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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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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 대신 이벤트를 즐기는 미국인들

엄청난 물량 공세와 관중의 흥미를 끄는 각종 행사로 채워진 미국식 스포츠마케팅의 현실
등록 2009-08-13 17:10 수정 2020-05-03 04:25

유럽 축구팀들의 프리시즌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왔다. 첼시와 AC밀란 등이 참여한 월드 챔피언십 경기가 이제 막 끝났고, 지금은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미국 프로축구팀과의 경기를 앞두고 있다. 유럽 팀들은 매년 프리시즌이 돌아오면 청명한 날씨와, 무엇보다 달러가 보인다는 이유로 미국을 선호하는 편이다. 하지만 지난 2004년부터 거의 매년 프리시즌을 보기 위해 미국을 찾았건만 축구 열기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베컴까지 온 올해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유럽 팀들이 매년 미국으로 오는 이유는 미국 특유의 마케팅 문화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다.

경기 시작 전 각종 이벤트가 펼쳐지는 미국의 축구경기장 주변. 사진 서민지

경기 시작 전 각종 이벤트가 펼쳐지는 미국의 축구경기장 주변. 사진 서민지

LA갤럭시와 AC밀란의 시합을 보기 위해 경기장에 도착하자 LA갤럭시의 로고가 새겨진 모자를 공짜로 나눠주고 있었다. AC밀란을 응원하는 골수 축구팬들을 LA갤럭시 관중으로 끌어들이려는 의도였다. 뭘 해도 통이 큰 미국에선 종종 이런 식의 일이 벌어지는데, 2004년 시카고에서 열린 바이에른 뮌헨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에선 아디다스 쪽에서 철 지난 바이에른 뮌헨 유니폼 정품을 관객 모두에게 나눠준 적도 있다.

관객 전부에게 유니폼 정품 나눠주기도

경기 다음날 미국의 일간지들을 차례로 살폈다. 경기 내용에 관한 기사를 예측하며 들춰봤지만 신문 어디에도 이에 관한 언급은 없었다. 다만 미국 관중들이 AC밀란으로 임대를 간 베컴에게 야유를 퍼부으며 그를 도발했다는 단신만 나와 있을 따름이었다. 그러고 보니 경기 당일 본 수많은 기자들은 전부 스페인어를 쓰는 히스패닉이었다. 미국에서는 주요 매체들보다 히스패닉들을 위한 개인 방송사들이 축구 경기에 훨씬 많은 관심을 보인다.

그런데 미국에서 축구가 이토록 비인기 종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인들은 축구 경기가 진행되는 90분 동안 고작 2~3점씩 득점이 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한다. 야구나 미식축구처럼 쭉쭉 뻗은 미녀들이 치어리더로 나서거나, 격투기처럼 잔인하고 역동적인 스포츠가 아니면 눈길도 안 주는 것이다.

미국인들은 스포츠를 연예·오락의 연장선으로 이해한다. 그래서 축구 경기를 할 때도 해설자가 침을 튀기며 흥미 위주의 멘트를 남발하거나 하프타임 때 갖가지 이벤트로 관중의 시선을 끌려 노력한다. 첼시와 인테르밀란의 경기에선 미국의 유명 배우인 샤를리즈 테론까지 피치에 올라 팬들의 환심을 모아야만 했다. 첼시의 공개 훈련장에는 미국프로농구(NBA) 스타들이 대거 방문해 눈길을 끌었고, 경기 전 전직 미국 축구선수들의 미니게임이 마련되기도 했다.

미국인들은 경기가 열리는 날엔 소풍 가는 것 못잖게 유난을 떤다. 경기 시작 서너 시간 전에 도착해 경기장 주변의 이벤트를 즐기거나 자기들만의 파티를 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잔디 깔린 주차장에선 축구 게임이 벌어지고 한쪽에선 바비큐를 굽는 연기가 피어오른다. 경기장 또한 인근 도시와 멀찍이 떨어져 있어 자동차가 없으면 경기를 보러 오기도 힘들다. 대부분 지하철을 타고 경기장을 찾는 유럽 관중들과는 또 다른 면모라고 할 수 있다.

경기가 시작되면 일단 파도타기 응원이 경기장을 크게 한 바퀴 돈다. 좌석도 각양각색이다. 한쪽에는 경사진 잔디밭이 있어 선탠을 할 수도 있고, 심지어는 스파를 즐기면서 경기를 관람하는 패키지 상품도 마련돼 있다. 테라스석이 별도로 있어 뷔페를 먹으면서 선수들의 모습을 지켜보기도 한다. 경기 전후로는 아디다스나 삼성 등 스폰서 기업들이 주최하는 이벤트를 통해 선수들과 사진 촬영을 하기도 한다. 이렇듯 경기 시작 전부터 경기가 끝날 때까지 관중들의 흥미가 식지 않도록 하기 위해 관심을 끌어주는 세세한 이벤트들이야말로 미국식 축구 마케팅의 실체다. 이번 월드 챌린지컵을 주관한 CAA라는 스포츠마케팅 회사가 바르셀로나와 첼시 등의 다국적 마케팅을 도맡고 있다는 것만 봐도 유럽 클럽을 한 손에 쥔 미국의 힘을 잘 알 수 있다.

기자실엔 에어컨에 전담 아나운서까지

미국에서는 ‘언론 관리’ 또한 유별나다. 미국 축구 경기장의 기자석은 VIP 부스처럼 창문으로 막아놓아 에어컨 바람을 쐬면서 경기를 볼 수 있다. 그래서인지 꼭 TV 스크린을 통해 경기를 관람하는 기분이 든다. 심지어 기자들을 위한 아나운서가 따로 배치돼 있다. 선수가 득점을 하거나 교체될 때면 아나운서가 기자들에게 이를 일일이 설명해주는 것이다. 마케팅을 위해서는 미디어의 힘 또한 중요하다는 사실을 아는 주최 쪽의 배려이리라.

축구 자체보다는 이를 둘러싼 각종 이벤트를 더욱 즐기는 미국 관중들을 보면, 미국은 축구가 진정한 인기 종목으로 자리잡기에는 갈길이 먼 나라라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매년 세계 유명 클럽을 초청해 이벤트를 열어갈 수 있을 정도로 스포츠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돼 있다는 점에서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하다.

서민지 축구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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