 시내 중심부로 들어가기 위해 뚤콕 네거리 방향으로 가는 길이었다. 네거리 못 미쳐서 아무 생각 없이 바깥 풍경을 보는데, 문득 널따란 공터에 막 세워지기 시작하는 천막촌이 눈에 확 들어왔다. 흡사 난민촌이나 다름없어 보일 만큼 허름했지만, 시선을 잡아끈 것은 한낮의 뜨거운 태양빛에 반사된 빨갛고 푸른 원색의 천막들 때문이었다. 프놈펜 여기저기에 있는 다른 빈민촌에서와는 달리, 주민들이 아닌 마을에 드리운 빛의 향연에 눈이 먼저 간 것이다.
가족사진을 찍어준다는 소식에 자신의 아이를 안고 나온 한 마을 청년.
‘언제고 이 마을에 한번 들어가보자.’ 생각만 품었을 뿐, 이후 매년 들르는 캄보디아의 여정에 타이분롱 마을은 항상 뒤켠이었다. 지난해 가을, 1년이라는 시간을 두고 머물기 위해 다시 이 나라를 찾았을 때 타이분롱 마을은 여전히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십 채의 천막집은 어느새 200채 이상으로 늘어 있었다. 물론 여전히 바라보기만 했을 뿐 선뜻 발걸음을 옮기지는 못했다. 하고 있는 여러 일들로 인해 마음의 여유가 없던 탓도 있었지만, 실제 이유는 왠지 모르게 들기 시작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왜 두려웠을까?
정부 주도하에 수도 프놈펜을 중심으로 급속하게 경제개발 정책들이 시행되고 있는 캄보디아. 어려운 시골 생활이 버거워 도시로 몰려드는 가난한 이들의 이동은 이 나라도 마찬가지다. 도심 여기저기에 촌을 이루어 살아가는 빈민들에 대한 정부의 지원정책은 거의 전무하고, 오히려 도시 외곽으로 몰아내기에 급급한 게 요즘의 현실이다.
타이분롱 마을은 원래 주민들이 머물던 곳에 이유를 알 수 없는 큰불이 나면서 거기에서 쫓겨나온 주민들이 급하게 만든 마을이다. 도시 재개발사업에 방해가 되는 빈민들을 몰아내는 여러 방법 중 하나가 기존의 마을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누가 불을 질렀는지는 정확히 밝혀지지 않을 뿐, 정부나 건설업체에서 고용한 이들의 소행이라는 게 공공연히 떠도는 소문이다. 어느 달 어느 날 몇 시쯤 불이 나니 모두 떠나야 한다는 소문이 돌면 살림살이만 들고 에누리 없이 모두 나가야 한다. 어김없이 그날이 되면 큰불이 나는 것이다. 타이분롱 마을 역시 그렇게 생겨난 또 다른 빈민촌, 아니 난민촌이나 다름없다.
바를 만나게 된 그날은 벼르고 벼르던 끝에 처음으로 마을을 찾아간 날이다. 계속 마음은 끌렸지만, 말한 대로 괜한 두려움이 솔직히 있었다. 최근 몇 년 사이 외형적으로 급속히 이루어지는 개발 정책에 따라 빈부 격차의 모순은 눈에 띄게 늘어났고 가난한 이들의 삶은 더욱 어려워졌다. 먹고살 길이 막막한 그들은 술이나 약물에 기대어 하루의 삶을 소진하고 있었다. 외부인에 대한 폭력이나 강도 사건도 늘어가는 추세였다. 정말이지 굳이 그 마을에 들어갈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했다. 이미 자주 찾아 친해진 다른 빈민촌도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엉겁결에 한 약속하지만 그럴수록 타이분롱 마을은 시선을 잡아끌었다. 오토바이를 몰고 마을 한가운데를 찾아간 시각은 하루의 소임을 다한 태양이 마악 서쪽 지평선으로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정말이지 ‘오늘은 그냥 마을 느낌만 보고 가자’고 생각했다. 담배를 하나 꺼내 피워물었고 오토바이 안장에 그대로 앉아 시동을 켜놓고 있던 중에 바가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의 외양에 약간 경계를 느꼈다. 원하는 대로 담배를 건네준 뒤 시선을 돌리려는데, 그는 내게 자신의 집으로 들어가자며 손을 잡아끌었다. 그와 만난 장소 바로 옆에 그의 집이 있었고 마을 가옥들 중 가장 허름했다.
바의 아내 쏜타윈에게 첫째 씨응(왼쪽)과 쩨랑은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다.
혀가 꼬부라진 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집에 가자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는 왠지 거북했다. 자꾸 손을 잡아끄는 그에게 “나중에, 나중에”를 외치는 사이 주변에 있던 마을 사람들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몰려왔다. 순식간에 10여 명에 둘러싸인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짧은 크메르어 실력으로 허둥대며 대화를 나누는데, 그들 중 한 사람이 오토바이 뒤에 실린 박스에 관심을 보였다. 인근 벙깍 호수 마을( 9월14일치 ‘이 순간’ 참조) 주민들에게 갖다줄 사진 액자가 실려 있었다. 액자들을 꺼내보며 다들 부러워하는 눈치를 내보였다. 문득 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에게 내일 다시 오겠다는 말을 건넸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주겠다, 시간은 오후 네 시가 좋겠다고 얘기했다. 그는 기다리겠다고 했다. 나는 오토바이를 몰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천천히 길을 따라가면서 긴장감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도 속에 가지고 있던 두려움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깨끗해진 노인과 멋지게 머리를 빗어올린 아이다음날 조금은 주저하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약속 시간에 맞춰 타이분롱 마을을 찾아갔다. 혹시나 하며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나를 기다렸던 바는 어제보다는 정신이 멀쩡했고, 아주 기쁜 표정으로 반겼다. 외국인이 마을을 찾아오는 경우가 드물었던 탓인지 그는 곧 내게 “쁘렌 쁘렌”(Friend)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뚜렷한 직업이 없는 그는 가끔 에어컨 수리일을 다니거나 운전을 하면서 어렵게 아내 쏜타윈(20)과 아들 씨응(2), 딸 쩨랑(1) 등 4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수줍어했고, 무엇이든 먹을거리를 내놓으려고 했다. 어제 그를 경계했던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자신의 집을 찾아온 손님에게 최선을 다해 즐겁게 해주려고 애썼다. 겉만 보고 함부로 그를 판단한 속없는 내 생각이 어찌나 미안하던지.
마을 어린이들은 항상 뒤를 따라다니며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한데 모아 단체로 사진을 찍어주었지만 그래도 소용없이 뒤를 따라다녔다.
그와 가족들의 사진을 찍으면서 다시 약속을 했다. 매주 금요일 오후 네 시에 마을을 찾아오겠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누구나 할 것 없이 가족사진을 찍어줄 테니 항상 금요일을 기다려달라고 더듬더듬 말을 건넸다. 집 밖에는 전날 만났던 이들이 벌써부터 모여 있었다. 때 빼고 광 내고 나타난 노인들, 멋들어지게 머리를 빗어올린 아이들. 그들과 어울려 기분 좋은 오후 한나절을 함께했다. 오래도록 가지고 있던 명분 없는 경계심은 서서히 그렇게 가라앉았다. 한번 발걸음을 옮겨봄으로 인해 시작된 타이분롱 마을 주민들과의 인연은 여전히 내 스스로 가지고 있는 편견의 시선을 따끔하게 꼬집었다. 진즉 걸음을 옮겼다면 좋았을 것을…. 후회는 부질없기만 하다. 이제라도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끈 하나를 찾아 이었으니, 그것만으로도 참 고마운 일이다. 매주 금요일 오후 커다란 박스에 사진 액자를 가득 채우고 찾아가는 타이분롱 마을엔 언제나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다. 때 빼고 광 낸 새 친구들이다.(다음호에 계속)
프놈펜(캄보디아)= 글·사진 임종진 사진작가 stepano030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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