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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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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는 베이브 루스보다 힘이 세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큰 흥행 아이콘은 종전
전쟁과 야구 관중증가율의 놀라운 상관관계
등록 2010-12-30 15:29 수정 2020-05-03 04:26
베이브 루스는 1920년 54개의 홈런을 치며 미국 야구 흥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평화는 홈런보다 힘이 셌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관중증가율을 기록하게 했다. 사진 한겨레 자료

베이브 루스는 1920년 54개의 홈런을 치며 미국 야구 흥행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평화는 홈런보다 힘이 셌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은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관중증가율을 기록하게 했다. 사진 한겨레 자료

메이저리그 파업으로 월드시리즈가 무산된 1994년, 다큐멘터리 제작자 켄 번스는 19∼20세기의 야구 역사를 다룬 대작 (Baseball)을 제작했다.

번스는 18시간30분짜리 대작 다큐멘터리를 야구 경기를 본떠 9편으로 나눈 뒤 각 편에 ‘이닝’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각 이닝의 앞부분에는 야구라는 사업에서 돈을 벌기 위해 구단들과 커미셔너 사무국이 어떤 일을 했는지 간략하게 소개된다. 이에 대한 번스의 결론은 이렇다. “효과가 없었다.”(It didn’t work.)

54홈런 vs 제1차 세계대전 종전

그만큼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불러모으는 일은 어렵다. 처음에는 빛나 보였던 결정도 시간이 흐르면 그 효과가 상쇄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때로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나기도 한다. 홈런 타자 베이브 루스의 등장도 그런 사례로 꼽힌다.

루스는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뉴욕 양키스로 이적한 1920년 홈런 54개를 치며 메이저리그 신기록을 작성했다. 그해 그는 사상 최초의 30홈런 타자, 40홈런 타자, 50홈런 타자가 됐다. 1918년까지 메이저리그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은 네드 윌리엄스가 1884년 때려낸 27개였다.

루스가 1919년 29홈런으로 윌리엄스의 기록을 깬 것만 해도 대사건이었다. 54홈런은 당시로선 상상할 수 없는 숫자였다. 1920년 아메리칸리그 전체 홈런 수는 369개였다. 루스 혼자서 리그 전체 홈런의 14.7%를 친 셈이다. 올해 한국 프로야구에서라면 146홈런에 해당한다. 홈런 1위 롯데 이대호의 기록은 44개였다.

루스 이전까지 강타자란 배트를 짧게 쥐고 공을 정확히 맞춘 뒤 빠른 발로 점수를 올리는 선수를 의미했다. 삼진을 두려워하지 않고 풀스윙으로 홈런을 노리는 슬러거의 전형은 루스가 만들었다. 1920년대는 메이저리그 최초의 관중 폭등기이기도 하다. 10년간 경기당 평균 관중은 7530명으로 1910년대(4606명)에 비해 63.6% 증가했다. 슈퍼스타 루스의 탄생과 새로운 홈런 야구가 팬들을 자극했기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견해다.

하지만 이런 견해는 절반의 진실만을 담고 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관중증가율 기록은 루스가 54홈런을 치기 전해인 1919년에 나왔다. 전년 대비 무려 92.7% 많은 관중이 야구장을 찾았다. 물론 루스도 그해 29홈런을 쳤다. 하지만 홈런 신기록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바로 제1차 세계대전 종전(1918년 11월11일)이다. 입대했던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돌아왔고, 야구장은 다시 찾아온 평화를 만끽할 수 있는 장소였다.

메이저리그 경기당 관중증가율 최고 5시즌/메이저리그 경기당 관중증가율 최저 5시즌

메이저리그 경기당 관중증가율 최고 5시즌/메이저리그 경기당 관중증가율 최저 5시즌

루스가 흥행에 미친 영향이 과장된 데는 맥락이 있다. 1920년 메이저리그에서는 54홈런 기록과 함께 역사상 최악의 도박 스캔들이 터졌다. 시카고 화이트삭스 선수들이 도박사와 짜고 월드시리즈에서 승부 조작을 한 이른바 ‘블랙삭스 스캔들’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승부 조작은 프로스포츠 리그의 존폐를 뒤흔들 수 있는 사건이다. 위기의식을 느낀 구단주들은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 판사를 초대 커미셔너로 임명해 무소불위의 권한을 주면서까지 사태를 해결하려 했다. 이런 상황에서 새로운 미국의 영웅이자 메이저리그 흥행의 아이콘인 루스의 존재는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스캔들의 후유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1921년 평균 관중은 7003명으로 전년 대비 5.3% 감소했다. 승부 조작 사건이 준 충격에 비하면 미미한 감소율이었다. ‘주범’ 화이트삭스의 시즌 관중은 1920년 83만3492명에서 1921년 54만3650명으로 줄었다. 화이트삭스의 성적은 96승58패에서 62승92패로 떨어졌다. 1승당 관중 수로 따지면 8682명에서 8769명으로 오히려 늘었다.

메이저리그에서 1919년 다음으로 관중증가율이 높았던 해는 1946년(69.2%), 1916년(33.4%). 1920년(26.5%), 1945년(24.8%)이다. 이 연도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하다. 1919·1920년은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시즌이었다. 1945·1946년은 제2차 세계대전 전후다. 그리고 1916년은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 특수를 누리던 시기였다. 반대로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과 미국이 참전한 1917·1918년, 그리고 베트남전 참전이 본격화된 1961년은 관중감소율이 가장 높았던 시즌이다.

야구는 ‘안전’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것

1998년 마크 맥과이어와 새미 소사가 역사적인 홈런 레이스를 펼쳤다. 맥과이어는 70개, 소사는 66개의 아치를 그렸다. 1998년은 메이저리그 파업이 끝난 뒤 3년째 되던 시즌이었다. 미국 언론은 “루스가 메이저리그를 블랙삭스 스캔들로부터 구했듯이, 맥과이어와 소사가 파업 뒤 등을 돌린 팬들을 다시 야구장으로 부를 것”이라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1998년 관중증가율은 그 전 2년간 수치보다 떨어졌다.

베이브 루스는 위대한 타자다. 루스처럼 리그를 완벽하게 지배했던 타자는 전무후무하다. 무엇보다도 그는 야구라는 경기를 영구히 바꿔놨다. 하지만 1920년대 메이저리그 호황의 첫째 이유는 홈런이 아닌 평화였다. 전쟁은 야구의 적, 평화는 야구의 친구였다. 베트남전 때 한 반전 운동가는 “야구의 목적은 안전하게(세이프) 집(홈)으로 돌아오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민규 기자 didofid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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