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17일 초저녁이었다. 춘천 우리은행과 용인 삼성생명의 2012~2013 여자프로농구 챔피언결정전 2차전이 열린 강원도 춘천 호반체육관. 정장 차림으로 벤치에 앉은 우리은행 전주원(41) 코치는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우리은행은 이날 77-67로 이기면서 2연승으로 챔피언 등극에 1승만을 남겨두게 됐다.
같은 시각 관중석에선 전 코치의 부모와 딸 수빈(8)양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 전부터 어머니의 안색이 좋지 않아 보였다. 어머니 천숙자(70)씨는 “체한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했다.
어머니는 이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이튿날 새벽 2시30분께 일어났다. 아버지와 대화도 나눴다. 그리고 소파에 기대 있다가 옆으로 누웠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편히 잠이 든 줄 알았다. 하지만 아침에 가족들이 눈을 떴을 때 어머니는 이미 이승과 작별을 고한 뒤였다.
전 코치는 이른 아침 서울 장위동 숙소에서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다. 전 코치의 어머니는 농구장을 자주 찾아 농구 관계자들에게 낯익은 분이다.
다음날인 3월19일 경기도 용인체육관에서 열린 챔피언결정전 3차전. 전 코치는 주변의 우려에도 검은색 정장을 입고 벤치를 지켰다. 선수단은 모두 왼쪽 가슴에 검은색 리본을 달았다. 이날 우리은행은 삼성생명을 66-53으로 물리치고 마침내 정상에 올랐다. ‘만년 꼴찌팀’이 7년 만에 정규리그와 챔피언결정전 통합 우승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체육관에는 축포가 터지고 꽃가루가 휘날렸다. 우승 티셔츠와 우승 모자를 쓴 전 코치는 선수 한명 한명과 뜨거운 포옹을 나눴다. “○○아! 고생 많았어.” “코치님~!” 선수들은 목이 메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사제는 서로 부둥켜안고 그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떤 선수는 포옹을 한 채 전 코치의 등을 쓰다듬으며 위로했다.
같은 시각 부산에서는 또 다른 ‘농구 영웅’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국보 센터’ 서장훈(39·부산 KT)이다. 그는 허재 감독이 이끄는 전주 KCC와의 은퇴 경기를 앞두고 기자들과 만나 “담담해지려고 애를 쓰는데 쉽지 않다”고 했다. 30년 가까운 선수 시절을 회상하면서 “매 순간이 아쉽다”며 잠시 목이 메기도 했다.
절친한 동생인 가수 싸이의 시구로 시작된 서장훈의 은퇴 경기는 드라마틱했다. 서장훈은 “경기 전에는 무조건 집중해야 하는데 오늘은 집중이고 뭐고 다 깨졌다”고 했지만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전성기 시절을 연상케 할 만큼 펄펄 날았다. 33득점을 몰아치며 팀의 84-79 승리를 이끌었다. 2점슛 17개 중 10개를 성공시켰고, 3점슛도 4개 가운데 2개를 림에 꽂았다. 자유투는 7개 모두 득점으로 연결했다. 마지막 순간엔 자신의 진가를 확인시켜줬다. 81-79. 단 2점 차이로 승리를 장담할 수 없던 상황이었다. 서장훈은 종료 11초를 남기고 미들슛을 림에 꽂은 뒤 반칙으로 얻은 자유투까지 넣으며 승리에 마침표를 찍었다.
서장훈은 1998~99 시즌부터 15시즌 동안 688경기에서 1만3231득점, 5235리바운드를 기록했다. 두 부문 모두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대기록이다. 득점과 리바운드 역대 2위인 추승균(1만19점)과 조니 맥도웰(3829리바운드)은 이미 은퇴했다. 현역 선수 중 유일하게 김주성(8076득점, 3363리바운드)이 서장훈의 기록에 접근하고 있지만 워낙 격차가 크다. 김주성의 나이(만 34살)로 볼 때 그가 은퇴하기 전 서장훈의 기록을 넘어서긴 쉽지 않아 보인다.
은퇴식 열지 않겠다던 ‘국보’ 끝내 울먹서장훈은 ‘국보’라는 별명답게 한 시대를 풍미한 대단한 선수였다. 그러나 유난히 안티팬이 많았다. 과도한 몸짓으로 소리를 지르고 심판에게 자주 항의를 해 ‘서비명’ ‘악장훈’ 같은 부정적인 별명이 따라다녔다. 그는 은퇴 기자회견에서 “보기 불편했다면 사과드린다. 쇼가 아니라 이기고 싶어서 그랬다. 저의 진심은 이해해달라”고 했다.
사실 서장훈은 은퇴 경기나 은퇴식을 열지 않겠다고 버텼다. KT 구단에 1년밖에 몸담지 않았고 안티팬들의 비난이 우려됐다. 그러나 구단은 서장훈을 간신히 설득해 역대 어느 선수보다 멋지고 화려하고 감동적인 은퇴식과 은퇴 경기를 마련했다.
은퇴식에서 마이크를 잡은 서장훈은 애써 참으려 했지만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 그는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했지만 여러분의 큰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해 죄송하다”며 울먹였다. 전주원과 서장훈. 한국 남녀 농구의 대표적인 ‘아이콘’이다. 공교롭게도 같은 날 한 사람은 어머니와 작별했고, 한 선수는 유니폼과 이별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지난 3월21일 장례식을 치른 전 코치에게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어머니 유품을 정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빨리 마음을 추스르라”는 말밖에 전할 수 없었다. 서장훈의 은퇴 경기가 끝난 지도 열흘 정도 지났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프로농구연맹(KBL) 누리집 초기 화면에는 서장훈의 이력과 함께 ‘발자취 따라가기’ ‘은퇴식 보러가기’ 등 배너가 떠 있다.
이제 어머니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 하는 전주원과 제2의 농구 인생을 설계하는 서장훈. 한국의 두 ‘농구 영웅’에게 축복이 함께하길 빌어본다.
김동훈 기자 한겨레사회정책연구소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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