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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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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수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쳐라

서른이면 은퇴를 생각해야 하는 선수들, 강의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돌아볼 수 없을까
등록 2010-08-18 15:33 수정 2020-05-03 04:26
‘스포츠 인문 공부’는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선수들에게 절실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운동선수가 오전에 체육원에서 공부하는 모습. 한겨레 김경무 기자

‘스포츠 인문 공부’는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선수들에게 절실하다. 오스트레일리아의 한 운동선수가 오전에 체육원에서 공부하는 모습. 한겨레 김경무 기자

이런 상상을 해보자. 훈련을 마친 선수들이 샤워를 하고 간편복으로 갈아입고는 속속 강의실로 들어선다. 피곤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지만 산뜻하게 샤워도 했고, 오후 강좌만 들으면 곧 맛깔스러운 저녁 식사가 기다리고 있다.

오늘의 주제는 ‘유럽의 클럽 축구와 도시 문화’. 강사는 정성껏 준비한 파워포인트 자료와 동영상으로 오늘날 축구가 어떻게 유럽의 빛나는 스포츠 이벤트가 되었는지, 그 배경을 유럽의 근현대 도시 문화를 통해 설명한다. 유럽 진출을 꿈꾸는 선수들은 리버풀이나 바르셀로나, 혹은 뮌헨이나 밀라노의 현대사를 통해 그곳을 연고지로 하는 명문 클럽의 가치를 이해하게 된다. 지난주에는 영화 를 보았고 다음주에는 왕년에 K리그 명수비수였다가 지금은 성실한 에이전트로 활동하는 선배의 특강이 예정돼 있다. 다시, 선수들은 연단을 바라본다. 오늘날 유럽의 명문 클럽이 연고지 팬들과 어떻게 스킨십을 나누는지 상세한 자료와 영상이 흐른다.

물론, 상상이다. 굳이 이름을 붙이자면 ‘스포츠 인문 공부’가 될 텐데, 아직은 상상에 불과하다. 하지만 나는 이런 상상이 실질적인 기획으로 이어지고 머지않아 각 종목의 선수들이 이같은 ‘유연하면서도 실속 있는’ 인문 공부를 해야 한다고 믿는다.

유연하고 실속 있는 ‘스포츠 인문 공부’

내가 굳이 ‘유연하면서도 실속 있는’에 따옴표를 한 까닭은 흔히 말하는 ‘인문학’ 혹은 ‘인문 강좌’에 대한 고정된 이미지 때문이다. 글쎄, 선수들에게 인문 공부가 필요할까. 이런 의문이 든다면 아마 일반 시민을 대상으로 하는 보통의 커리큘럼을 연상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까 ‘그리스 신화와 현대 예술’이라든지 ‘산수화에 담긴 조선 선비들의 생사관’ 같은 내용, 그야말로 주옥같은 명편이지만 그 내용을 고된 훈련과 비중 있는 경기를 앞둔 선수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현실성이 떨어진다.

그와는 다른, 그러니까 ‘유연하면서도 실속 있는’ 공부를 각 종목의 선수들과 함께하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인데, 그 단초는 의 이 지면을 어울려 쓰고 있는 스포츠마케터 조건호씨의 글 때문이다. 그는 지난 7월16일 발행된 819호에서 ‘훈련장에 심리학자를 허하라’고 썼다. 그 글에서 조건호씨는 프로배구와 여자축구 등에서 심리상담 및 치료사로 활동하는 인하대 윤혜선 박사의 말을 인용했는데, 한 번 더 환기하자면, 윤 박사는 “스포츠심리학은 한 인간에 대한 접근이에요. 1등을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선수들이 그라운드 안팎의 삶에서 행복을 찾게 도와주는 거죠”라고 말했다.

우리네 인생이 끝없는 경쟁과 과도한 긴장의 연속이듯이 스포츠 선수들 역시 상당한 심리적 긴장 상태에서 살아간다. 그런데 스포츠 선수가 일반인과 다른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 적어도 20∼30년의 사회생활 동안 꾸준히 겪거나 이겨내는 일을 스포츠 선수들은 한창 나이 때 집중적으로 치른다는 것이다.

공부 없이 승리 지상주의에 매몰돼서야…

대개의 종목에서 선수들은 서른 살 안팎에 은퇴한다. 체조나 빙상의 경우는 20대 중반만 돼도 ‘노장’ 소리를 듣는다. 그러니까 일반인이 20대에 야심차게 사회에 진출해 30대에 다양한 경험과 관계를 쌓고 40∼50대에 자기 나름의 가치관과 방법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비해, 스포츠 선수들은 불과 10년도 되지 않는 시간 안에 그 모든 것을 겪어내야 한다. 그 압축된 시간 속에서 젊은 선수들은, 보통 시민들이 40∼50대의 원숙한 경륜으로 이겨내는 좌절이나 상실감까지도 치러야 한다. 그 시련과 긴장을 마침내 이겨내고 어렵사리 선수 생활을 마치면, 서른도 되기 전에 은퇴를 한다. 막막하고 황량한 인생의 후반전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니 심리학이 ‘인간에 대한 진지한 접근과 이해, 관심과 치유’를 목표로 한다면 스포츠 선수에게 더없이 소중한 과목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맥락에서 스포츠 선수에게 ‘인문 공부’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는 중이다.

우리 사회가 수십 년의 산업화 과정에서 ‘1등 제일주의’와 ‘승리 지상주의’에 매몰돼왔고, 그것이 오늘날 더욱 가속화되고 있음은 누구나 일상적으로 비통하게 확인하고 있는 일이다. 거두절미, 인간이 한낱 목적의 도구가 되고 승리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하는 것, 이런 현상을 달리 표현하자면 바로 ‘인문성의 위기’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인문성의 회복’이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각 대학의 인문학과를 좀더 지원해야 한다는 얘기 정도가 아니라 ‘인간의 인간됨’을 회복하기 위한 사회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이 된다.

이를 스포츠로 관심을 돌리면 그 어느 분야보다 문제가 심각하다. 성장 과정의 학생 선수들이 교실에서 공부하는 모습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곳이 우리 스포츠 현실이다. 각 종목을 관철하는 유일한 덕목은 ‘승리 지상주의’다. 그 희소성을 차지하기 위해 어린 학생과 젊은 선수들의 기본권은 상당히 유보돼 있고, 그들 뒤에는 일부 협회 관계자와 지도자와 부모들의 일그러진 관계가 촘촘히 형성돼 있다. 올봄에 스포츠팬들을 충격으로 몰아넣었던 쇼트트랙 대표 선발 파문이 냉혹하게 증명했듯이, 이런 상황에서 젊은 선수들이 무엇을 배우며 성장할 것인가,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상상을 하고 또 그것을 기획해야 하는 것이다. 각 종목의 선수들이 훈련장뿐만 아니라 강의실에도 모이는 풍경을 말이다. 각 종목의 미학과 작동 원리를 통해 자신이 몸으로 체현하는 스포츠가 얼마나 순도 높은 행위인지를 이해하는 것, 각 종목의 세계적인 추세와 현황 분석을 통해 자신의 현재 위상을 점검해보는 것, 스포츠 산업의 동향과 새롭게 떠오르는 관련 분야의 현황을 통해 은퇴 이후의 미래를 상상해보는 것, 팬이나 미디어와 어떻게 관계를 맺는 게 좋은지 이해하는 것, 스포츠심리학이나 영양학 혹은 운동역학이나 재활 프로그램 등을 통해 부상이나 슬럼프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구하는 것, 스포츠가 결코 사회의 다른 분야에 비해 미천하거나 취약한 것이 아님을 확인해 견실한 자아정체성을 갖는 것. 이같은 공부를 일컬어 ‘스포츠 인문 공부’라고 하고, 아울러 이를 진지하게 상상해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야말로 스포츠 선수에게 긴급히 요구되는 중대한 과제가 아닐까.

스포츠 권력의 철옹성을 허물라

문제는 역시 ‘현실’이다. 우선 선수들의 현황이 강의실에 앉아 있도록 놔두지 않는다. 구조의 한계도 있다. 각 종목의 스포츠 권력은 자신들의 철옹성 안으로 다른 학문이나 분야가 참여하는 것을 ‘간섭’으로 여긴다. 내 개인적으로도 국가인권위원회가 주관한 ‘스포츠와 인권’ 프로그램에 참여했을 때, 기존 스포츠 권력이 이런 기획을 기피하고 방어하려 했음을 겪었다. 이는 조건호씨의 글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스포츠심리학자가 선수와 좀더 가까이서 대화하고 분석하기 위해 훈련장과 숙소 출입을 원했으나 ‘어딜 감히 들어오나’라는 일선 지도자들의 문전박대에 발걸음을 돌린” 적이 많다고 썼다.

그 역시 ‘현실’이다. 요컨대 그와 같은 비합리적인 상황도 어김없는 현실이므로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서, 그러나 반드시 함께 모색해 조심스럽게 첫걸음을 떼는 일이 중요하다. 이 사회의 어느 분야든지 자식이 자기를 닮아 그 분야로 진출하려 할 때 걱정은 하면서도 대체로 격려를 하게 마련이다. 아나운서나 교사나 연구원이나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하는 아이에게 견책하는 부모는 거의 없다. 그러나 운동선수가 되겠다고, 아니 정말로 부모의 자질을 이어받아 뛰어난 운동 기량을 자식들이 보여줄 때, 지도자들은 깊은 한숨을 쉰다. 자식이 자신을 닮는 것을 꺼리는 분야는 아마도 스포츠가 유일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스포츠 선수로 성장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된 과정의 연속인지, 결국 은퇴했을 때 속수무책의 30대가 되어 아무런 기약과 보장도 없이 사회에 나서게 되는, 그런 심각한 상황이 반복되는 현실. 이를 개선하는 일로 ‘스포츠 인문 공부’는 충분히 상상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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