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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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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치열해 더 재미있는 ‘더비 매치’


연고지가 같은 라이벌팀끼리의 경기는 정치·사회·종교적 요소가 녹아 있어 축구공의 묘미도 극대화돼
등록 2009-09-29 17:30 수정 2020-05-03 04:25

얼마 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맨유)의 박지성이 맨체스터 시티(맨시티)를 상대로 선발 출전해 한국 팬들을 기쁘게 했다. 이 경기는 가장 치열하고 중요한 경기로 분류되는 맨체스터 지역팀 간의 시합이었기에 현지 언론의 호들갑은 유난스러웠다. 감독과 선수들의 신경전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경기는 치열했고, 혈투 끝에 4-3이라는 스코어를 만들며 팬들을 열광시켰다. 한편 맨시티의 벨라미는 상대편 팬을 폭행한 혐의로 세 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았고, 맨유의 게리 네빌은 상대 팬들 앞에서 약을 올린 대가로 마찬가지로 징계를 받을 위기에 처했다. 게다가 심판의 편파 판정에 대한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는 등 등 맨체스터 더비의 후폭풍은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같은 지역 라이벌팀끼리의 경기인 ‘더비전’에서는 유독 치열한 플레이가 펼쳐진다. 지난 9월20일 치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 사진 연합 AP

같은 지역 라이벌팀끼리의 경기인 ‘더비전’에서는 유독 치열한 플레이가 펼쳐진다. 지난 9월20일 치러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 사진 연합 AP

치열한 신경전은 물론 유혈사태 일어나기도

이런 지역 라이벌끼리의 대결을 축구에서는 ‘더비’라고 부른다. 더비전이 유독 격렬하게 치러지는 이유는 다양하다. 우선 태생이 다른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맨시티는 중산층들이 만든 팀이고 맨유는 공장 노동자들이 창단한 팀이다. 자연히 경쟁관계가 형성됐다.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를 연고지로 한 리버플레이트와 보카주니어스는 가장 치열한 라이벌전으로 유명한데, 그 역시 팬층의 빈부 격차가 가장 큰 이유다.

정치적 이유로 라이벌이 된 경우도 있다. 로마의 라치오와 AS로마는 각각 좌우익을 대변한다. 그래서 경기마다 전쟁이 벌어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종교적 이유로 치열한 더비전이 벌어지는 경우도 있다. 영국 글래스고에서 신교의 레인저스와 구교의 셀틱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게 그 예다. 심지어 대륙 간 갈등이 내포된 터키의 갈라타사라이와 페네르바체의 이스탄불 더비도 있다. 여기서 갈라타사라이는 유럽, 페네르바체는 아시아를 대변한다.

이렇듯 치열하게 치러지는 더비전은 폭력 사건에 휘말리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얼마 전 칼링컵에서 재회한 동런던 더비 웨스트햄과 밀월의 경기는 관중 난입과 칼부림으로 얼룩졌으며,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더비인 레알베티스와 세비야전에선 세비야의 라모스 감독이 베티스 팬이 던진 병에 머리를 맞고 기절하기도 했다.

밀란에서 지켜본 더비전에서도 이런 폭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경기장 주변에는 평소보다 두 배가 많은 경찰력이 배치됐고, 서포터 간 충돌을 예방하려고 출입구를 따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관중이 시간차를 두고 경기장을 떠나도록 조정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충돌은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을 비방하는 현수막, 경기 내내 치솟는 화염, 휴지폭탄과 깃발이 어우러지면서 시종 살벌한 분위기가 연출됐다. 서포터들은 서로 자극하는 응원구호나 노래를 부르기 바빴다. AC밀란 팬들은 수적으로 열세인 인테르밀란 팬들을 놀리기 위해 “너네는 14명의 서포터밖에 없구나. 참, 너네는 밀란 밖으로는 응원도 가지 않지”라고 시비를 걸었고, 인테르밀란 팬들은 기죽지 않고 “너네는 목요일에 플레이하냐? 아참, 너네는 챔피언스리그에 못 나갔지” 하며 응수했다. 당시 징계로 인해 챔피언스리그에 못 나오고 있던 AC밀란 팬들의 자존심을 긁는 것이다.

이렇게 더비전은 간혹 폭력과 유치함으로 얼룩지지만, 그것만의 매력도 많다. 클럽 역사가 오래된 유럽에서는 서포터들도 대를 잇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클럽에 대한 사랑은 가족에 대한 그것과 동일시되며, 자신과 클럽을 동일시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한다. 더비 매치가 단순한 실력 대결 이상의 것이 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반드시 이겨야 한다는 압박감 때문에 선수들은 때로 초인적 힘을 발휘해 평소보다 더 강한 기량을 보여주곤 한다. 그래서인지 더비전을 앞둔 선수들이 겪는 심리적 부담감은 극심하다. 프랑스의 리옹에서 뛰던 말루다는 더비전인 생테티엔과의 경기를 앞두고 “더비 경기 한 주 전부터는 가족이나 친구들 모두 그것에 대해서만 말한다. 길거리에 나가도 마찬가지다”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이런 점은 선수들에게 분명히 동기부여가 되며 더비전의 열기를 더해준다. 더비전의 이런 성격 때문에, 팀 간의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고 있으면 그 재미가 배가된다. 더비전을 뛰는 선수들의 발끝에는 단순히 한 경기의 승패만 달린 게 아니라 팬 전체의 자존심과 열망이 걸렸으며, 이 자존심은 팀을 둘러싼 역사와 무관치 않다. 이런 더비의 경향을 관찰할 때면 마치 각 도시의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더비 매치를 치르는 팀을 통해 그 지역의 역사적 전개를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비전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한 지역의 모든 관심과 자존심이 축구 시합으로 집중된다는 것이다. 여느 스포츠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작은 축구공이 마치 용광로처럼 종교·정치·경제·인종 등 모든 요소를 녹여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축구공은 직경이 30cm에 불과하지만, 그 안에는 인간의 희로애락이 몽땅 들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경기마다 열광하고, 환호하고, 때론 절망하며 다음을 기약하는지 모르겠다.

실력 이외에 여러 요인 작용해 승부 결정돼

만약 축구의 승패가 단지 팀 간 실력 우위로 결정된다면 더비전의 전통은 오늘에까지 이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팬들의 환호 소리가 커지는 만큼 선수들은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되고, 이것은 예측할 수 없는 승부를 낳게 된다. 둥근 축구공이 어디로 굴러갈지 모르듯 승부의 향방도 미리 정해지지 않은 것이다. 바로 여기에 축구의 묘미가 있고, 팬들은 이 맛에 흠뻑 빠져들며 그들의 열정을 축구에 쏟아붓는 것 아니겠는가.

서민지 축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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