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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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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파-김동광-허재의 ‘톈진 회동’

아시아농구대회 뒤풀이 자리에서 나온 갖가지 에피소드들…
“중동 국가 횡포 맞서려면 스포츠 외교 강화해야” 의기투합도
등록 2009-08-21 17:40 수정 2020-05-03 04:25

8월16일 막을 내린 제25회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 대표팀을 이끈 이는 신동파 단장, 김동광 부단장, 허재 감독이다. 이 셋은 1960년대 중반부터 대략 10년 주기로 한국 농구를 대표한 스타들이다. 신 단장이 1944년생, 김 부단장이 1953년생, 허 감독이 1965년생이니 만으로 각각 65살, 56살, 44살이다. 셋은 또 한국 농구를 삼등분한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출신이기도 하다.
한국 농구가 낳은 최고의 스타인 세 사람이 지난 8월7일 저녁 아시아농구대회가 열린 중국 톈진의 한 음식점에서 기자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했다. 필자도 운 좋게 이 자리에 끼었다. 셋의 이야기는 옛날 에피소드로 시작됐다. 신동파 단장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과거 외국에서 열린 국제대회에 참가했을 때 있었던 이야기였다.

지난 7월31일 서울 풍납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25회 FIBA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결단식에서 내빈들의 격려사를 듣고 있는 신동파 단장, 김동광 부단장, 허재 감독(왼쪽부터). 사진 연합 황광모

지난 7월31일 서울 풍납동 올림픽파크텔에서 열린 제25회 FIBA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국가대표팀 결단식에서 내빈들의 격려사를 듣고 있는 신동파 단장, 김동광 부단장, 허재 감독(왼쪽부터). 사진 연합 황광모

10년 단위로 한국 농구계를 대표했던 신·김·허

“경기를 앞두고 몸을 풀고 있는데 당시 대표팀 동료 선수였던 곽현채 현 한국여자농구연맹 심판위원장이 유니폼 반바지를 잘못 입고 나왔어요. 그걸 내가 발견하고 손으로 곽 위원장 바지를 가리켰더니 곽 위원장이 고개를 숙여 바지를 쳐다보며 깜짝 놀라더군요.”

신 단장의 말이 이어졌다. “감독한테는 혼쭐이 날까봐 얘기 못하고 급히 사람을 시켜 유니폼 바지를 가져오도록 했어요. 경기는 시작됐는데, 다행히 곽 위원장은 스타팅에서 빠졌죠. 유니폼이 도착하고 곽 위원장이 후반에 투입됐는데,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슛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입담’이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허재 감독이 말을 받았다. “국가대표 시절에 최병식 전 국민은행 감독과 강동희 동부 감독이 한방을 썼는데, 걔들 방은 돼지우리 같았어요. 트레이닝복과 유니폼이 마구 뒤섞여 있었죠. 한번은 걔들 방에 갔는데 트레이닝 바지를 서로 바꿔 입어서 키가 큰 최병식 감독은 발목까지 다 보였고, 키가 작은 강동희 감독은 바지가 길어서 질질 끌고 다니더군요.”

김동광 부단장은 대표팀 절도 사건을 꺼냈다. “손버릇이 안 좋은 선수가 있었는데, 툭하면 선수들 돈이 없어졌어요. 나중에 범인을 잡았는데도 오리발을 내밀더군요. 하지만 물증을 딱 들이대니까 실토했죠.” 손버릇이 안 좋았던 이 선수는 농구계를 떠나 연락이 끊겼다고 한다.

화제는 과거에서 요즘 선수들 얘기로 옮겨졌다. 셋은 요즘 선수들이 너무 착하고 순진하다고 입을 모았다. 김동광 부단장은 “우리 때는 외국 선수들과 경기할 때 눈도 찌르고 팔꿈치로 때리기도 했다. 특히 ㅅ선수와 ㅇ선수가 그걸 잘했다”며 웃었다.

허재 감독이 가장 할 말이 많았다. 이번 대회에서 스리랑카·필리핀·쿠웨이트 경기 때 상대의 과격한 플레이에 한국 선수들이 잇따라 쓰러졌기 때문이다. 양동근과 김주성은 눈이 찔렸고, 주희정·양희종·이정석 등도 크고 작은 부상에 시달렸다. 허 감독은 “선수들이 코트에 쓰러질 때면 등줄기에 소름이 오싹 돋는다”고 표현했다. 그는 “선수들이 너무 순해서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를 때리지는 못할망정 한 대 맞고 또 한 대를 더 맞으니 답답하다. 우리 선수들이 너무 당하기만 하니까 어떨 때는 내가 들어가 혼내주고 싶을 정도”라고 했다.

그보다 더 분통이 터진 것은 개최국 중국과 아시아 농구를 좌지우지하는 중동 국가들의 횡포다. 중국은 자신들의 경기 시간을 저녁 7시로 고정 배치했지만 우승 후보 중 하나인 한국팀의 경기 시간은 들쭉날쭉 배정했다. 아침 9시에 경기를 치른 뒤 다음날엔 밤 9시에 경기를 치르니 선수들의 컨디션이 정상일 리 없었다. 허 감독은 “아침 9시 경기 때 김주성과 양동근 등 일부 선수는 새벽 5시에 일어나 밥을 해먹더라”고 전했다. 김 부단장도 “국내 프로리그에서 저녁 7시 경기에 익숙한 선수들이 아침 9시 경기를 해봤겠느냐”면서 “훈련 시간은 전날 저녁 8시에 배정해놓고 다음날 아침 9시에 경기하도록 한 경우도 있다”고 비판했다.

중국의 텃세는 홈 어드밴티지로 이해한다 해도 중동팀들의 편법은 도가 지나치다고 이들은 입을 모았다. 대회 규정은 귀화 선수 1명과 국적 회복 선수 1명만 뛸 수 있다. 그런데 요르단·레바논·카타르 등 중동팀들에는 미국이나 아프리카 출신이 여럿 있다. 요르단은 주전 4명을 포함해 6명이, 레바논은 3명이 이중국적 선수다. 카타르도 2005년 자국에서 개최한 대회 때 미국 선수를 대거 귀화시켜 3위에 입상한 바 있다. 허 감독은 “한국·중국·일본·대만 등 네 나라가 아시아연맹에 중동팀들의 부정 선수 문제를 강력히 제기했지만 소용이 없었다”며 “이게 어디 요르단·레바논과 경기를 하는 것이냐. 미국과 하는 것이지”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주최 쪽 농간에 아침 9시 경기 배정받기도

해답은 스포츠 외교력에서 찾았고, 더 구체적으로는 신 단장이 국제농구연맹(FIBA) 고위직을 맡아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허 감독은 “단장님에 비하면 나나 동광이 형은 어디 가서 농구 했다고 얘기도 못한다”며 신 단장을 치켜세웠다. 실제로 신 단장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아직 필리핀에서 인기가 높다. 필리핀에서는 현역 시절 한 경기에서 혼자 50점 이상을 올리는 등 최고의 활약을 펼친 한국인 신동파를 행운의 상징으로 여긴다. 일이 잘 풀리면 ‘동파’라고 말할 정도다. 신 단장은 “각종 대회에 초대받아 1년에 네댓 차례 필리핀에 간다. 한국에서는 못하는 시구도 종종 한다”며 웃었다.

한국 농구가 낳은 세 스타는 “한국 농구가 더는 국제대회에서 푸대접 받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며 잔을 부딪혔다. 스타 선수와 스타 감독에 이어 스포츠 외교에서도 한국인 스타가 탄생하길 바라는 톈진의 밤이었다.

톈진(중국)=김동훈 기자 한겨레 스포츠부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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