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사계절 펴냄, 9500원 </font>
일본에 귀화하지 않은 재일동포로서는 처음으로 도쿄대 정교수가 된 강상중 교수가 지난해 출간한 밀리언셀러 (슈에이샤 펴냄)에는 서울대 방문 체험담이 실려 있다. 그가 목격한 것은 이른바 엘리트 학생들이 기술과 전문지식을 익히고 유용한 정보를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하기 위해 놀 시간도 없이 “미국화된 프로그램을 필사적으로 소화시키고 있는 모습”이었다. “토익 900점을 넘지 않으면 취직하기 힘들다”며 공부에 열중하는 그들을 보며 그는 위화감에 사로잡혔고 “너무 나이가 많아서”라는 20대의 얘기를 듣고는 자신의 청춘기와 너무나 달라 깜짝 놀란다. 유독 서울대가 그렇다는 얘기가 아니다. 강 교수가 말하고 싶은 것은 오히려 ‘서울대, 너마저!’에 가깝다.
강 교수가 흐린 납 빛깔로 그리는 일본 사회는 사람을 소모품처럼 쓰고 버리는 가혹한 경쟁 시스템, 점점 얇아지고 약해지는 사회 안전망, 승자와 패자 사이의 격심한 차이로 만신창이가 된, 젊은이들이 견뎌내기에는 너무나 혹독한 곳이다. 그 속에서 그가 본 것은 “타인과 깊지 않은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그런 ‘요령이 뛰어난’ 젊음”이었고 “정념과 같은 것은 사전에서 잘라낸, 또는 처음부터 탈색되어 있는 청춘”들이었다. 강 교수는 그런 바싹 마른 건조한 청춘들이 얼핏 원숙한 듯 보이지만 “진짜로 원숙한 것이 아니라 바닥이 얕은 원숙함, 곧 원숙한 기운만 풍기는” ‘표층적 원숙’에 지나지 않는다며 그것을 ‘발기불능’에 비유했다.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근본적으로 어디서부터 무엇이 잘못된 것인가?
강 교수가 눈을 돌린 곳은 “때로 스스로를 말살시키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던” 자신의 우울했던 청춘시대에 길잡이가 되어준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다. 규슈 재일동포 고물상 아들이었던 그는 17살 사춘기 때 디아스포라로서의 자기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22살 때 정면돌파를 위해 찾은 조국에서 그는 문득 “내가 인생에 대해 묻는다기보다는 인생이 내게 묻고 있다”는 깨달음과 함께 그때까지 쓰고 있던 일본 이름을 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자아의 질곡’에서 해방된 것도 아니고 인생의 해답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해답이 없더라도 내가 갈 수 있는 곳까지 갈 수밖에 없다는 해답”을 찾았다. 그때 20세기 최고의 사회학자 베버에게 푹 빠졌다. 베버를 통해 그는 또 어릴 때부터 읽었던 일본 근대문학의 아버지 나쓰메의 작품들을 새롭게 발견했다. 나쓰메의 에 나오는 주인공 다이스케의 처지와 비슷하다고 그가 느꼈던 베버는 “험난한 세계 속에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발버둥치면서 필사적으로 묻고 있었다.”
강 교수는 1세기의 간격을 둔 베버·나쓰메의 시대와 지금의 발기불능 청춘들이 안고 있는 문제와 고민은 양태와 진폭이 좀 다를 뿐 본질적으로 동일하다고 본다. 그는 베버와 나쓰메가 지금의 발기불능 청춘들과는 달리 ‘인간적으로 산다는 게 무언가’ 하는 근본적 문제와 진지하게, 끝까지, 정신병원 신세를 질 정도로 신경쇠약과 위궤양에 시달리면서도 필사적으로 고민하며 맞붙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 진지성이 그들의 위대성이었다.
나는 누구인가, 돈이 전부인가, 제대로 안다는 건 무엇인가, 청춘은 아름다운가, 믿으면 구원받을까, 무엇을 위해 일하나,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왜 죽어선 안 되는 걸까, 늙어서 최강이 되라. 이 아홉 가지 무거울 수 있는 주제를 베버와 나쓰메 얘기로 풀어가는 그의 인생강의는 경쾌하고 발랄하다.
한승동 한겨레 선임기자 sdhan@hani.co.kr
* 2009년 3월28일치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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