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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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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J의 다이너마이트

등록 2000-10-17 00:00 수정 2020-05-02 04:21

지난 10월13일, 이날의 뉴스의 주인공은 단연 전·현직 대통령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것도 가장 극명히 대비되는 모습으로 톱뉴스를 장식했습니다. 한 사람이 노벨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돼 절정의 기쁨을 만끽했다면, 다른 한 사람은 고려대 앞에서 14시간이나 ‘차 안 농성’을 벌이며 권력무상을 곱씹어야만 했습니다. 현직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의 빛이 환할수록 전직 대통령의 그림자는 더욱 짙고 음울하게만 보였습니다.

김 전 대통령의 이날 ‘고집’과 ‘발언’들을 지켜보면서 우선 떠오른 생각은 ‘어떻게 저렇게 철저히 망가질 수 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앙탈’은 한없이 초라해 보이고 오히려 측은한 심정까지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그의 집권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를 했던 경험이 있기에 그런 심정이 더욱 각별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어쨌든 한때는 문민정권을 연 대통령으로 외국에서 찬사를 받은 적도 있었는데…. 그리고 최고권력자가 빠지기 쉬운 ‘도취의 위험’을 다시 한번 생각했습니다.

김 전 대통령이 몰락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 도취도 단단히 한몫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외국에서 치켜올리는 데 너무 으쓱했던 것이 치명적인 독(毒)이었다는 게 저의 판단입니다. 사실 김 전 대통령에 대한 당시 외국의 평가는 국내에서보다는 훨씬 후했습니다. 오랜 야당 시절의 민주화 투쟁 경력, 군부정권의 시대를 끝낸 최초의 문민대통령, 그리고 전직 대통령들을 감옥에 보낸 과단성 등은 외국언론에서 보기에는 경탄의 대상이었던 듯합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은 이런 찬사를 그저 귓등으로 흘려보내고 평상심을 유지하는 데 실패했습니다. 오히려 국내의 이런저런 비판에 직면하면서 짜증만 늘어갔습니다. ‘외국에서는 이렇게 나를 높게 평가하는데 왜 국내에서는 몰라줄까’ 하는 억울함 같은 것이었지요.

도취의 위험에 대한 우려의 눈길은 자연히 김대중 대통령에게로 향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성격이나 분별력, 자제력 등이 판이하기 때문에 이런 우려는 한낱 기우일 수도 있으며, 또 그러길 바랍니다. 그러나 김 대통령도 한 인간인 만큼 그런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는 장담할 수 없습니다. 더욱이 평화상 수상 소식 이후 이어지는 용비어천가 행렬의 한편으로, 이런저런 비아냥거림이 나오는 것도 그런 우려를 더하게 합니다.

사실 평화상이란 것이 결코 국내에 평화를 가져다주진 않는 모양입니다. 오히려 갈등과 분란의 씨앗마저 되고 있는 게 오늘의 양상입니다. 김 대통령의 입장에서 보면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것이 엄연한 현실인데 말입니다. 지상에 굳건히 발을 붙이고 하루하루를 헤쳐가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고 김 대통령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축하의 불꽃놀이는 한번으로 족하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도취의 반대말은 각성입니다. 황홀경에서 벗어나 깬 눈으로 보면 가야 할 길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것을 저는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리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잘 알다시피 노벨상은 노벨이 다이너마이트로 번 돈으로 주는 상입니다. 그래서 이 상에 대한 근원적인 비판이 제기되기도 하지요. 그러나 김 대통령은 정말 다이너마이트를 터뜨려야 합니다. 아직도 막혀 있는 인권상황의 장애물들, 남북에 가로막힌 벽, 그리고 우리 내부의 불신과 갈등의 담벼락을 통쾌히 무너뜨리는 다이너마이트 말입니다.

한겨레21 편집장 김종구 kj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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