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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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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씨를 새겨준 것은 미디어였다

선수의 ‘잘못’에 집중해 이미지 만들고 확대재생산하는 언론… 원인은 선수지만, 미디어가 붙인 ‘꼬리표’는 진실일까?
등록 2012-02-03 17:48 수정 2020-05-03 04:26

(이하 )를 보았다. 연초에 박근혜와 문재인의 출연으로 유명해진 SBS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 얘기가 아니라, 설 연휴 때 방송된 이동국 선수 얘기다. 에서 본 이동국은 그가 스타덤에 오른 햇수와 엇비슷하게 10여 년 동안 축구장 근처에서 어슬렁거린 내가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불운하고 예민한’ 이동국?
그는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고종수와 함께 2002년을 빛낼 스타로 등장했다. 그러나 정작 2002년에 히딩크의 부름을 받지 못했다. 에서 이동국은 그때 술로 지새웠다고 했다. 절치부심하여 2006년을 노렸으나 최종 예선 막판에 큰 부상을 입었고, 다시 2010년을 겨냥했으나 ‘38분’만 뛰고 말았다. 1998년 때의 출장과 합치면, 12년 동안의 월드컵 도전사에서 겨우 ‘51분’이다. 그런 수난의 세월 동안, 그라운드나 믹스트존에서의 인터뷰 때, 이동국은 기자들이 원하는 말만 했고 더 이상의 부언은 삼갔다. 그래서 더욱이 그가 말수가 적고 예민하다고 생각해왔는데, 를 보니 그게 아니었다.
이경규나 김제동 같은 이와 스스럼없이 대화를 했고, 특유의 터닝슛과 같은 ‘반전 유머’ 감각도 놀라웠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자신을 ‘객관화’해 오랫동안 겪어온 시련을 담담하게 풀어냈다는 점이다. 무려 12년 동안 고작 51분밖에 뛰지 못한 자신의 월드컵 ‘수난사’에 대해 이동국은 블랙유머까지 던져가며 술회했다. 그리하여 나는 그동안 내 머릿속에 각인된 이동국은 (나 자신을 포함해) 미디어가 ‘만들어낸’ 이동국은 아니었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그 나름의 다양한 생각과 소소한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이동국을 ‘비운의 골게터’식으로 설정하고 인터뷰 때마다 그에 따른 질문을 던짐으로써 선수 또한 그에 대한 수세적인 응답을 반복해서 고착화된 이미지?
이를테면 이천수 선수가 있다. ‘악동’ 하면 스포츠 전 종목을 걸쳐 당장 생각나는 선수가 바로 이천수일 것이다. 올 시즌 k리그 복귀를 준비해온 이천수가 지난 1월6일, 전남 구단 홈페이지를 통해 ‘구단과 팬들께 드리는 사과문’을 올렸지만 구단 쪽은 단호하게 그의 사과를 거절했다.
여기에는 복잡한 정황들이 얽혀 있다. 2009년 6월, 이천수는 코칭스태프에게 항명하고 팀을 무단이탈해 사우디아라비아의 알 나스르로 이적해버렸다. 이에 전남은 이천수를 ‘임의 탈퇴 선수’로 공시했는데, 이는 구단의 철회가 없는 한 국내 무대로 복귀할 수 없게 되는 조처다. 이런 과정에서 복잡한 이면 계약 및 위약금과 관련한 민사재판이 있었고, 그 여파는 아직 계속되고 있다. 이천수가 구단과 팬들에게 ‘사과의 뜻’을 밝혔지만, 구단 쪽은 여전히 진행 중인 법정 소송을 유리하게 가져가기 위한 ‘전술’로 이해하는 분위기다.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말수 적고 예민한 기존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축구선수 이동국. SBS TV 갈무리

SBS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해 말수 적고 예민한 기존 이미지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 축구선수 이동국. SBS TV 갈무리

‘용서받지 못할 자’ 이천수?

어느덧 32살이 되어 서서히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해야 하는 이천수로서는 확실한 자세를 보이는 것이 필요할 듯싶다. 하지만 구단이 요구하는 부분도 이해하기 어렵고, 부분적으로는 지나치게 완강해 보인다. 구단은 이천수에게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해 국내 프로축구 관계자들과 팬들에게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하고 이들로부터 용서를 받은 후”에야 공시 철회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구단이 이천수 쪽에 법적 문제에 대해 따로 전달한 요구가 없다고 전제할 때,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하고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하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헤아리기 어렵다. 이런 정황들에 대해 2009년 당시 이천수를 지도한 박항서 감독은 “용서를 빌고 용서를 하는 것은 각자가 판단해야 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천수가 팬이나 구단에 계속 진실된 사과의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매우 간절한 주문임이 틀림없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 ‘진실된 사과의 모습’인지 이천수로서는 난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복잡한 정황을 보도하는 과정 속에서 이천수의 ‘악동’ 이미지는 더욱더 부풀려진다는 점이다. 대표팀의 최강희 감독은 이천수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독특한 성격을 잘 인도해주면서 살려줘야 하는데, 한국 문화는 틀 안에 집어넣으려 하고 인정을 안 하려 하니 이런 현상이 나온 것 같다”고 했는데 새겨들을 만한 대목이다.

특히 문제의 2009년 시즌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해 시즌 초에 이천수는 오프사이드 판정을 내린 심판을 향해 ‘감자 주먹’과 ‘총알 세례’ 같은 거친 행동을 보였고, 한국프로축구연맹은 6경기 출장 정지와 벌금 600만원의 중징계를 내렸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징계였다. 그런데 마약과 강력사건 전담 경력을 가진 검사 출신의 곽영철 상벌위원장은 이천수에게 3경기 동안 페어플레이 기수로 사회봉사를 하라고 추가 징계를 내렸다. 당시 곽 위원장은 “선수가 페어플레이 기수로 나서는 것은 세계 최초”라며 “이를 통해 새 사람이 되고 대스타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강력사건 검사 출신다운 징계였지만 그리하여 어떻게 되었는가. 새 사람이 되고 대스타가 되었는가. 그해 3월, 전남 광양전용구장에서 이천수는 선수가 아니라 기수가 되어 수많은 팬들과 카메라, 동료, 선후배 선수들이 보는 앞에서 징계를 받았다.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서른이 다 돼가는 이천수의 얼굴은 심각하게 굳어졌다가 끝내 침울하게 일그러졌다. 머리를 짧게 깎은 이천수는 2분여 동안 그렇게 벌을 받다가 관중석으로 올라갔다. 당시 박항서 감독은 “연맹의 징계가 언론과 팬들의 관심을 끌어내기 위한 조치라면 잘못”된 것이라고 비판했다. 관중석에는 ‘선수 인격 무시하는 × 같은 연맹’이라는 플래카드까지 내걸렸다. 그로부터 석 달 뒤, 이천수는 중동으로 떠나갔다.

‘감히’ 기자에게 무례한 김병현?

또 한 명의 ‘악동’이 필드로 돌아온다. 올 시즌 프로야구팀 넥센 소속으로 뛰는 김병현 선수 말이다. 지난 1월20일 인천공항을 통해 귀국했는데, 현지에서 비행기가 1시간 일찍 출발하는 바람에 김병현은 ‘입국 장면’을 찍으려는 취재진의 요청으로 인근의 호텔 환영식장에서 다시 공항으로 가서 걸어나오는 해프닝을 겪었다. 이 역시 어떤 ‘데자뷔’처럼 보인다. 김병현에게 2003년은 ‘수난의 해’였다. 그해 김병현은 현지 관중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보이는 제스처 때문에 논란이 됐고, 국내에서는 취재기자와 몸싸움을 벌였으며, 미국으로 떠나는 길에 공항에서 다시 가운뎃손가락을 치켜드는 행동을 해서 그 자리에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비난 기사를 쓰게 하는 일을 겪었다.

그 뒤로 김병현에 대한 기사는 대체로 ‘악동’ 이미지의 반복이다. 그가 지난해 시즌 일본에 진출했을 때, 어느 일간지는 ‘돌아온 탕아, 김병현’이라고 표현했다. 언젠가 같은 프로그램에 이천수나 김병현이 출연해 스스럼없이 자신의 선수 시절 이야기를 털어놓기 전까지는, ‘악동’이며 ‘탕아’의 이미지는 주홍글씨처럼 그들을 따라다닐 것이다. 원인 제공이야 그들이 했지만 ‘프레임’을 좋아하는 미디어가 거듭 복제한 이미지이기도 하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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