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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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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월드컵’ 감동이 2푼 부족한 이유

그 밥에 그 나물인 상대팀에 경기 대진 방식도 난해
등록 2009-03-24 12:32 수정 2020-05-03 04:25

이런 상상을 해본다. 2012년 가을, ‘야구 월드컵’으로 불리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조 추첨식이 지구촌의 관심 속에 부산 벡스코(BEXCO)에서 성대하게 열린다. 세계 랭킹 3위인 한국은 미국·쿠바·일본과 함께 1그룹에 속해 C조 시드를 배정받는다. 세계 랭킹에 따라 2그룹은 대만·네덜란드·캐나다·멕시코이고, 3그룹은 파나마·오스트레일리아·푸에르토리코·이탈리아다. 4그룹은 중국·베네수엘라·도미니카공화국·남아프리카공화국이다. 2그룹의 멕시코, 3그룹의 이탈리아, 4그룹의 남아공이 차례로 한국과 같은 C조에 편성된다.
마침내 2013년 3월. 16개국이 참가한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 서울과 수원, 인천 등 한국의 8개 도시에서 막을 올린다. 모든 경기가 전세계에 중계되고 야구장마다 만원 관중이 열기를 뿜어댄다. 한국은 대구와 광주, 인천에서 멕시코와 이탈리아, 남아공을 연파하고 3전 전승을 거둬 C조 1위로 8강에 오른다.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 대표팀이 지난 3월18일(한국시각) 미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라운드 1조 승자팀 경기에서 일본을 4대 1로 누른 뒤 환호하고 있다. 사진 AP PHOTO/ CHRIS PARK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한국 대표팀이 지난 3월18일(한국시각) 미 샌디에이고 펫코파크에서 열린 2라운드 1조 승자팀 경기에서 일본을 4대 1로 누른 뒤 환호하고 있다. 사진 AP PHOTO/ CHRIS PARK

8강전 이상 개최지 이번에도 미국

8강전은 4개팀씩 두 조로 나뉘어 리그전을 펼친다. C조 1위인 한국은 A조 1위 쿠바, B조 2위 대만, D조 2위 네덜란드와 8강 리그 1조에 편성된다. 한국은 대전과 수원, 부산에서 열린 경기에서 세 팀을 차례로 제압하고 당당히 8강 리그 1조 1위로 준결승에 오른다.

4강전과 결승전은 크로스 토너먼트 방식으로 잠실야구장에서 열린다. 한국의 준결승 상대는 8강 리그 2조 2위로 올라온 일본. 한국은 ‘숙적’ 일본마저 누르고 준결승에서 쿠바를 꺾은 미국과 대망의 결승전을 갖는다. 그리고 마침내 한국은 미국마저 누르고 세계 야구 정상에 오른다.

밥 잘 먹고 이런 ‘소설’을 쓰고 있는 이유가 있다. 요즘 미국에서 열리고 있는 제2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한국이 4강에 올랐지만 그 열기는 2002 한-일 월드컵 4강에 견줘 훨씬 떨어진다. 이유가 있다. 1회 대회에 이어 이번에도 16강 조별리그가 대륙별로 분산돼 흥미가 반감됐다. 야구팬들의 1라운드 밥상에 오른 메뉴는 이번에도 일본, 대만, 중국이다. 북중미나 유럽 같은 색다른 팀들의 야구도 감상하고 싶지만, 이번에도 그 밥에 그 나물이다.

8강~결승전 개최지도 1회 대회와 똑같이 미국이다. 하필 8강 상대팀도 3년 전 일본·멕시코·미국에서 별반 다르지 않은 일본·멕시코·쿠바다. 특히 일본과는 지겹도록 맞붙었다. 일본인 투수 마쓰자카 다이스케가 “한국과 시합이 너무 잦다”며 불만을 터뜨릴 정도다.

경기 방식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1회 대회 때 같은 조 1위와 2위가 준결승을 갖는 듣도 보도 못한 경기 방식 때문에 한국은 피해를 봤다. 그런데 이번에도 두 번 제거한다는 뜻의 ‘더블 일리미네이션’이라는 난해한 방식을 도입했다. 올림픽에서 유도나 레슬링 같은 투기종목에서 흔히 보는 패자부활전 방식과도 다르다. 올림픽 패자부활전은 살아남아도 동메달에 그치지만, 더블 일리미네이션은 한 번 지더라도 나머지 경기를 모두 이기면 최종 승자가 된다. 한국이 조별리그 A조에서 애초 일본한테 지고도 1·2위 결정전에서 이겨 조 1위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게 좋은 예다. 어쨌든 복잡하다.

한국 야구는 이미 세계 정상급이다. 쿠바·미국·일본 어느 나라와 만나도 뒤질 게 없다. 1·2회 대회 연속 4강과 베이징올림픽 금메달이 우연이 아님을 입증하고 있다. 사실 일본은 한국에 아시아 1인자 자리를 빼앗겼다는 자존심 때문에 이번 대회에 최강의 전력을 구축했다. 스즈키 이치로, 마쓰자카 다이스케, 우에하라 고지, 조지마 겐지, 후쿠도메 고스케, 이와무라 아키노리…. 마쓰이 히데키 정도만 빼곤 메이저리그 정상급 선수들이 대거 합류했다. 반면에 한국은 박찬호, 이승엽, 김병현, 백차승 등 해외파 간판급 선수들이 모조리 빠졌다. 메이저리거는 추신수가 유일하지만 그나마 2라운드 로스터에도 들지 못했다. 그런데도 일본은 한국의 벽을 넘지 못했다.

격세지감이다. 김재박의 ‘개구리 번트’와 한대화의 역전 스리런 홈런이 국민들의 뇌리에 깊숙이 박힌 1982년 제27회 세계야구선수권대회에서 한국이 우승을 차지했지만, 당시 일본은 사회인 선수들로 구성됐다. 반면에 한국은 김재박, 장효조, 최동원, 이해창, 김시진, 박종훈 등 한 시대를 풍미한 최고 선수들이 프로 입문을 1년 유예해가며 대회에 참가했다. 여기에 선동열, 박노준, 한대화 등 뛰어난 대학 선수들까지 가세했다.

개구리 번트와 역전 스리런의 추억

그런데도 일본 사회인 선수들에게 고전했다. 1990년대도 마찬가지다. 한국은 82년 프로야구 출범 뒤 91년부터 4년마다 한-일 프로야구 선수끼리 맞붙는 한-일 슈퍼게임을 가졌다. 99년까지 세 차례 열린 이 대회에서 한국은 프로 2군 선수들이 주축이던 일본에 맥을 못 췄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 야구는 일본 정상급 선수들을 마침내 넘어섰다. 이제는 프로야구 75년 역사를 자랑하는 일본이 한국을 이기려고 발버둥쳐도 맘대로 안 된다. 한국 프로야구 27년간의 ‘내공’이 마침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은 전세계에서 축구와 야구 두 종목 모두 ‘4강’을 경험한 유일한 나라다. 그런데 월드베이스볼클래식이 전해주는 감동은 왠지 2% 부족하다. 4년 뒤에는 미국이 아닌 다른 곳에서 열려 지구촌 축제가 됐으면 좋겠다. 경기 방식도 누구나 쉽게 이해하도록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세계 최고의 한국 야구가 더욱 빛날 것이다. 나머지 2%의 감동까지 국민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김동훈 기자 can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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