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중연 회장님, 안녕하신지요. 저는 축구 칼럼을 쓰는 정윤수라고 합니다. 자주 들르지는 못하지만, 어쩌다 중요한 기자회견이나 자료 확인 때문에 서울 신문로 대한축구협회 건물로 가곤 하지만, 우연히도 그때마다 조 회장님을 복도나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습니다. 저는 정중히 인사를 드렸고 또 회장님께서 답례와 격려를 해주신 기억이 있습니다.
감독을 화합의 도구로 쓰셨다?
제가 특별히 회장님을 기억하는 것은 2004년께의 가을이었습니다. 그 무렵 경기도 파주의 국가대표트레이닝센터(NFC)에서 친선경기가 열렸었지요. 공교롭게도 저는 오른쪽 미드필더였고 회장님은 상대편의 왼쪽 미드필더를 맡으셨지요. 그래서 경기 중에 대여섯 차례 볼 경합이 있었습니다.
하아, 다시 기억해보니, 역시 명불허전, 한번 대표는 영원한 대표구나 하는 광경이었습니다. 회장님의 공을 빼앗으려고 저는 악착같이 뛰었지만, 회장님이 그저 몸을 한번 슬쩍 흔들었을 뿐인데 저는 헛된 방향으로 엎어졌고 이미 회장님은 제 뒤의 빈 공간으로 질주한 다음이었습니다. 퇴임한다는 소식을 접하며 이런 추억부터 떠오르는 것은 아무래도 한국 축구의 행정 책임자인 회장님이나 일정하게 ‘비평적 거리’를 갖고 나름의 소신으로 092비평을 해온 저나 역시 같은 그라운드의 공기를 마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추억은 추억이고 아쉬운 것은 아쉬운 것입니다. 지난 12월10일 인터뷰를 보았습니다. 뒤늦게야 이해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러나 제 ‘비평적 거리’라는 관점으로 보건대 몇 가지 아쉬움은 남습니다.
우선 회장님께서는 조광래 전 감독을 비롯해 유능한 감독들이 중도 하차했을 때 늘 그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경질 파문에 대해 회장님께서는 명분과 절차를 다 지켰다고 말씀하십니다. 세인들의 기억과는 조금 다른 부분이지요. 축구계가 분열돼 이를 통합하려고 조광래 감독을 뽑았다는 대목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화합이 목표라면 협회 내부의 책임 있는 고위 행정직을 통해 탕평을 할 일이지 전적으로 독립적이어야 할 대표팀 감독직은 아닐 것입니다.
조 감독의 경질을 비롯한 여러 파문에 대해 “특정 언론사가 축구 야당을 지원하기 때문”이라고 하신 말씀도 제가 보기에는 사실의 부분만을 보신 듯합니다. 회장님은 거듭 ‘축구 야당’이나 ‘반대파’를 언급하시는데 ‘팬’은 거론하지 않고 계십니다. 정치판의 여야가 ‘국민을 위해’라고는 말하지만 정작 국민의 의견은 경청하지 못하는 것처럼, 회장님 역시 축구계 ‘내부’의 여야, 파벌, 선후배 등의 관계에 더 주목하신 듯합니다. 수많은 팬들, 그들의 목소리, 그들의 열정을 ‘국민적 성원’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정치인은 안 된다” 원칙에 대해
차기 회장 선거에 대해서도 원칙을 제시하셨습니다. “정치인이 하면 안 된다. 축구는 정치하고 분리하려는 게 절대적인 국제축구연맹 정신”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로서는 한편 반가우면서도 동시에 아쉬웠습니다. 전임 회장이자 현재는 명예회장이며 지난 20년 가까이 한국 축구계에 무소불위의 영향을 끼친 인물은 다름 아닌 정몽준 ‘의원’입니다. 그런데 회장님은 정몽준 명예회장에 대해 “정치인 차원에서 한 게 아니다. 그때는 어려운 때니까 도와주고 자생력이 생기도록 지원을 해준 케이스”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까지 사실이 왜곡되고 상식을 벗어난 해석이 있어서는 곤란하지 않을까요. 2002년 월드컵의 열기를 바탕으로 대선 인기몰이를 한 사실, 누구나 다 아는 일입니다. 대선 열기가 뜨겁던 2002년 가을, 경남 양산 통도사에 큰 법회가 있었고 당시 정몽준 후보는 대선 레이스의 일환으로 통도사를 찾았었습니다. 그때 저는 다른 일로 통도사에 있었습니다. 저는 정몽준 후보를 수행한 적잖은 사람들을 보았고, 조 회장님을 비롯한 축구인들도 보았습니다. 오히려 축구협회가 정몽준 후보를 ‘어려운 때니까 도와준’ 것은 아닌지요.
회장님. 퇴임하시는 마당에 이런 칼럼이 섭섭하실 수 있을 겁니다. 분명한 것은 회장님께서는 그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일을 현장에서 다 겪은 분이라는 점입니다. 중동중·고교를 거쳐 고려대에서 선수 생활을 했으며, 모교 감독과 울산 현대 감독을 지냈고, 10년 가까이 방송 해설위원을 역임했으며 협회의 단장, 전무, 부회장, 회장직을 두루 맡으셨습니다.
회장님에 대한 평가 여부를 떠나서, 그리고 공과를 떠나서, 한국 축구사의 ‘산증인’입니다. 정몽준 명예회장은 너무 높은 곳에 있어 협회 내부의 ‘작지만 소중한 일’을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너무 ‘바깥’에 있어서 내부의 속사정과 고뇌를 일일이 알 수 없을 겁니다. 그러나 회장님은 지난 30여 년의 한국 축구사, 곧 프로리그가 제 궤도에 오르고 월드컵과 올림픽의 성취가 연거푸 이뤄지고 여자축구와 유소년 등 각급 리그가 안착하고 파주 NFC를 비롯한 축구 인프라가 전국적으로 확충되는, 그 모든 것을 겪은 분입니다. 안타깝지만 끝없이 터져나왔던 ‘사건·사고’의 당사자이기도 하셨습니다.
다른 사람이 하지 못하는 기록
그러니, 회장님께서는 반드시 ‘회고록’을 쓰셔야 합니다.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기억은 마모되지만 기록은 엄연합니다. 한국 축구사를 기록하고 이로써 다음 단계의 도약판을 마련하며 나아가 한국 현대사를 축구로 환기하는, 소중한 기록을 반드시 남기시기 바랍니다. 물론 기억의 재가공이나 기록의 왜곡이 있어서는 안 되겠지요. 필요하다면 제가 기억의 ‘보완’과 ‘다른 시선’을 위해 충실한 질문자 역할을 하겠습니다. 그동안 수고 많으셨습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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