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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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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 미담과 추문 사이에서

등록 2012-08-07 19:51 수정 2020-05-03 04:26

스포츠를 통해 뭔가 배울 수는 없을까. 극기라든가 혼연일체라든가 연습 때의 땀방울은 실전의 피 한 방울이라는 식의 ‘호연지기’ 말고 달리 배울 만한 것은 없을까. 물론 경기장은 도덕 교과서가 아니므로 핀셋으로 뭔가 얘깃거리를 꼭 집어내려는 것도 ‘의도의 오류’를 범할 수는 있겠는데,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논란거리가 많은 올림픽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생각을 하게 한다.
세계 배드민턴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중국, 한국, 인도네시아 선수들의 ‘고의 패배’ 사건은 규칙이 단순히 운동장비의 무게나 경기장의 너비가 아니라 스포츠를 스포츠답게 만드는 헌법이라는 점에서 볼 때 이 고의 패배는 어떤 말로도 변명이 어렵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때 일이다. 당시 한국 태권도에는 10년 이상 세계를 평정한 김제경이 있었다. 이 선수의 올림픽 출전을 위해 후배 문대성과 김경훈이 부상 등의 이유를 내세워 고의로 기권하기도 했다. 그런데 김제경이 부상을 입어 시드니 출전이 좌절됐고 이에 문대성과 김경훈의 재경기가 예정돼 있었으나, 선발전 2위인 문대성이 이를 보이콧했다. 규정에 어긋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김제경을 위해 후배들이 고의로 기권한 것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여곡절 끝에 재경기가 치러졌고 3위의 김경훈이 문대성을 눌러 시드니에 출전해 사상 첫 태권도 금메달을 땄다. 엄연히 명문화된 규칙을 어떤 관계에 의해 (혹은 위해) 임의로 조정한다면 그 범위와 한계는 어디까지이며 과연 그렇게 해도 되는가, 우리는 잠시 생각하게 된다.

미디어가 확대 재생산해 꼬인 미담
스포츠는 미담을 낳는다. 이번 올림픽에서도, 특히 한국 선수들이 메달을 딸 때마다 갑자기 미담이 쏟아진다. 그러나 그것이 때로 과장되거나 경기 자체보다 두드러질 때, 우리 마음은 그것에 감동하기보다 조금은 조심스러워지게 된다.
다시 2000년 시드니 대회를 기억해보자. 미국의 태권도에서 세기의 ‘미담’이 있었다. 한국계인 에스더 김과 케이 포는 플라이급의 동료이자 맞수. 그런데 선발전 과정에서 케이 포가 다치자 에스더 김은 결승전 출전을 포기하고 몰수패를 당했다. 이 따사로운 우정 때문에 시드니행 티켓은 부상에서 회복된 케이 포의 몫이 되었다. 그런데 두 선수 사이의 이 ‘미담’을 미디어가 확대재생산하자 상황이 꼬이기 시작했다. 에스더 김은 에 초대됐고, 미국올림픽위원회의 스포츠맨십상을 받았다. 이런 미담의 주인공 곁에는 늘 권력자들이 붙어서서 사진을 찍는다. 그때는 사마란치 시대였다. 그는 에스더 김을 시드니로 특별 초청했다. 관중석에 앉은 에스더 김을 외신은 ‘진정한 승자’라고 불렀다. 케이 포는 예선 탈락했다. 카메라는 일제히 관중석의 에스더 김을 포착했고, 그녀는 실제로 패배한 케이 포를 향해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이 확대재생산된 휴먼 스토리에서 케이 포는 소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이번 대회 여자펜싱 에페 4강전. ‘멈춰선 1초’에 의해 신아람은 패하고 말았다. 명백한 오심이었다. 항의와 이의 제기가 있었으나 번복되지 않았다. 그러자 갑자기 ‘미담’이 들려왔다. 국제펜싱연맹과 대한체육회 박용성 회장이 만나서 타협책을 찾았으니 신아람에게 페어플레이 ‘특별 메달’을 수여하겠다는 것이다. 이기흥 단장은 “판정에 승복하는 성숙한 국민” 운운했다. 그 미담을 위해 신아람의 1초는 그제야 영겁 속으로 사라졌다. 그러나 신아람은 ‘미담’을 줄 테니 그 주인공이 돼달라는 권력자들의 타협안을 덥석 물지 않았다. 신아람은 급조한 미담의 주인공이 되기를 거부하고 차라리 1초의 한을 가슴에 묻는 쪽을 택했다.

런던올림픽 남자유도 경기를 마친 조준호(왼쪽)와 에비누마 선수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판정 번복은 승자가 된 에비누마마저 '불행'하게 만들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런던올림픽 남자유도 경기를 마친 조준호(왼쪽)와 에비누마 선수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판정 번복은 승자가 된 에비누마마저 '불행'하게 만들었다. 올림픽사진공동취재단

남자유도 66kg 이하급 조준호 선수의 경기도 우리를 깊은 생각에 젖게 한다. 그는 8강전에서 일본의 에비누마 마사시를 상대로 포인트 없이 심판 전원 우세승을 거뒀다. 하지만 후안 카를로스 바르코스 국제유도연맹 심판위원장은 다시 판정하라고 지시했다. 그는 와의 인터뷰에서 “에비누마가 공격으로 점수를 얻을 뻔했던 것을 상기시켰다”고 밝혔다.
항간에는 세계 유도를 주름잡는 일본의 영향력을 의식했다는 식의 추측이 나돌지만, 바르코스 위원장의 말에도 일정한 근거는 있다. 그는 예의 인터뷰에서 “판정 번복으로 연맹이 실추되는 것이 유도가 실추되는 것보다 낫다”고 밝혔다. 이 점이 중요하다. 극소수의 경쟁자들이 수년 동안 여러 대회에서 맞붙는 게 유도다. 그러다 보니 극단적으로 소심한 경기가 만연해졌고, 이를 만회하려고 ‘효과’를 없애고 큰 기술 위주로 규정을 바꾸었으나 이마저 신통치 못해 이번 대회에서 보듯이 거의 모든 경기가 연장까지 가는 수세적인 유도가 되었다. 이렇게 ‘유도가 실추’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연맹이 실추’되더라도 큰 기술을 시도한 에비누마의 손을 들어주라는 지시다.

극적인 승자, 에비누마의 어두운 표정
이 점은 고려해볼 만하다. 그러나 당장 그 자리에서, 팽팽한 시소게임을 마친 상황에서, 3명의 심판이 조준호의 승리를 선언한 상황에서 위원장이 ‘유도 철학’을 즉각적으로 실천한 것은 용인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의 선의는 대회를 마친 이후 각국 대회의 관계자나 전문가들과 함께 심사숙고해 규정 개정 등을 통해 개혁해야 하는 것이지 당장 그 자리에서 실천할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내게는 변명처럼 들렸다.
조준호는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동시에 일본의 에비누마 선수는 당황해했다. 자신의 승리로 번복됐음에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마시고 싶지 않은 술잔을 억지로 받은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에비누마 선수가 실추된 유도와 연맹의 명예를 간신히 지키고 서 있었다. 한국 축구팬들의 호들갑스러운 야유에 대해 인종차별 언어로 빈정거린 자국의 대표 선수를 즉각적으로 퇴출시키고 진심을 담아 사과한 스위스축구연맹과 더불어 반드시 기억할 만한 장면이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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