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렸을 때, 최동원이 미웠다. 고교 야구가 빛나는 전성기를 구가하던 그 시절, 최동원이 나올 때마다 경남의 고교가 이겼고 경북의 고교들이 패했다. 그래서 미웠다. 대구에서도 한참이나 북쪽의 소백산 골짜기에서 태어났음에도 우리 일가족은 경북고와 대구상고(현 상원고)를 응원했으나, 번번이 졌다. 최동원 때문이었다.
그 시절, 고교 야구는 지금의 관중 600만 시대 프로야구가 건사해내는 ‘지역성’을 가볍게 뛰어넘을 만큼 강력한 열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1960~70년대, 탈향의 시대에 한반도 이곳저곳에서 상경한 사람들은 군산이나 광주나 대구나 부산의 고교 야구팀을 뜨겁게 성원했다. 그 열기를 고스란히 인수한 프로야구가 일찌감치 지역성을 기반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무슨 전두환의 ‘3S’ 정책 때문이 아니라, 오직 프로야구 외에는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를 확인할 수 없던 시절의 헛헛한 마음들 때문이었다.
미웠던 최동원, 우상이던 장효조그 뒤로도 나는 최동원이 미웠다. 대구의 삼성은 부산의 롯데에 수모를 당했고, 바로 그 전설의 ‘열흘 40이닝 네 차례 완투, 5회 구원투수, 한국시리즈 우승’의 제물이 되었다. 1987년 5월의 혈투는 또 어떤가. 해태 선동열과의 연장 15회, 4시간56분의 사투. 둘은 441개(최동원 209개, 선동열 232개)의 볼을 던지고도 2-2 무승부로 건곤일척을 끝냈다. 그런 최동원이, 좀더 솔직히 말하자면 무서웠다. 미성년의 나에게 온몸의 관절이 제각각인 채로 움직이면서도 정교한 다이내미즘으로 통합되어 145g의 야구공을 전폭적으로 던지는 그의 육체는 경외의 대상이었다.
내 어릴 적 우상은 장효조였다. 평균치를 조금(?) 밑도는 키와 몸무게를 지닌 나는 힘으로 밀어붙이는 쪽보다는 정교한 기술을 구사하는 선수들을 존숭했다. 민속씨름의 전성기 때 나는 손상주나 이기수를 좋아했다. 그들의 손기술은 천의무봉이었다. 메시가 공 다루는 수준이었다. 축구에서는 이태호였고, 야구에서는 장효조였다. 장효조의 스윙 속도는 정교하고 빨랐다. 발걸음도 빨랐다. 안타를 치고 나서 꼭 그와 같은 속도로 재빨리 1루나 2루 베이스를 제압한 뒤 뒤늦게 쫓아와 유니폼에 달라붙은 흙먼지를 툭, 툭 털어내던 장효조! 아, 내 기억 속의 장효조는 늘 2루에 있었다. 그는, 배팅할 때 양 입술을 앙다문 채 빠른 속도로 휘둘렀고, 잠시 뒤 2루 베이스에 서서 입술을 조금 벌리면서 씨익 웃었다. 안타 치는 일이야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악마처럼 이빨을 조금 보이며 씨익 웃었다.
아흐, 투타에 걸쳐, 명실공히 한국 야구의 초석을 다지고 영원히 봉인되지 않을 신화의 첫 번째 봉우리를 완성한, 두 개의 큰 별이 추석을 앞뒤로 하여 잰걸음으로 훌쩍 떠나고 말았다. 한 시대의 우상이 저무는 것을 보는 마음은 어느 경우에나 헛헛한 일이지만, 그들이 이제 겨우 55살(장효조)이며 또한 53살(최동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두 번 세 번 확인하면서는, 깊은 상실감에 사로잡혀 겨우겨우 한 글자씩 채워보는 글쓰기가 되고 있다. 너무 빨리 던지고 너무 빨리 쳐내던 투타의 거장의 너무 빠른 퇴망이라니, 명치끝이 쓰라리다. ‘그가 치지 않으면 볼이다’라는 직관을 발휘한 장효조 전 삼성 2군 감독의 영결식이 엄수되고, 그 슬픔을 채 추스르기도 전에, ‘타자를 마지막까지 윽박지르는 역동적인 피칭’(김성근 전 SK 감독)으로 1980년대 프로스포츠 역사를 온전히 자기 이름으로 기록한 최동원 전 한화 이글스 2군 감독이 세상을 떠났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 모두의 마지막 직책이 ‘2군 감독’이었다는 사실도 쓰디쓰다.
자존심 하나로 고독을 버텨낸 그들
이만수 SK 감독대행은 최동원을 기리며 “고등학교 때부터 전국에서 제일 잘했다. 고교·대학 때 혼자 던지다시피 했고, 84년 롯데 자이언츠 시절에는 한국시리즈에서 혼자 4승을 책임졌다. 그를 따라갈 투수가 없었다”고 추모했다. 김성근 전 SK 감독은 “마운드에서는 타협이 없었고, 그 고독을 즐길 줄 아는 투수였다”고 회고한다. 그런 최동원이 장차 선수노조를 지향하며 한국프로야구선수협회 창립을 주도하고, 그 바람에 소속 구단은 물론 프로야구계의 주류로부터 완전히 배척받아 방송가를 떠돌거나 사업을 하다가 김인식 전 한화 감독의 ‘선구안’으로 다시 필드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자존심 때문이었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숙이면 얼마든지 승승장구할 수 있었던 ‘스펙’의 최동원은 그것을 사양했다. 장효조 또한 자존심 하나로 필드의 고독을 버텨냈고, 외곽으로 전전해야만 하는 운명을 비루하게 역행하려 하지 않았다. 2군 감독을 끝으로 이 세상에서 완전히 은퇴해버린 두 사람은, 선수 때나 그 이후에나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는 연습은 하지 않았다. 최동원은 그의 방식대로 낙차 큰 삶을 살았고, 장효조 또한 그의 방식대로 잇몸을 드러내며, 씨익 웃으면서, 그의 길을 걸었다.
그들의 선배와 동료들이 아직은 한국 프로야구의 왕성한 현역 지도그룹이기 때문에 당장의 공백이 발생할 리는 없지만, 장효조와 최동원이라는 이름은 달리 그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이 없으니 공허함 또한 측량하기 어렵다. 그래도 들려오는 소식이 적지 않아 위로를 얻는다. 그들의 이름으로 된 타격상이나 투수상을 마련하자는 얘기도 있고, 그들의 육체가 온전했던 때에 꽤 오래 머물렀던 팀에서(비록 악연과 애증이 뒤엉킨 관계지만) 영구 결번 같은 추모가 이어질지도 모른다.
황망하게 추모담이나 나눌 때가 아니다더불어 생각하건대, 이참에 프로야구는 물론 스포츠 전 영역에 걸쳐 모든 기록과 기억을 제대로 정리하고 그것을 토대로 제대로 해석하고 평가하는 일까지 도모하자. 한국의 근대성을 입증할 스포츠계의 별들이 하나둘씩 스러지고 난 뒤에, 조각난 기록과 흐릿한 기억을 들고 황망하게 추모담이나 나눌 게 아니라, 이제라도 모든 기억의 파편을 모으고 모든 기록의 종횡을 짜맞춰서 그것을 해석하고 평가해 스포츠의 제 위상을 바로 세우는 한편, 이로써 한국의 일그러진 근대성을 해명하는 일 또한 상상해야 하지 않겠는가. 너무 빠르게 세상을 버린 두 별들의 빈자리는 그런 작업을 통해 제대로 메워져야 한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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