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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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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자부활전이 없는 경기장

등록 2012-07-20 23:17 수정 2020-05-03 04:26

‘백신’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의 진단이다. 그는 미국 유학 중에 실리콘밸리의 튼튼한 기술 개발 생태계를 목격했다. 열 번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고 그중 한 번의 성공으로 실패를 만회할 수 있는 생태계가 그곳에는 있고, 우리에게는 없다. 심각하게 말한다면, 우리는 중학교 무렵에 실패하면 다시는 패자부활전조차 가질 수 없다. 어떤 사람은 되묻는다. 이보, 선생. 당신은 현실을 잘 모르는 것 같아. 요즘엔 말이오, 초등학교 때 이미 학력 서열이 결정되고 있다오. 왜? 답답하오? 한잔 하시오. 내가 술은 못하지만 쓰라린 술잔만큼은 받지 않을 수 없다.

사회로 ‘방출’된 비정규직 지도자들
스포츠는 더 열악하다. 실패하면, 다시는 링에 오르지 못한다. 구조가 허약하기 때문이다. 건강한 생태계?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피라미드형의 발전 과정? 그런 것은 임시 가설물처럼 대충 설치는 되어 있으나 안전하지 않다. ‘마이너리그’가 없기 때문이다. 모두가 1등만 바라보고, 그것이 좌절되면 경기장을 떠나야 한다. 사회로 ‘방출’되면 월급 100만원이 조금 넘는 비정규직 지도자 자리를 찾아야 하는데, 그것이 또 하나의 먹이사슬이요 경기장이 된다. 이 어둠의 경기장에서는 종종 스카우트나 장비와 관련된 비리가 터져나온다.
가장 극단적인 사건은 지난해 6월, 경찰이 발표한 양궁 관계자들의 총체적인 부패 먹이사슬이다. 당시 부산진경찰서는 국가예산을 지원받는 전국 190여 개 초·중·고와 대학, 실업팀 양궁 감독과 코치, 교사 등이 양궁장비 제조업체와 짜고 서류를 조작해 돈을 챙겼다고 발표했다. 그 수가 어마어마하다. 교사, 감독, 코치, 선수 등 모두 109명이 불구속 입건됐다. 국가대표 코치, 올림픽 메달리스트, 체육훈장 수상자 등도 모조리 포함된 사건이었다. 그나마 검은돈을 받은 금액이 상대적으로 적은 사람들은 소속 기관 통보로 마무리되었는데, 그 수 역시 135명이다. 무려 200여 명이 포함된 사건이니 가히 양궁과 관계된 거의 모든 사람이 얽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검은 거래를 통해 팔자를 고쳤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주범들을 제외하고는, 생활 형편이 여의치 않은 대다수 비정규직 지도자들이 명절 때 한숨을 돌리는 정도였을 것이다.
분명히 잘못된 행위지만, 스타 중심의 엘리트 스포츠 편중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는 마이너리그가 존재하거나 생활체육이나 학교 체육에서 어느 정도 안정된 조건에서 지도자로 살아갈 수 있는 여건이 있다면 이런 비리는 뿌리내리기 어려울 것이다. 유럽 여러 나라의 스포츠 교육에 관한 TV 다큐멘터리는 자기 지역사회에서 직업적 만족과 정서적 존중을 얻으며 살아가는 지도자들을 보여준다. 반면 우리 지도자들은 극심한 생활고와 인간적 자괴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 반작용으로 학생 선수에 대한 폭력 또한 발생한다.
최근 프로야구에서는 제10구단 창단이 뜨거운 감자고, 프로축구에서도 경기도 안양시 차원의 구단 창단이 이슈가 되고 있다. 두 가지 사안이 ‘뜨거운 이슈’가 되는 까닭은 기득권을 가진 기존 구단의 이해관계와 어긋나기 때문이다. 9개 구단으로는 정상적인 리그 운영이 어려움에도 일부 대기업의 강력한 반대로 인해 프로야구의 제10구단 창단은 난항을 겪고 있다. 안양시의 프로축구단 창단 역시 지역 정치권과 기존 프로구단 등의 장벽을 넘기가 쉽지 않다. 물론 체계적인 준비(구단 인프라와 선수 수급 및 지역 연고성 창출 등) 없이 우후죽순으로 팀이 생겨도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지 지금보다는 한두 팀이 더 참여해 리그라는 콘텐츠를 풍성히 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필요한 대전제가 ‘마이너리그’다. 이는 단지 각 종목마다 2부 리그를 반드시 둬야 한다거나 일단 마이너리그에서 출발하자는 이야기만이 아니다. 이런 것을 포함하되, 더 높은 차원에서는, 모두가 1등이요 우승을 목표로 하는 게 아니라 팀마다 색깔이 다르고 목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그것을 존중해야 한다.

오직 1등, 금메달을 향해 뛰는 풍토는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훼손한다. 프로아규 2군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오직 1등, 금메달을 향해 뛰는 풍토는 진정한 스포츠 정신을 훼손한다. 프로아규 2군 선수들이 훈련하는 모습. 사진 한겨레21 정용일

서로 다른 열망이 공존하는 사회

박지성 선수가 퀸즈파크레인저스(이하 QPR)로 이적했다. 그리하여, 실패했는가? 그렇지 않다. 박지성은 QPR에서는, 맨유에서처럼 4차례 프리미어리그 우승이나 3차례 리그컵, 1차례 유럽 챔피언스리그 우승 같은 것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QPR가 그것을 목표로 박지성을 영입한 것도 아니다. 지난 시즌에 무려 15년 만에 1부 리그에 올라오긴 했지만, QPR는 1882년에 창단된 팀이다. 찰스 다윈이 사망하고 제임스 조이스가 태어났으며 임오군란이 일어났던 해에 창단된 이 ‘마이너리그’ 팀의 최대 목표는 2부 리그 추락 방지다. 19세기 빅토리아 여왕 시절 고조할아버지가 응원하던 팀을 대를 이어 사랑하는 QPR 팬들의 이 열망을 위해 박지성이 뛴다.

우리 스포츠도 이렇게 발전되어야 한다. 팀마다 목표가 다르고 지도자마다 철학이 다르며 지역 클럽의 코치마다 개성이 다르고 동네 조기축구회마다 색깔이 달라서, 그 각각의 존재 이유가 너무나 선명하고 아름다운 건강한 생태계! 그것은 우리가 실현해야 할 공동체이기도 하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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