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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엉덩이를 걷어찬 사나이

등록 2013-03-16 17:14 수정 2020-05-03 04:27

우고 차베스에 대해, 그 독특한 정치 스타일과 베네수엘라의 상황에 대해 몇 마디라도 거들 만한 능력은 내게 없다. 제3세계 곳곳에서 나타나는 ‘독특한 반미주의 통치 스타일’ 중 차베스는 어쩌면 가장 독특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 통렬한 반미주의가 자국 내부의 민주주의 진전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사뭇 궁금한 정도의 인식이다. 그가 쿠바의 카스트로가 될지, 아니면 리비아의 카다피가 될지 늘 궁금했다.
마라도나 ‘같은’ 선수를 보면 놀라는
반미를 ‘무기’로 자국의 민주주의 발전을 일정하게 지체 내지는 억압하는 경우가 있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하는 궁금증이 있었으나 이젠 고인이 되었으므로 대답을 얻기는 어려워졌다. 다만 그가 고원지대에서도 축구 경기가 가능하다는 것을 몸소 입증하려 했던 일의 맥락만큼은 몇 마디 부언할 수 있다. 축구는 잉글랜드에서 근대 스포츠로 발전했다. 그 힘은 ‘근대적 교육 시스템’과 ‘시민·노동자에 의한 현대 도시 문화’다. 이 조건이 갖춰진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축구가 확산될 수 있었다. 구한말에서 일제에 이르는 우리의 경우도 이 두 가지 맥락에 의해 근대 초기의 스포츠(축구) 문화가 발전했다.
축구로 예를 든다면 경성과 평양을 중심으로 경신학교, 대성학교, 숭실학교 등의 ‘근대 교육 시스템’에서 스포츠가 발전했다. 이것이 경평 축구의 뿌리가 되고 보성전문과 연희전문의 사학 경쟁으로까지 이어지는데, 이는 잉글랜드에서 축구가 광범위한 공민 교육층의 활성화로 발전한 것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리고 함경남도 원산과 인천이 있다. 항만공업 발전으로 시민·노동자라는 전혀 새로운 도시 형성에 따른 축구 문화가 이런 곳을 거점으로 발전했다. 항만공업 지역의 축구 문화는 내륙 대도시의 교육기관과 달리 도시 하층민의 일상적 고통이나 권태를 쏟아내는 공간으로 기능했다. 일제시대의 축구 관련 기사를 살펴보면, 오늘날 잉글랜드나 K리그에서 볼 수 있는 ‘도시 하층 노동자 문화로서의 축구’라는 면모를 금세 느낄 수 있다. ‘일제’라는 거대한 먹구름 때문에 당시 스포츠를 일률적으로 ‘식민지 수탈에 신음하는 백성들이 한을 푸는 공간’으로 지레짐작해서는 곤란하다.
남미로 건너가면 그 풍경이 사뭇 다르다. 남미 여러 나라의 축구 문화 또한 잉글랜드를 기원으로 삼고 있지만, 그 시작부터가 달랐다. 남미 출신의 성공한 유럽인 혹은 잉글랜드의 군인이나 선원들에 의해 19세기 말 남미 전역에 축구가 전파됐는데, 그곳 사람들은 축구공을 받자마자 자기 맘대로 공을 찼다. 유럽의 축구 문화가 ‘근대적 교육 시스템’의 일환으로 규율·질서 같은 이념의 내면화를 추구하는 것이었다면 남미 사람들은 그런 과중한 질서에서 벗어나려고 공을 찼다. 저 멀리 펠레와 마라도나를 비롯해 최근의 호나우디뉴, 메시에 이르는 남미의 축구 스타들이 보여주는 절묘한 기예와 세련된 스타일은 19세기 말부터 전승된 자유로운 공놀이에 기원하고 있다.
‘종주국’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영국이나 유럽의 축구 권력자들 처지에서는 이들의 축구 문화와 스타일의 일부가 맘에 썩 들지 않을 수도 있다. 웬만하면 반미주의자요 근엄한 행사장에 키득거리며 들어서길 좋아하는 남미 선수들이 유럽 중심주의의 견고한 형식과 관습에 균열을 낸다고 여기는 사람도 적지 않다. 유럽의 권력자들은 조금이라도 인기 있는 남미 선수들이 그라운드 안팎에서 마라도나 같은 기질을 보일 때마다 질겁한다.
꼭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지만, 이 유럽의 권력자들이 고원지대에서의 국제경기 금지를 관철하려 한 적이 있다. 2007년 5월27일, 조제프 블라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해발 2500m 이상의 고지대에서는 국제 축구경기를 열 수 없다고 했다. 볼리비아, 에콰도르, 콜롬비아 등은 이에 즉각 반발했다. 만약 이대로 확정됐다면 에콰도르는 5년6개월 동안 한 번도 진 적이 없는 수도 키토(2850m)에서는 더 이상 국제경기를 치를 없게 될 뻔했다. 페루도 해발 1548m의 수도 리마 대신 3400m의 고대 유적지 쿠스코에서 치르려던 국제경기를 취소해야만 했다. 볼리비아의 수도 라파스는 해발 3600m. 이곳 말고는 마땅히 국제경기를 치를 만한 곳도 없는 형편이었다. 볼리비아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을 비롯한 남미의 수장들이 거칠게 항의했고 결국 FIFA는 계획을 취소했다.
고원지대에 모여 공을 차다
그리고 차베스가 대통령으로 있는 베네수엘라에서는 2007 코파아메리카대회가 열렸다. 개막전에서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 볼리비아의 모랄레스 대통령, 그리고 남미의 상징 디에고 마라도나가 그라운드에서 함께 공을 찼다. 그들 중 일부는 직접 해발 4천m 이상의 고원지대에 가서 공을 차며 세상의 모든 규칙이나 행위 규범이 유럽 중심으로 자전하는 이 지구의 불균형에 대해 저항했다. 차베스 역시 이에 동참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문화적 저항의 리더였다. 마라도나는 그런 그를 존경했다. 이미 한쪽 팔에 쿠바의 카스트로를 문신한 마라도나는 다른 팔에 차베스를 새기고 싶다고도 했다. 에미르 쿠스투리차의 다큐멘터리 에서는 그들 모두가 아르헨티나의 마르델플라타에서 대규모 반미 집회에 모이는 광경을 보여준다.
그런 흐름의 한 축을 담당한 차베스는 세상을 떠났다. 나라 전체를 ‘반미 좌파 실험장’으로 삼기도 했던 그의 정치적 측면에 대해서는 마땅히 할 말이 없다. ‘반미’로 자국의 민주주의를 제한했던 제3세계의 수많은 경우를 보면 우려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고원지대에 사는 사람들은 고원지대에서 축구경기를 할 수 있다’는 남미 사람들의 주장은 이런 정치 스타일의 역사적 특수성을 한 번 더 숙고할 것을 요구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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