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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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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같은 남아공, 영화 같은 월드컵

빈자의 격렬한 저항을 누른 채 열릴 ‘축구의 제전’…
‘안전을 빌미로 한 배제’라는 영화 같지 않은 현실의 초상
등록 2010-04-01 14:30 수정 2020-05-03 04:26

혹시 을 보셨는가. 오늘은 그 영화를 빌려 개막 70여 일을 앞둔 2010 남아공 월드컵 이야기를 해볼 참인데, 이 ‘스포츠 제전’과 무관하게, 은 공상과학(SF) 영화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그 시각적 충격과 비애로 가득 찬 결말은 한동안 당신의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 것이다.

지난 3월2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 인근에서 주택·철도 등 도시 기반시설 확대와 빈곤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REUTERS/ STRINGER

지난 3월23일 남아프리카공화국 행정수도인 프리토리아 인근에서 주택·철도 등 도시 기반시설 확대와 빈곤 철폐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는 시민들. REUTERS/ STRINGER

은 1979년 남아공 요하네스버그에서 태어나 18살 때 캐나다로 이민가 밴쿠버대학에서 시각효과를 공부한 신예 닐 블롬캠프의 쾌작이다. 이 문제작을 만들기 전에 그는 을 비롯해 비주얼 이펙트가 강력한 몇 개의 단편을 만들었는데, 그중에는 슈팅 게임이나 아디다스나 나이키 같은 유명 스포츠 용품사를 위한 단편도 있다. 그 작품들을 꼼꼼히 살핀 피터 잭슨이, 아 그러니까 과 으로 묵시록적 블록버스터 영화의 신경지를 개척한 바로 그가 의 연출을 맡겼고, 채 서른 살도 되지 않은 블롬캠프는 ‘오늘의 남아공’을 뜨겁게 보여준다. 미처 을 보지 못하셨다면, 일단 여기까지만 읽고, 3시간 후에 다시 만나기로 하자.

아마 당신은, 곧장 앞 문단으로 넘어왔을 것이다. 동네마다 비디오 대여점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있기 때문에 을 빌려볼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긴 하다. 어쨌든 이야기를 마저 풀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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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에 대한 대대적 청소’ 엄연한 현실

이 영화는, 어느 날 갑자기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상공에 나타난 외계인 우주비행물체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불법적으로’ 정착한다. 그곳이 제9구역, 즉 ‘디스트릭트 9’이다. 이제 그 불법 이민자를 대대적으로 청소하는 일이 시작된다. 영화는 이 뼈대만으로도 112분의 러닝타임을 빈틈없이 끌고 간다.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러, 바이러스에 감염돼 서서히 그리고 마침내 완전히 흉측한 외계인으로 변해버린 주인공이 매일 자기 아내에게 쓰레기로 만든 꽃을 보내는 것으로, 애틋하게 끝맺는다.

SF 영화로 외계인이 등장하지만, 명백히 이 영화는 과거 남아공의 아파르트헤이트(흑백 인종차별)를 다루고 있다. 실제로 남아공의 입법수도 케이프타운에 ‘디스트릭트 6’이 있었다. 1867년 케이프타운 도시 구획 당시 제6행정지구로 이름 붙여진 곳이다. 참고로 남아공의 수도는 셋이다. 프리토리아가 행정수도이고, 블룸폰테인은 사법수도이며, 케이프타운이 입법수도이다. 여기에 요하네스버그를 경제수도로 추가하기도 한다.

1970년대 초, 백인 정부는 ‘디스트릭트 6’에 거주하는 유색인종 6만여 명을 강제로 이주시켰다. 그들은 어렵사리 일군 터전을 떠나 ‘디스트릭트 6’에서 쫓겨났다. 국제도시 케이프타운을 건설하기 위해 도시의 전면적 재개발이 필요하다는 것이 그 이유. 백인을 위한 새 도시 프로젝트가 가동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피 냄새가 진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무자비한 철거에 저항하는 흑인운동이 전개됐다. 록그롭 제네시스의 리더였던 피터 가브리엘이 이 무렵 발생한 흑인 저항운동가 스티븐 비코의 죽음을 계기로 추모곡 (Biko)를 바친 뒤 인권운동가로 거듭나기도 했다. 그는 현재 세계적인 인권 네트워크 ‘위트니스’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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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11일 석방된 넬슨 만델라는 이듬해 악명 높은 인종차별법을 폐지하면서 20세기의 잔혹한 유산을 정리하기 시작했기에, 1993년 9월 ‘디스트릭트 6’에서 강제로 쫓겨난 철거민들을 깊은 마음으로 만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 정부는 몇 해에 걸친 강제이주 피해 진상 조사를 통해 지난 2004년, 일부 추방자들에게 ‘디스트릭트 6’로 귀환해 살 수 있도록 조치를 취했다. 지금도 속속 ‘디스트릭트 6’ 추방자들이 돌아오고 있다.

자, 여기까지는 ‘해피엔딩’이다. 그렇지만 2010의 봄, 남아공은 점점 치안이 불안해지고 있다. 지난 3월24일, 외신은 대도시 빈민가 흑인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격렬한 행동에 나섰고 이에 경찰이 직접적 폭력으로 대응하는 사태가 급진전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시위대는 일자리와 복지 같은 현실적 요구가 묵살됐음은 물론 프리토리아나 요하네스버그의 빈민가에서는 물과 전기와 음식, 그리니까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들이 붕괴되고 있으며, 이는 2010 월드컵을 ‘안전’하게 치르려는 정부에 의해 더욱 극심해지고 있다고 증언한다. 물리적 행동의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다. 생존 자체가 불투명한 흑인 빈민층의 시위는 더욱 거세지고, 안전한 월드컵을 치러야 하는 (또한 그것을 강력한 명분으로 내세우는) 정부의 강력한 진압도 격화되고 있다.

월드컵 현지 취재를 준비하는 국내 언론사들도 바짝 긴장하고 있다. 적색 신호등이 켜져도 가급적 멈추지 말고 그냥 달려야 한다는 ‘교통 수칙’ 같은 것을 익히는 중이다. 50명가량으로 구성되는 월드컵취재기자단은 대회 기간에 단체 행동을 최대 원칙으로 삼았다. 비용과 안전 문제로 취재를 포기하는 언론사도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스위스 취리히발 외신으로 ‘2010 월드컵 개최지 이전 검토’ 같은 보도가 있었지만, 이제 70여 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므로, 어쨌든 이번 6월의 월드컵은 남아공에서 열린다.

어쩌면 6월의 남아공은 영화 보다 더 긴장된 상황이 될 수도 있다. 남아공의 제이컵 주마 대통령은 3월 초 영국 방문 일정 중에 런던의 ‘웸블리’ 스타디움을 찾았다. 상징적인 일정이었다. 그는 ‘축구의 성지’ 웸블리 스타디움에서 전세계 언론과 축구팬을 향해 “남아공 국민은 월드컵을 위해 열심히 일했다. 범죄와 치안 문제에 대해서는 안심하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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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제’의 올림픽, 편하게 치를 수 있을까

‘근미래’는 반드시 그의 소망처럼 이뤄져야 한다. 6월11일에서 7월12일까지 한 달 동안, 축구의 제전은 ‘안전’하게 치러져야 한다. 그러나 ‘더불어’ 치러져야 한다. 억누르고 배제하고 은폐된 ‘안전’은 남아공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온갖 시련과 맞싸우면서 일궈낸 가치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안전’을 절대적 과제로 내세우면서, 이번 기회에 쓰레기더미 같은 빈민촌에 거주하는 자들과 여러 가지 이유로 정부에 대드는 ‘불평분자’를 ‘안전’의 바깥으로 내몰려 한다면, 올해 6월은 의 속편이 현실에서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은 상당히 잘 만든 영화지만, 그 속편을 현실에서 다시 보고 싶지는 않다.

정윤수 스포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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