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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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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신, 마라도나 할렐루야

색다른 다큐 <축구의 신: 마라도나>…

축구장에서만은 정의가 실현되기를 바랐던 그의 팬들에게 공감한다
등록 2010-06-03 16:42 수정 2020-05-03 04:26
마라도나(왼쪽)는 “피델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 “이러다 스캔들 나겠네”. 유머가 넘치는 마라도나를 볼 드문 기회다.

마라도나(왼쪽)는 “피델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진 한마디 “이러다 스캔들 나겠네”. 유머가 넘치는 마라도나를 볼 드문 기회다.

“우고 차베스가 좌파의 상징이 되고, 디에고 마라도나가 반미의 대표선수가 되는 시대가 나에게는 하수상해 보인다.”

2005년 11월, 에 연재하던 스포츠 칼럼에 썼던 문장이다. 당시 미주정상회담 반대집회에 디에고 마라도나가 등장한 뒤였다. 그 뒤로도 오랫동안 마라도나에 대한 ‘반감’ 혹은 ‘애증’은 변하지 않았다. 필자를 포함한 우리에게 마라도나 이미지를 만든 소식은 요즘도 전해진다. “250만원대 최고급 비데 설치, 모든 방 흰색으로 칠해줘!”( 5월24일치) 마라도나가 남아공 월드컵 조직위에 요구했단 것이다. 반미를 서슴지 않는 스타를 주류 언론이 좋아할 리 만무하다 생각해 ‘걸러서’ 들었어도 이런 기행은 ‘똘아이 마라도나’란 잔상을 남겼다.

FIFA 회장에게 날렸던 시원한 독설

약물에 절어서 응급차에 실려가거나, 그라운드 안팎에서 하이킥을 날리거나, 관중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올리는 ‘뚱뚱보’ 마라도나를 우리는 보아왔다. 아니 그런 마라도나만 보아왔다. 신문의 가십이나 방송 뉴스에서 짧게 보여주는 마라도나는 십중팔구 그랬다. 다리에 카스트로, 팔에 게바라 문신을 새겨도 마이크 타이슨의 게바라 문신이 겹쳤을 뿐이다. 집회에 나서도 실은 똘아이 기질의 일부일 뿐이란 심증을 떨치지 못했다. 하여튼 ‘남미 마초’ 마라도나가 싫었다.
천재적 똘아이 동유럽 영화감독이 만든 천재적 똘아이 남미 축구스타에 대한 다큐멘터리 를 보기 전에 생각한 요약문.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뒤집으면 발칸의 패권주의자)란 의심을 사는 에미르 쿠스투리차 감독이 라틴아메리카 민족주의자(뒤집으면 반미주의자)로 보이는 마라도나의 다큐를 찍었다면, 마초의 마초에 의한 마초를 위한 다큐가 됐겠지, 생각했다. 그러나 짐작과 다른 순간이 영화에 자주 있었다. 앉아서 찬찬히 자신의 정치적 소신을 밝히는 마라도나, 자신의 인생이 담긴 노래를 부르며 회한 어린 눈으로 딸들을 보는 마라도나, 반세계화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는 마라도나, 앞뒤 뚝뚝 잘라 10초짜리로 편집된 뉴스 화면엔 보이지 않던 그의 진심이 보였다.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디에고 마라도나.
축구 스타로 걸어온 길을 돌아보면, 그가 근거 없는 ‘뻥장군’은 아니었단 생각이 더해진다. 항상 피억압 민중의 편에 섰다는 말이 나중에 만들어낸 말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중산층 클럽 리베르 플라테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클럽 보카 주니어스, 정치·경제는 물론 축구까지 독점하는 이탈리아 북부의 유벤투스가 아니라 못사는 남부의 나폴리를 선택한 이력이 새삼스레 모아지고, 선명하게 다가온다. 여기에 1986년 월드컵 잉글랜드전 승리가 포클랜드 전쟁으로 희생된 아르헨티나 민중의 가슴을 얼마나 어루만져주었는지 더해지면, 그의 승리가 정의의 승리란 말에 설득돼버린다. 언감생심 현실의 승리는 꿈도 꾸지 않으니, 그라운드에서라도 정의가 실현됐으면 좋겠단 소박한 희망을 마라도나가 어떻게 실현시켜주었는지 이해된다.
부시, 대처, 레이건, 엘리자베스, 블레어, 아벨란제…. 마라도나가 맞섰던 인물들은 마라도나를 응원할 이유를 말한다. ‘우리가 몰랐던’ 마라도나도 있는데, 예컨대 월드컵 우승 직후인 1987년 미국과 쿠바에서 동시에 상을 주겠다고 했을 때 미국을 ‘엿먹이고’(실제로 다큐에서 팔뚝질로 표현한다) 쿠바를 선택한 ‘싹수’ 보이는 전력이 있었다든지, 국제축구연맹(FIFA)을 20년 넘게 지배한 아벨란제 전 FIFA 회장과의 불편한 관계가 마라도나가 약물검사로 두 번의 월드컵에서 중도 하차한 것과 관련 있을지 모른다든지 하는 것이다. 이탈리아 축구협회 회장을 “마피아”, FIFA 회장을 “총을 파는 놈”이라고 거침없이 내뱉는 마라도나의 독설은 시원하다. 마라도나가 악동이라면, 그들은 악당이 아니던가.

모범생 펠레보다 똘아이 마라도나를

1986년 월드컵 잉글랜드전에서 ‘신의 손’ 골에 이어 6명을 젖히고 60m를 달려가 ‘세기의 골’을 넣었던, 세기의 풍운아 마라도나. 최고의 선수에서 최악의 괴물까지, 롤러코스터 인생을 살아온 그 앞에서 가수 마누 차오는 애절한 노래를 부른다. “내가 마라도나로 태어났다 해도/ 그가 걸어온 길을 똑같이 걸었을 것이다/ 천 개의 폭탄… 천 명의 친구들…/ 뭐든지 투명하게 100% 보여주는 삶.” 지랄 같은 삶을 살아가는 민중에게 모범생 펠레보다 똘아이 마라도나가 사랑받는 이유가 마지막 가사에 요약돼 있다.
이렇게 “팬으로서 그를 부당하게 대우하는 매스미디어에 대한 반격”이라는 감독의 연출 의도가 나에겐 완전히 통했다. 그의 다큐를 보고 남아공 월드컵에서 감독과 에이스가 모두 ‘난쟁이’인 팀을 응원할 마음이 생겼으니까. 그분의 마초적 기질이 여전히 꺼림칙하지만, 완벽한 혁명가 왕자님을 하릴없이 기다리기엔 인생이 너무도 짧다. 아르헨티나의 마라도나교도와 탁신을 지지하는 타이의 레드 셔츠와 에스트라다를 그리워하는 필리핀 민중이 말하는 바가 그것 아닌가. 잠시만 복잡한 생각을 멈추고, “올레올레올레~ 디에고~ 마라도나~”.
추신. 마라도나교의 교리와 상징물, 세례와 의식을 볼 기회도 다큐에 나온다. 그분은 약물로 코마에 빠졌다가 ‘부활’까지 하셨으니 신으로서 완벽하지 아니한가. 6월3일 개봉한다.



신윤동욱 기자 syuk@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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