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주후면’(先酒後麵)이란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명사] 먼저 술을 마시고 나중에 국수를 먹음’이라고 너무 재미없게 풀이돼 있다. 애주가들은 술과 밥이 같이 나오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자기 주량만큼 어느 정도 술을 마신 뒤 곡기를 조금 채우는 게 보통이고, 술자리에서는 아예 식사를 하지 않는 술꾼들도 많다. 속이 비어야 첫 잔을 털어넣을 때 짜르르한 맛이 나고, 또 술도 양껏 마실 수 있기 때문이리라.
실전에서도 ‘선주후면’은 술부터 마시고 밥은 나중에 먹으라는 공리로 암암리에 자리잡았는데, 술 다음에 왜 밥이 아니고 국수일까? 술도 술술 넘어가고 국수도 술술 넘어가기 때문일까? 인터넷에서 찾아보니 어떤 술꾼은 ‘선주후면’을 “냉면을 먹기 전에 술을 몇 잔 마셔야 냉면 맛이 좋다”고 자기 편하게 풀이하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에서 나온 은 아래와 같이 ‘선주후면’이 평양 지방 고유의 식생활 격식이었음을 설명한다.
“‘선주후면’이라는 말은 ‘자리에 앉으면 먼저 술을 들고 후에 국수를 먹는다’는 평양 고유의 속담을 한문으로 옮긴 것으로서 술을 마신 다음 국수를 먹어야 속이 거뜬하다는 사람들의 식성을 반영하고 있다. 술과 국수는 이렇게 서로 뗄 수 없는 것으로 되고 있다.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훌륭한 민족적인 음식을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각 지방마다 독특한 요리 및 식사법도 가지고 있었다. 선주후면은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에서 우리 선조들이 가장 귀한 손님들에게 대접하는 식사법의 하나로 전해지고 있다.
성격이 용맹하고 강직한 평양 사람들은 연한 술과 떡을 좋아하는 남도 사람들과는 달리 보통 40%가 넘는 독한 술을 즐겨 마셨다. 특히 빛깔 좋고 단맛이 있으면서도 40~50%의 독한 감홍로는 평양 특산물로서 이름이 높았는데, 조선 후기에 쓰인 에는 감홍로가 당시 왕에게 올리는 진상품의 하나로 돼 있었다. 옛 평양 사람들은 귀한 손님을 맞거나 경사가 나든가 하면 감홍로를 마시면서 즐겼으며, 술을 마신 다음에는 여러 가지 채소와 쇠고기 또는 닭고기 등으로 꾸미를 올려놓은 메밀국수를 먹었다. 이런 데로부터 평양 사람들은 예로부터 자기 지방의 독특한 손님 접대 방식으로 ‘선주후면’을 대대손손 내려오면서 전해왔다.
선주후면은 사람의 건강에 필요한 각종 영양물질들을 합리적으로 배합해 섭취하고 그것을 소화·흡수하도록 하는 좋은 식사법이라고 할 수 있다. 선주후면은 또한 산성 식품인 술과 알카리성 식품인 메밀국수를 배합해 마시고 먹게 함으로써 식사에서 산과 알카리의 균형을 잘 조화시켜준다고 한다. 선주후면이 이처럼 독한 평양 술에 시원한 냉면을 곁들여 즐겨 먹던 평양 사람들의 독특한 식사법이고, 평양이 냉면과 선주후면의 고향이라면 그에 대비되는 칼국수는 남부 조선, 특히 독한 술을 좋아하지 않던 경상도나 전라도 사람들과 기후 조건상 메밀을 심을 수 없는 남부 지방에서 귀한 사람들이 오면 햅밀과 닭고기로 만들어 내놓았던 음식이다.”
내가 사는 경기 용인 신갈오거리 부근에 ‘고향국수’(주인 김미자·031-283-9494)라는 아주 맛있는 국숫집이 하나 있다. 나는 정갈한 이 집의 국수 맛에 끌려 자주 들리곤 했는데, 어느 날 후배 몇몇과 선면(先麵)하다가 뜻이 맞아 밤늦도록 후주(後酒)까지 하게 되었다. 그런데 잘 삶아 찬물에 여러 번 헹궈 쫄깃한 면발, 멸치로 다시를 낸 시원한 국물만큼이나 이 집의 안주도 감칠맛이 있으면서 깔끔했다. ‘고향국수’의 안주는 7천원짜리 딱 세 가지로, 노릇노릇한 감자전, 두툼한 파전, 새콤하게 볶은 김치에 데친 두부가 나오는 두부김치이니, 2인 기준으로 안주 한 접시 7천원, 막걸리 두 병 6천원, 잔치국수 두 그릇 6천원 도합 1만9천원이면 선주후면의 ‘소박한 술상’이 떡하니 차려진다(사진). 물론 선주로 소주나 맥주를 택할 수도 있고, 후면 메뉴로는 값 4천원의 콩국수와 비빔국수도 있다. 1천원만 더 쓰면 어느 국수든 곱빼기이니, 국수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참으로 넉넉한 집이다.
음식 칼럼니스트 blog.naver.com/hakmin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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